지리산 함양 마천면의 절집
-앞 편에서 계속
이제 글 앞에서 인용한 이덕무가 옮긴 ‘군자사 사적기’의 후반부를 다시 살펴보자.
‘1680년 청신사(淸信士) 순일 운석(淳一韻釋)이 옛 누(樓)를 고쳐 새롭게 하고, 신관도인(信寬道人)이 기와를 새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단청은 올리지 못했다가 1684년 봄에 통정 태감법사(太鑑法師)가 유악(幼堊)을 칠하였다.
-1684)에 방호의 필추(苾芻 비구比丘) 형곡복환 쓰다.’
위의 건물 불사와 관련된 인물들은 법맥이나 행적이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1684년 유악을 칠했다는 ‘통정 태감법사’는 1686년 4월 27일 정시한이 견성암에서 만난 태감과 동일인으로 보인다. 정시한은 이후에도 태감과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볼 수 있다. 통정이라는 품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태감은 60대의 정시한과 수시로 만나 대화를 나눌 정도로 나이도 들었고, 법력도 높았을 승려도 짐작된다.
‘군자사 사적’을 지은 형곡복환에 대한 생애와 행적은 알 수 없으나, 그는 청허휴정(서산대사)의 3세손으로, 중관해안-능허청간의 법맥을 이은 승려로 『불조원류』에서 확인된다. 형곡복환의 법조가 되는 중관해안(1567~미상)은 청허휴정의 제자로 청매대사와는 법형제이고, 화엄사와 금산사 등 대가람의 사적기를 지은 인물로, 청매대사의 제문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형복복환의 제자인 월화탄천은 『등구사 사적기』를 지었다.
이렇듯 17세기 군자사에는 마천면의 절집에서 주로 활동하였을 청매대사와 그의 문도들의 흔적이 서려있다. 18세기 초중반에 활동하였던 승려 월파태율은 그가 수행하며 머물던 절집의 이름을 그의 행장(行狀)에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군자사의 영원암’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군자사가 수(首)사찰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시한이 약 한 달 여 삼정산 자락의 산중암자에서 머물 때, 군자사의 승려들이 먹을거리 등 여러 물품들을 가지고 방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군자사의 승려로는 ‘불존승 전이, 선보, 승통 법안, 삼보승 수백, 성문, 능열, 영우, 은탁, 승통 홍간, 자신, 노장 해철, 성건’ 등 12명의 이름이 『산중일기』에 보인다.
이동항(1736~1804)은 1790년 4월에 지리산을 유람하며 「유방장록」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벽송사 입구에서 설파상언의 제자 도원(道元)을 만나 군자사로 함께 이동하였다. 군자사에 도착한 이동항은 누각에 올라, ‘만세루(萬世樓)에 앉아서 남쪽으로 천왕봉을 바라보니, 가깝기가 만세루의 처마를 짓누르는 듯하였다.’라는 느낌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1610년 박여량이 전란 뒤에 새로 지은 남쪽 누각이 있었다고 한 건물의 이름이 ‘만세루’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동항이 도원의 스승이라고 언급한 설파대사는 화엄학의 대종장으로 명성이 높았던 고승으로, 당시 영원암에 주석하고 있었다. 설파대사는 편양언기-풍담의심-월담설제-환성지안-호암체정으로 전해지는 법맥을 이었는데, 법호가 둔암(遁岩)인 도원은 설파대사의 제자임이 『불조원류』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이동항은 오후에 도원의 초청으로 명적암으로 옮겨, 서로 마음을 터놓고 유교의 ‘심성이기(心性理氣)’를 비롯한 유불도(儒彿道) 학문 토론의 장을 한바탕 펼친다. 이동항은 도원에 대해, ‘몸집과 옷차림이 건장하고도 준수하였으며, 도량이 호탕하고 말씨도 시원시원하면서도 힘찬 것이 참으로 뛰어난 인물이었다.’라는 인상과 함께, ‘가진 식견의 명쾌하고 뛰어남은 유교의 노성한 학자라도 당해내기 힘들 정도’라며 내외전에 두루 통달하였음을 평하고 있다.
그런데 이동항은 ‘군자사는 신라시대에 지어진 왕비의 원당(願堂)이었다. 왕비가 이 절에 거둥하였을 때에 태자를 낳았기 때문에 절 이름을 ‘군자사’라고 하였다.’라는 군자사의 창건유래에 색다른 의견을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이때 이동항은 당시 사회상과 더불어 군자사의 형편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을 그의 「방장유록」에 남기고 있다.
“아! 엄천(嚴川)과 마천(馬川)이야말로 예로부터 낙토(樂土)라고 말해져 왔다. 60리나 되는 큰 골짜기의 논둑과 보리밭 언덕에 한 덩이의 흙도 그냥 놓아둔 곳이 없었다. 뽕나무와 삼과 닥나무와 옻나무, 대나무화살, 목기, 감나무, 밤나무 등의 수확이 온 도내에서 으뜸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밀집해서 살고 있어 마을이 줄줄이 이어져 있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즐겁게 살고 있고, 그들의 직업도 편안한데, 불법으로 재물을 모으려는 관리들이 쳐들어 와서 안심하고 살 수가 없게 되었으니 탄식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이동항이 다녀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807년에는 함양군수로 재임 중이던 남주헌(1769~1821)이 지리산 유람을 마치고 관아로 돌아가는 도중에 군자사에 들렀다.
1807년 3월 30일 남주헌(1769~1821) 「지리산행기」
“백모당(白毛堂)을 지나자 길이 조금 평탄했다. 군자사로 향하였는데, 이 절은 들판에 있다. 승려들이 합장을 올리며 동구 밖까지 나왔으니, 그것은 내가 함양군수로서 왔기 때문이다. 절이 매우 퇴락하여 내가 부임한 후에 승려들이 조금 모여 들었다. 사찰의 산수와 종소리・경쇠소리는 쌍계사나 칠불암에 비해 한참 못한 듯하였다.”
당시 힘겹게 유지되고 있던 절집 상황이 어느 정도 파악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남주헌이 다녀간 지 25년 후인 1832년에 간행된 『함양군읍지』에는 ‘지금은 없다(今無)’라고 나오며, 유서 깊은 군자사가 폐사된 상황을 전하고 있다. 군자사의 폐사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앞의 이동항이 개탄해하는 글에서 그 단서가 짐작된다. 18~19세기에 이르면 사찰과 승려에 대한 혹독한 승역(僧役), 지역(紙役), 잡역(雜役)이 가중되었고, 사찰에 대한 중앙 및 지방정부의 수탈도 심해졌다. 이러한 부담을 이기지 못한 승려들이 환속하거나 은둔하게 되면서 절집은 비게 되고, 결국 폐사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인근의 큰 고을인 남원의 경우에도 ‘파근사 외에는 승려들이 없다’라는 암행어사의 보고가 있을 정도로 전국적으로 사찰의 수가 줄어들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결국 이러한 사회상과 더불어, 몰려드는 유람객들의 수발까지 감당해야 했을 군자사의 승려들은 떠나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846년 민재남(閔在南. 1802-1873)은 지리산 북쪽 산자락의 여러 곳을 다니며 「산북기행 이십 수(山北紀行 二十首)」라는 연작시(連作詩)를 남겼다. 이때 ‘군자사를 바라보며(望君子寺)’ 라는 시에서, “초가지붕 처마 맞대고 대나무 울타리 둘렀지만, 옛적엔 절집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네.”라는 글로서, 이미 마을로 변해버린 옛 군자사 절터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끝. (25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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