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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누가 빛을 가리고 있는가

그대는 결코 신이 아니다

by Itz토퍼

동남아시아의 어느 도시를 방문하였을 때입니다.


그 지역 대학교수들과의 만남을 갖고서 호텔로 돌아가려 하는데, 아직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닌데 도로에 가로등이 하나씩 꺼지더니 어느새 전부 꺼져 버렸습니다. 갑자기 칠흑같이 어두워진 도로, 간혹 대로를 오가는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전조등만이 어둠을 밝힐 뿐이었습니다.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어 현지 교수에게 물었더니, 원래 밤새 켜져 있어야 하지만, 전기세를 아껴서 공무원들이 그 돈을 빼먹는다는 겁니다.


“밤길을 밝혀야 할 가로등이 불량 공무원들 때문에 어두워진다?”

오늘 이 글과도 관계가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를 향해 안타까운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솔직히 마음 편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상처를 보면서 침묵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조금 씁쓸하지만 현실을 들여다보려 합니다.


혹시 ‘가나안 교인’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가나안’을 거꾸로 읽으면 ‘안 나가’입니다. 말 그대로 교회에는 안 나오지만, 자신은 여전히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빗대어 부르는 이름이죠. 신앙을 버린 것도, 교회를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출석은 포기했지만 신앙은 유지’하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 교회의 통계는 이들을 무시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떠나고 있기 때문이죠. 특히 청년 세대에서는 무려 30% 이상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원인이 바로 ‘목회자 문제’라는군요.


결국 교회와 목회자가 변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교회는 빛을 비추기보다 스스로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밖에서 자신의 신앙을 말하려다 잠시 멈칫하게 되는 걸까요. 왜 때로는 신앙 이야기를 얼렁뚱땅 넘겨야만 하는 걸까요. 이 질문 앞에서 교회와 목회자는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을까요.


교회 안팎에서 웃음을 잃고 조용히 고개를 돌리는 교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타인을 향한 변명보다 자신을 향한 성찰을 먼저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변화는 늘 ‘언젠가’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요구되고 있습니다.


특정한 주장이나 관념을 폐쇄적인 사고와 문화 속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상당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물 안 개구리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최근의 한국 기독교를 보면 그런 인상이 듭니다. ‘침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안주’라는 단어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타이완에서 알게 된 호주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지난 회포를 풀었습니다. 재미있는 상황이지만, 중화권에서 만난 탓에 우리 둘의 대화는 서로에게 익숙한 중국어로 통했죠. 그는 작년에 한국에 일이 있어 약 10개월 정도 머물렀다고 하더군요. 독실한 그리스도인인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번에 탄핵되어 내란죄 재판을 받고 있는 윤모의 말투가,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출석했던 교회 목사의 말투와 꼭 닮았다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한국 목사들은 나이 많은 장로나 권사님에게도 반말이나 거의 반말 같은 말투로 이야기하고, 교인들은 그런 목사를 마치 신처럼 떠받들더라"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반말인 줄 어떻게 알았어?"라고 묻자, 한국어에는 존댓말과 반말이 있어서 한국어를 배울 때 그 부분이 특히 어렵고 헷갈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반말이 어떤 말투인지 대략 감을 잡을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때는 웃으며 넘겼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지적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가끔 보면, 사람의 신분이나 재력, 위치에 따라 말이 사다리를 탔는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이들도 있으니까요. 특히 그 사람이 목회자라면 조금은 달리 해석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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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가 아닌 섬김에 초점을 맞춰야 할 때


오늘날 한국 교회가 마주한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목회자들이 ‘섬김’과 ‘순종’의 가치를 강조하면서도 그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맞춰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예전에는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 마치 아버지 같고, 할아버지나 친한 이모처럼 느껴졌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물론 모든 목회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훌륭한 인격과 인품, 깊은 영성을 지닌 분들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목회자들의 권위적인 언행이 마치 모든 목회자의 전매특허처럼 보이게 만들어, 교회에 나가기를 꺼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외부의 비판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한국 기독교계 내부에서도 깊은 공감 속에 꾸준히 제기되는 문제입니다. 최근 갈수록 쇠퇴하고 있는 한국 기독교의 영향력 역시,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성경적 가르침의 왜곡과 권위 남용


많은 기독교 언론과 연구 기관들이 지적하듯이, 일부 목회자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사자’라고 칭하며 교인들에게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합니다. 심지어 광장에서 마이크를 들고 외치는 일부 목회자들의 모습은, 과연 저들이 진짜 목회자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도가 지나친 경우가 많습니다. 비록 그들의 신앙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고 해도, 이에 대한 기성 교회의 침묵은 결국 전체 기독교계가 지탄받는 결과를 자초할 뿐입니다.


이러한 행태는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께 속한 권위’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섬김과 순종’이라는 본질을 왜곡합니다. “목사를 비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비판하는 것이다”라는 잘못된 인식이 교인들 사이에 퍼지고, “계시받았다”는 표현이 개인의 욕망이나 권력 추구의 수단으로 남용되면서 교회는 병들어갑니다.


이러한 권위주의는 교회의 리더십이 마땅히 보여야 할 ‘섬김의 본’을 해치고, 분열과 형식주의, 율법주의를 부추기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교계의 보고서나 상담 통계에 따르면, 교회 내 분쟁의 대다수가 담임목사와 관련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여전히 목사 중심의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문화가 강하다는 점을 방증합니다.


교회의 본질 훼손과 신뢰도 하락


이러한 문제는 단순히 교회 내부의 갈등에 그치지 않고, 교회의 본질 자체를 훼손하며 사회적 신뢰도까지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는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고, 오히려 세속적 성공과 물질을 숭배하는 ‘힘의 종교’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특히 젊은 세대, 즉 MZ세대가 교회를 떠나는 주요 이유 중 하나로 ‘목회자의 권위주의’를 꼽는다는 조사 결과는, 한국 교회가 시급히 직면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기독교인, 이른바 ‘가나안 교인’의 증가 역시 목회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목회자 권위 오용과 성경적 가르침의 왜곡에 대한 심층 분석


성경은 목회자가 교인들의 본이 되고, 양 무리를 돌보는 리더로서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섬김과 순종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문제는 일부 목회자들이 이러한 성경적 가르침을 오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고 교인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삼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관계 대신, 목회자에게만 의존하게 되면 스스로 신앙을 성숙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방해가 됩니다. 또한 목회자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는 분위기에서는 건강한 비판이나 다양한 의견 제시가 어려워지고, 결국 폐쇄적이고 경직된 교회 구조가 형성됩니다. 이로 인해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공동체라는 본질보다는, 목회자를 중심으로 한 위계적인 조직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변화를 위한 길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한국 교회가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목회자 스스로 자신의 역할을 성경적으로 깊이 성찰하고, 섬김과 순종의 대상을 자신에게로 돌리고 있지는 않은지 겸허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섬김의 본을 따르는 것이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교인들은 무비판적으로 목회자의 가르침을 따르기보다는, 성경을 통해 무엇이 진정한 섬김과 순종인지 분별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건강한 질문과 비판의식은 교회를 더 바르고 투명하게 세워나가는 데 기여합니다.


그리고 투명한 재정 운영, 민주적인 의사 결정, 건강한 리더십 견제 시스템을 통해 목회자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교인들이 교회 운영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통로도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신학교육 과정에서는 리더십뿐 아니라 섬김과 겸손, 성경적 권위의 본질에 대해 더 깊이 있게 가르쳐야 합니다. 목회자가 단순한 ‘지도자’가 아니라 ‘영적 돌봄이자 섬김의 본’이라는 사실을 내면화하도록 해야 합니다.


결론


섬김과 순종의 진정한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목회자는 그분을 가리키는 이정표 같은 존재여야 합니다.


권위주의적 태도와 왜곡된 신학은 교회의 본질을 해치고, 신뢰를 잃게 만듭니다. 이제는 목회자와 교인, 교회 구조 전체가 함께 성찰하고 변화해야 할 시점입니다. 이러한 지속적인 논의와 노력을 통해 한국 교회가 다시금 건강한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런데 이 빛을 누가 꺼고 있나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성경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이 성경 구절에서 중요한 점은 빛은 주장이나 표어가 아니라, 삶과 행실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빛이 되라”라고 명령하시기보다, “이미 빛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따라서 빛이 된다는 것은 주목받는 것이 아니라, 숨을 수 없는 책임을 지고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빛을 누가 꺼고 있나요?

아니면 누가 이 빛을 가리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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