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인문학의 보고, '족보'
2025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하는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 공모에, 필자가 기획하고 책사랑작은도서관과 협업하여 응모한 지리산 구룡계곡 인문기행 ‘용호구곡 각자를 찾아서’ 프로그램이 2023년에 이어 또다시 선정되었다.
그런데 예전 3회 차 강의‧답사로 진행되던 ‘여행지 길 위의 인문학’이 올해에는 ‘길 위의 인문학’으로 프로그램명이 바뀌며 강의‧답사 횟수도 10회 차로 늘어났다. 종전대로 용호구곡 역사 등 인문강의에 대해서는 필자가 7회를 맡았고, 3회는 남원 소리꾼의 득음수련장을 테마로 오랫동안 관련 공부를 해온 김용근 선생의 강의를 추가하여 편성하였다. 지난 10월 하순, 프로그램은 잘 종료되었다.
필자는 답사를 전제로 준비하던 지난 프로그램과는 달리, 늘어난 강의시간만큼 원천(현 주천면)과 용호구곡이라는 공간에 좀 더 심도 있게 접근하여 관련 내용을 프로그램 참여자들과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조선후기에서 근대기에 이르는 동안 이곳에서 활동하며 남원 지역사에 적지 않은 족적을 남긴 역사인물에 대해서나, 용호구곡에 대한 인문학적 서술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점에 대해 필자가 마음을 두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프로그램은 종료된 지 한참 지났지만 필자는 아직 그 시공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어제 구룡계곡 주차장 인근에 계시는 노(盧)선생님을 뵙고 ‘풍천노씨문효공파세보’ 2권을 빌려 오면서 비로소 그 출구가 보이는 듯하다.
구룡계곡 입구 육모정 인근 현재 용호서원 터에 있었던 건물은 19세기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던 사당(용호당, 혹은 용호사)과 1924년 새롭게 건립된 ‘용호정사’가 있다. 그런데 비슷한 건물 이름을 지녔고 또 주자 영정을 봉안하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건물의 운영을 주도한 문중(혹은 세력)이나 영정봉안의 목적은 전혀 달랐다.
결과적으로 말해 17~19세기 말 시기는 풍천노씨 주도로, 20세기 초부터는 경주김씨에 의해 이 건물이 운영되었다. 앞 시기의 운영 목적은 원동향약의 실시이고, 후자의 경우는 주자성리학의 강학과 수신을 위한 구곡문화의 주요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건물과 관련된 두 가문의 활동을 파악하지 않고는 용호정사 터의 역사적 변천과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던 중 고민 끝에 염치없이 노선생님께 족보 좀 빌려달라고 부탁을 하게 된 것이다. 흔쾌히 응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필자는 용성지 등 여러 문헌기록에 등장하는 풍천노씨 인물들의 행적을 파악하기 위해 진작부터 국립중앙박물관 웹사이트에서 제공하는 1845년 발간 ‘풍천노씨세보’를 자주 들춰보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궁장현은 17세기부터 풍천노씨들의 묘소가 들어선 곳이며, 묘동은 ‘백암 궁장’에 있다는 내용을 발견했다. 즉 궁장현은 현재의 주천면과 이백면의 경계를 이루는 장백산 능선 상의 활개미고개이며 묘동은 백파면과 백암면이 합쳐지며 지금의 이백면이 되기 전 장백산 동쪽 산자락인 백암 쪽에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19번 국도 아래에 있는 정유재란 ‘궁장현 전적기념탑’은 쌈지공원으로서의 의미는 없지 않다 하겠으나 고개의 올바른 위치는 아니다.
그리고 어제 빌려온 1995년 발간 ‘풍천노씨 문효공파세보’를 들춰보다가 오늘 발견한 것은 부봉(釜峰)이라는 지명이다. 조선후기 영조~순조대에 살았던 옥계 노진의 후손 노정두라는 분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족보에는 친절하게도 지번까지 나와 있다. 그리고 뜻밖의 기록이 추가 되어 있다. ‘부봉 아래에 묘가 있는데, 이곳에 ‘石床面刻’이 있다‘는 내용이다. 이 봉우리는 17세기부터 풍천노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호기마을의 서쪽 뒷산이다.
이곳은 해당 지번의 지도상 위치로 볼 때, 덕음산 ‘애기봉’으로 부르는 곳 동쪽 산자락에 있고, 돼지바위(저바위) 마애불상이 있는 곳을 두르고 있다. 상석의 면에 글 등을 새긴 것은 다른 묘소에도 얼마든지 있는데, 굳이 이곳에만 ’면각‘(面刻)이 있다고 언급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아무튼 내일 이곳을 동지들과 답사키로 했다. 280여 년 전에 살았던 이 어른의 묘소를 찾게 되면 스토리텔링으로 이름 지어진 애기봉(달애기봉)이 ’부봉‘, 즉 ’가마봉‘이라는 본 이름을 버젓이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적어도 18세기 이전 이곳에 존재하고 있던 마애불상에 대한 첫 문헌기록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한 문중의 족보에는 이렇듯 지역 인문학의 중요한 단서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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