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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이별을 연습한다

영화 <사요나라 이츠카>가 던진 질문

by Itz토퍼

우리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고, 매일 아침 다시 눈을 뜹니다.


같은 하루의 반복처럼 보이지만, 그 아침을 맞이하는 인사 역시 같을까요?

우리는 매일 '어제'와 이별하면서 불확실한 '오늘'을 맞이하고 있는 걸까요?


영어에서 ‘굿모닝(Good morning)’이라는 인사는 아침이라는 시간 앞에 긍정의 단어를 먼저 놓았군요. 지금 맞이한 이 아침이 그 자체로 좋다는 선언, 마치 어둠 속에 환한 불을 켜는 말처럼 들립니다.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묻지 않습니다. 이 인사는 시간을 확인하기보다 분위기를 밝히는 언어이기 때문이겠죠.


반면 한국어의 아침 인사인 “안녕히 주무셨습니까”는 출발점부터 다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잠을 잤는지를 묻는 문장이 아닙니다. 전기와 의료, 연락 수단이 충분하지 않던 시절, 밤은 늘 불안과 단절의 시간이었고, 아침은 그 시간을 무사히 건너왔는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인사에는 ‘주무셨다’는 행위의 끝과 함께, 그 앞에 놓인 ‘안녕히’라는 말속에 무사함과 안전이라는 조건이 함께 담깁니다.


그 결과 이 인사는 자연스럽게 이렇게 들립니다.

“밤새 별일 없으셨습니까?”

“무사히 그 시간을 건너오셨습니까?”


한국어의 아침 인사는 하루의 시작을 축하하기보다, 밤이라는 통제할 수 없는 시간을 통과했는지를 먼저 묻습니다. 병이 깊어지고, 사고가 일어나며, 소식이 끊기던 시간에 대한 기억이 언어 속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침 인사는 환호보다 확인에 가깝고, 축하보다 안부에 가깝습니다. 살아 있음에 대한 조용한 점검에 더 가까운 말입니다.


그래서 “안녕히 주무셨습니까”는 때로 “밤새 아무 일 없으셨습니까”로 들립니다. 이 인사에는 밝은 낙관 대신 조심스러운 배려가, 가벼운 인사 대신 관계에 대한 책임감이 스며 있습니다. 인사 한 마디에 우리 사회의 고되고도 슬픈 역사가 보입니다. 서로의 무사를 먼저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의 언어인 셈입니다.


결국 두 인사의 차이는 이렇게 남습니다.


‘굿모닝’이 하루를 열어젖히는 말이라면, “안녕히 주무셨습니까”는 하루를 조심스레 건네받는 말입니다. 또 한편으론 정말 슬픈 인사이기도 합니다. 우리네 삶이 그만큼이었다니.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반복되는 이 일상이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그 사이사이에 스며든 작별의 징후들을 알아채지 못한 채 지나치기 쉽습니다. 그런 우리의 무감각한 일상 한가운데로, 영화 〈사요나라 이츠카(サヨナライツカ; 안녕, 언젠가)〉의 한 문장이 조용히 파고듭니다.


“인생은 언제나 이별 연습을 한다.”

그리고 묻습니다.

“밤새 아무 일 없으셨나요?”


이 두 문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놀라울 만큼 솔직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사랑과 삶의 본질을 단번에 관통합니다. 사랑이란 결국 ‘언젠가(いつか, 이츠카)’ 찾아올 작별을 전제로 한 긴 예행연습이며, 우리는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음을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영화는 이 진실을 어떻게 엮어 나가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마주하게 될까요.


이 영화는 2010년 4월,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 츠지 히토나리(辻仁成)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탄생했습니다. 한국이 기획과 투자를 주도하고 다국적 스태프가 참여한 이 작품은, 제작 배경부터 이미 국경을 넘나드는 ‘이별과 선택’의 서사를 품고 있었죠.


주연 배우 캐스팅 또한 상징적이었습니다. <러브레터>의 히로인이자 일본을 대표하는 배우 나카야마 미호가 치명적인 매력의 여인 토우코 역으로 12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그녀는 안정적인 삶을 상징하는 약혼녀와 대비되는, 영혼을 태우는 사랑의 얼굴을 온전히 구현해 냈습니다. 여기에 한국 개봉 당시 삽입된 조성모의 한국어 주제가 <사랑했던 날들>은, 이 영화가 품은 상실의 정서를 더욱 깊고 오래 남게 합니다.


이야기는 1975년, 태국 방콕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시작됩니다. 주인공 히가시 마모루 유타카는 모든 것이 성공이라는 각본으로 미래가 보장된 남자입니다. 성공이 확실시되는 엘리트의 길 위에 서 있었고, 일본에는 현명하고 헌신적인 약혼녀 타카기 미츠코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오차 없이 계산된 궤도를 따라 흘러가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방콕에서 만난 여인 토우코는 그 궤도를 단숨에 이탈시킨 존재였습니다. “세상에서 사랑보다 중요한 건 없어”라고 말하는 그녀는, 삶을 효율이나 안정이 아닌 감정을 온도로 측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정숙하고 절제된 미츠코와 정반대의 매력을 지닌 토우코의 관능과 열정은, 유타카 내면 깊숙이 눌려 있던 욕망과 질문을 깨웁니다. 결혼을 불과 4개월 앞둔 짧은 체류 기간 동안, 두 사람은 마치 시간이 유예된 공간에서 뜨겁고 비밀스러운 사랑에 빠져들고 맙니다.


이 4개월은 결혼을 앞둔 한 남자의 단순한 정열의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유타카의 이후 25년을 규정할 ‘선택의 순간’이 되었습니다. 안정과 책임, 그리고 불꽃처럼 치명적인 사랑 사이에서 그는 결국 현실과 약속을 택합니다. 토우코에게 남긴 말은 “사요나라, 이츠카(안녕, 언젠가)”였습니다. 작별이면서 동시에 희망처럼 들리는 이 말 앞에서, 토우코는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언제나 기억해요. 당신은 사랑받고 있다는 걸. 절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언젠가 다시 만날 때까지.” 결국 이 문장은 유타카의 삶 전체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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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의 유타카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는 조직의 핵심 인물로 성장하고, 미츠코는 헌신적인 아내로 그의 곁을 지킵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의 삶은 흠잡을 데 없이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완성은 하나의 상실 위에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방콕에 두고 온 4개월, 그리고 토우코라는 이름으로 남은 공백은 그의 내면에서 숯불처럼 은근히 타오릅니다. 그의 성공은 토우코와의 이별을 연습한 대가였고, 동시에 끝내 완주하지 못한 사랑의 흔적이었습니다.


시간은 흘러 2000년, 유타카는 출장지 홍콩에서 토우코와 재회합니다. 25년의 세월은 두 사람의 얼굴에 주름을 남겼지만,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 사랑의 감정은 어제처럼 되살아납니다. 이 재회는 단순히 낭만적인 만남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에 미완으로 남겨 두었던 사랑과, 그 사랑을 떠나보내며 시작했던 ‘이별 연습’을 비로소 끝까지 마주하는 영혼의 의식에 가깝습니다.


영화 <사요나라 이츠카>는 이별을 깔끔하게 정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끝났지만 감정은 끝나지 않고, 시간은 흘렀지만 기억은 멈춰 선 채 남아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이별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평생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할 감정의 열매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사요나라’는 단순한 작별의 선언이 아니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과 그때의 자신에게 건네는 인사처럼 들립니다. 이별은 정리되지 않고, 삶 속에 스며들어 하나의 인격이 됩니다.


여기서 ‘이별 연습’이라는 말은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그것은 이별을 무감각하게 만들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상실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이별이 불가피하다면, 우리는 그 고통 앞에 무방비로 서 있기보다 조금씩 준비하며 감당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유한한 생을 사는 인간으로서, 언젠가 맞이할 이별의 운명을 안고 살아간다면, 그것을 막연한 체념 속에서 기다리기보다는 감당할 마음을 미리 단련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희망적인 자세라기보다, 슬프지만 정직한 삶의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대를 조절하고, 애착을 점검하며, 언젠가 떠날 순간을 조심스레 상상해 봅니다. 상실의 충격을 한 번에 감당하지 않기 위해, 마음의 무게를 조금씩 나누는 연습입니다. 이는 사랑을 덜 진지하게 대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별 앞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선택하는, 조용하고도 성실한 자기 보호의 방식일 것입니다.


결국 <사요나라 이츠카>가 말하는 것은 이별 이후에도 끝나지 않는 사랑의 잔향이고, ‘이별 연습’이 가리키는 것은 끝남을 전제로 사랑하는 현대인의 생존 방식이 됩니다. 하나는 이별을 가슴에 남긴 채 살아가는 이야기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별을 통과하는 법을 미리 배우려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랑은 끝내 연습되지 않고, 어떤 이별은 준비했음에도 여전히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던지는 실질적인 질문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연습하는 이별은 과연 연인과의 헤어짐에만 국한되는 것일까요?


어쩌면 이 연습은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어제의 미련과 후회로부터 스스로를 놓아주는 훈련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매 순간 과거의 꿈과 지나간 시간, 덧없는 청춘과 작별합니다.


우리는 매일 이별하며 살아가는 자신이 보이지 않나요?


‘이별의 연습’이란 다가올 상실을 두려워하기보다, 그 유한성 덕분에 지금 이 순간의 만남과 감정에 더 깊이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역설적인 자유일 것입니다. 언젠가 작별할 것을 알기에, 우리는 주저 없이 사랑할 수 있고, 그 사랑이 있었기에 비로소 더 깊은 모습으로 성숙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요나라 이츠카>를 보면서 글무리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별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충실하게 사랑했고 살아냈는지를 증명하는 하나의 완성점이라고. 우리의 삶은 수많은 이별 연습을 거치며, 마침내 한 편의 조용하고도 아름다운 연습곡으로 완성되어 간다고.


이제 이 영화의 이야기를 여기까지만 따라가서 발길을 멈추렵니다.

그리고 영화 속 이야기를 보면서 품게 된 마지막 질문을 남기려 합니다.

그 답은 독자인 당신의 삶에 맡기겠습니다.


“당신은 지금, 언젠가 다가올 이별을 연습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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