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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노인의 얼굴을 팔리게 만드는가

노년의 딜레마, 우리는 일개미로 태어났나?

by Itz토퍼

※ 얼굴이 팔리다 = 듣기 거북한 '쪽팔리다'의 직역입니다.

※ 쪽팔리다: (표준국어대사전) ‘체면이 깎이거나 부끄러워서 창피하다.’


대학 입시에 합격한 뒤, 선배들의 초대로 환영회가 열렸습니다.


처음으로 코가 비뚤어지도록 소주와 막걸리를 마신 뒤, 비틀거리며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지요. 밥은 제대로 먹지 않고 술만 들이켰더니 속이 사정없이 쓰렸습니다. 결국 포장마차에 들러 우동 한 사발을 시켰습니다.


그때 우동을 내주던 아주머니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학생도 집에서 황소 팔아서 서울 올라왔어요?”


그 질문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사실 당시에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 지방에서 서울 유학이란, 한 집의 기둥뿌리 하나쯤 뽑히고 형, 아우, 누나의 몫이 희생되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부모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습니다. 자식을 위해 황소를 팔고, 집 기둥뿌리를 뽑고, 적금을 털어 서울로 보내는 것. 그러고도 하숙비와 생활비를 매달 꼬박 보내는 일, 그것을 사람들은 ‘향토 장학금’이라 불렀습니다. 그 시절에는 그것이 곧 부모의 역할이라고 여겨지던 시대였지요.


그리고 그 세대는 그대로 다음 세대에도 같은 선택을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서울과 수도권의 인구 집중은 결국 우리 부모 세대, 그리고 지금의 노년 세대가 만들어 낸 결과이기도 합니다. 왜냐고요? 그렇게 떠난 자식들이 대부분 돌아오지 않고, 직장과 생활 여건이 좋은 서울과 수도권에 눌러앉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제 그 부모 세대는 늙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며 저는 선언하려 합니다.

이 세대의 노인들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가련하고, 가장 쪽팔리는 노인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정말 화가 납니다. 하지만 그 화를 누구에게 향해야 할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화가 납니다. 이유는 이 글 전체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프롤로그: 끝나지 않는 개미지옥의 뫼비우스 띠


“우리는 원래 일개미로 태어났나?” 생애 주기 마지막 장에 다다른 이들이 던지는 이 질문은 개인의 존엄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시스템의 냉담한 속삭임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약속된 ‘황금기’라 믿었던 노년은 ‘노동의 족쇄’가 채워진 또 다른 챕터임이 드러났습니다.


통계청과 OECD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 66세 이상 은퇴 연령층의 상대적 빈곤율은 40%에 육박하며, 이는 OECD 가입국 중 독보적인 1위의 기록입니다. 즉 노인 5명 중 2명은 중위 소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득으로 하루하루를 버텨야 하는 현실입니다. 여기에 더해 65세에서 79세 노인 중 절반 이상(57.6%)이 계속 일하고 싶다고 밝혔는데, 그 가장 큰 이유(51.3%)는 다름 아닌 ‘생활비 충당’이었습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마치 평생 굴러야 하는 톱니바퀴처럼, 경제적 불안정이라는 이름의 날카로운 채찍이 우리를 ‘개미지옥’의 회전문으로 다시 밀어 넣는 이 지독한 아이러니는 대체 누가 설계한 것일까요?


unnamed (4).jpg by Gemini

모래성 위의 은퇴: ‘노동 주식회사’의 영구 계약자들


과거의 노년은 삶의 무대에서 내려와 안락의자에 앉아 지나온 시간을 관조하는 ‘지혜의 왕좌’였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그 왕좌는 모래성이었음이 밝혀집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난 만큼 우리가 기대했던 ‘퇴직금’이라는 황금 파라슈트는 터무니없이 작게 찢어진 낡은 앞치마로 변모했습니다.


국가가 지급하는 연금은 치솟는 물가라는 활활 타는 불길 앞에서 작은 물 한 모금에 불과하며, 사회 복지 시스템은 바늘구멍처럼 좁습니다. 결국 노년의 노동은 ‘자아실현’이라는 고상한 포장이 아닌, ‘굶어 죽지 않기 위한 매일의 생존 투쟁’으로 강요됩니다. 우리는 평생 ‘노동 주식회사’의 주주로서 헌신했지만, 은퇴 후에는 강제적인 '무기한 계약자'로 전락하여 생산성이라는 잔혹한 저울 위에서만 가치를 인정받게 됩니다.


존엄성의 거래: ‘인간’이라는 상품의 유통기한


인간의 존엄성은 생산과 소비라는 시장 논리로부터 해방되어 오직 자신의 의지로 삶을 채울 수 있는 ‘영혼의 주권’입니다. 노년은 마땅히 ‘봉사, 배움, 그리고 온전한 휴식’이라는 무상(無償)의 권리를 누려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경제적 압박을 통해 이 존엄성을 염가에 거래하도록 만듭니다. 노동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수단이었으나 이제 노년층에게는 ‘생존을 위한 노동 그 자체’가 최종 목표가 되는 섬뜩한 역설이 발생합니다. 그들이 재취업 시장에서 부여받는 ‘단기 계약직’이나 ‘최저 임금’의 꼬리표는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경륜의 탑’을 허물어 버립니다. 이들은 마치 유통기한이 지난 재활용품처럼 취급받으며, 사회가 씌워 주는 ‘원숙한 존재’의 가면 아래에서 끊임없이 굴욕감을 씹어 삼킵니다.


사회 계약의 파기: 먹튀(Runaway)한 국가의 그림자


이러한 모순은 노인 개인의 게으름이나 무능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과거 고도 성장기에 노년층의 노동력을 무한정 수혈받았던 사회 시스템이, 그 대가로 약속했던 ‘안전한 후반전’이라는 보상을 지급하지 않고 ‘먹튀’해 버린 결과입니다.


국가는 노동력이 필요했을 때는 그들을 ‘경제 발전의 역군’이라 칭송했지만, 생산성이 떨어진 지금은 모든 책임을 ‘개인의 저축 실패’라는 변명으로 떠넘깁니다. 노인 빈곤율 세계 최고라는 현실은 국가가 맺었던 ‘사회 계약서’가 사실상 휴지 조각이었음을 폭로하는 냉혹한 성적표입니다. 평생 성실하게 일했던 시민이 은퇴 후 ‘죄인’처럼 자신의 노후를 홀로 책임져야 하는 냉혹한 현실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야비하게 짓밟는 구조적인 악수(惡手)입니다.


에필로그: 톱니바퀴에서 ‘나’로 돌아가는 길


이 개미지옥의 뫼비우스 띠를 끊어 내고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가 ‘생산성 중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기초연금’이라는 튼튼한 사회적 방파제를 쌓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노년층의 노동이 ‘생존을 위한 벌칙’이 아니라 진정한 ‘재능 기부이자 활력소’가 될 수 있도록 시장을 설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노인을 오직 ‘소비하는 존재’ 혹은 ‘값싼 노동력’으로만 취급하는 천박한 시각을 버리고, 그들이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자신의 삶의 시나리오를 스스로 완성할 수 있도록 존중해야 합니다. ‘일개미 ID 카드’ 대신 ‘인간의 존엄성 증명서’를 들고 당당히 삶의 후반전을 누릴 수 있는 사회, 그것만이 진정으로 성숙한 공동체의 자화상일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청장년 세대도 명심해야 합니다. 만일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대들의 노년은 지금보다 더 비참할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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