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손때
‘레트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이유는 둘인데 첫째는 그저 취향 때문이다. 아무래도 ‘재현’보다는 ‘원본’이 좋다. 1980년대 음악을 완벽히 재현한 요즘 노래보다는 그때 당시의 노래를 듣는 쪽이다. 수십 년 전 영화 포스터를 붙이고 ‘오빠는 풍각쟁이’를 트는 힙한 식당보다는, 말없이 수십 살을 먹은 노포에 더 끌린다. 물론 누가 맞다 틀리다를 얘기하고 싶은 건 아니다. 취향이란 사람마다 다른 법이니까.
레트로를 좋아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좀 더 사회적 맥락에 가깝다. 그리고 만약 괜찮다면, 두 번째 이유에는 읽는 분이 공감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살짝은 있다. 생각할 거리 하나 정도를 곱씹어 볼 여유가 있다면, ‘멸균소독 레트로 테마파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회사 앞에는 ‘돈의문박물관마을’이라는 공간이 있다. 레트로를 표방한 깔끔한 문화공간이다. 옛 건물 40채를 유지·보수하고 오래된 소품을 들여놓았다. 1970년대 좁은 골목길을 재현했지만 냄새는 나지 않는다. 골목 구석에 놓인 연탄재는 가짜다. 비가 와도 허여멀건 잿물이 흐를 일은 없다. 개화기와 7080과 1990년대가 마구잡이로 뒤섞여서 도대체 뭘 재현하려 한 건지 모르겠지만, 인스타그램 사진을 찍기엔 좋다.
테마파크가 되기 전 이곳은 유명한 ‘맛집 골목’이었다고 한다. 회사를 오래 다닌 선배들은 ‘사람 냄새 나던’ 골목의 허름한 맛집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골목의 재개발이 한창이던 2016년 4월, 한 식당 주인이 강제철거에 항의하며 분신해 숨졌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은 바로 그 터 위에 세워졌다. 한때 골목을 채웠을 ‘사람 냄새’는 깔끔히 멸균소독됐다. 허름함을 말끔하게 재현한 골목에서, 나는 생(生)을 뽑고 껍데기만 남기는 박제의 공법을 본다. 도둑맞은 손때를 본다. 벽화 속 철수와 영희는 ‘크리피(Creepy)’한 미소를 짓고 있다.
을지로 테마파크도 빼놓을 수 없다. 오징어배처럼 불을 켠 ‘만선호프’ 대선단이 매일 밤 손님들로 만선의 꿈을 이루는 곳. 만선호프가 점령지를 늘려가면서 같은 골목에 있던 42년 업력 ‘을지OB베어’는 쫓겨났다. 을지OB베어는 ‘노맥(노가리+맥주)’의 원조이자 술집으로서는 처음으로 ‘백년가게’ 인증을 받은 터줏대감이었다.
을지로에는 그렇게 밀려난 노포가 한두 곳이 아니다. 정겨운 동네가 인기를 얻으면 어김없이 일어나는 일이다. 오래된 삶들은 상어를 만난 노가리떼처럼 뿔뿔이 흩어지고, 말쑥한 레트로 테마파크가 들어선다. 레트로 소품으로 장식하고 옛 간판 폰트를 흉내낸 ‘힙 플레이스’들은 냄새마저 청량하다. 임대료가 더 치솟으면 그 가게들도 어디로 내몰릴지 모르지만, 테마파크는 계속된다.
을지로의 오래된 철공소들에는 ‘사진을 찍지 말아달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그 안내문들은 이곳이 누군가의 소중하고 오래된, 존중받아 마땅한 삶의 터전임을 말해 준다. 골목을 찾을 때마다 안내문은 하나둘씩 줄어 있었다. 낡은 꽃무늬 양철 쟁반에 손때를 묻히던 이들은 이제 없지만, 테마파크는 계속된다. 깔끔하게 멸균소독된 신품 꽃무늬 양철 쟁반만 남기고. 나는 차라리 손때를 먹겠다.
이 글은 <주간경향> 1548호(2023.10.16)에도 실렸습니다.
※칼럼 제목은 박완서의 소설 ‘도둑맞은 가난’에서 따왔습니다.
(메인 사진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