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 트램에서 발견한 삶의 여백과 새해를 향한 설레는 기다림
지난 겨울, 눈의 도시 삿포로에서 나는 묘한 향수에 젖어들었다. 낯선 도시임에도 그리운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심의 정적을 깨우며 다가오는 낮은 궤도 소리, 하얀 눈이 내리는 길 위를 덜컹거리며 미끄러져 들어오는 트램의 모습은 한때 우리네 거리에도 존재했던 ‘전차’의 기억을 소환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설레는 마음을 안고 올라탄 그 속살은 사뭇 달랐다. 전차 안은 익숙한 버스나 지하철처럼 매끄럽고 현대적이었다. 낡은 나무 바닥이 주는 삐걱거림, 손때 묻은 가죽 손잡이가 자아내는 투박한 정취를 기대했던 마음 한구석에는 못내 아릿한 아쉬움이 고였다.
그 아쉬움의 틈새를 타고 기억은 순식간에 수십 년 전 부산으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당시 부산에는 동래 온천장까지 가던 전차가 있었다. 주말이 되면, 친구들과 손을 맞잡고 온천욕을 하러 가던 길. 수건 속에 비누통을 돌돌 말아 쥐고 전차에 오르던 소년의 손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뜨끈한 온천탕에 들어가면 우리는 마치 여러 대의 전차 칸처럼 '줄줄이 사탕'이 되어 서로의 등을 박박 밀어주곤 했다. 그때도 우리의 대화 속에는 늘 전차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왜 그토록 다정한 풍경을 우리는 서둘러 치워 버렸을까. '땡땡' 종소리를 울리며 느릿하게 흐르던 전차의 속도는 그대로 삶의 정감이요, 낭만이었다. 한여름, 차창을 활짝 열고 달릴 때면 불어오던 바람의 촉감과 전차가 달리는 방향을 따라 함께 날아가던 잠자리의 날갯짓까지.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그 풍경들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눈앞에 선명하다.
우리는 왜 늘 지나간 시간에 대해 ‘그때가 참 좋았지’라고 말하며 그리워할까?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참으로 가난했다. 부산이라는 도시가 서울에 비하면 훨씬 따뜻하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두 곳을 모두 경험한 이들이 하는 비교일 뿐, 어린 우리에게 그 겨울은 충분히 시리고 매서웠다. 바다에서 불어온 겨울바람이 쌩쌩 몰아칠 때면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차가운 한기가 온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뼈를 에우는 추위를 피해, 연탄불로 데워진 따뜻한 온돌방을 그리워하며 귀갓길을 재촉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할 것 없이 내일이면 조금 더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 하나로 땀 흘리며 일했다. 부자와 빈자의 경계조차 희미할 만큼 나라 전체가 궁핍했지만, 기억의 갈피를 넘기다 보면 결국 마음이 닿는 곳은 ‘참 좋았다’는 따스한 문장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무드 셀라 증후군(Moodsela Syndrome)’이라 부른다. 우리 마음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부리는 마법 같은 수단이다. 뇌는 우리가 현재를 살아갈 수 있도록,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기억의 파편들은 서둘러 지워버린다. 대신 나를 지탱해 주었던 따스한 순간들만을 골라 선명하고 아름다운 사진첩으로 박제해 둔다. 힘들었던 과거조차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되는 것은, 우리가 어두운 터널을 지나올 때 우리 마음이 필사적으로 빛나는 지점들만을 모아 편집해 준 덕분이다.
어쩌면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특정한 장소나 물건이 아니라, 그 시절 우리가 나누었던 마음의 ‘온도’ 일지도 모른다. 삿포로의 현대적인 전차 안에서 내가 끝내 찾지 못했던 것은 낡은 인테리어가 아니라, 모든 것이 느리고 서툴렀음에도 서로의 어깨를 기꺼이 내어주던 시절의 여백이었다. 이미 바래버린 과거의 기억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것은 현재의 결핍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모진 시간을 치열하게 건너왔다는 스스로를 향한 기특한 위로이자 보상이다.
하지만 기억의 그림자가 너무 짙어 오늘의 햇살을 가리는 이들이 있다. 흔히 말하는 ‘옛날이 좋았지’라는 식의 회상에만 매몰되어, 정작 '오늘'이라는 눈부신 선물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그런 이에게 ‘그러면 다시 그때로 돌아가겠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달라질 것이다. 기억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이미 '지나갔기' 때문이지, 결코 '돌아가야 하기' 때문은 아니다. 과거의 좋은 기억은 현재를 버티게 하는 '심리적 비축분'이 되어야지, 오늘을 갉아먹는 후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 또 한 해를 마무리하는 길목에 서 있다.
올 한 해도 우리는 수많은 전차를 보내고, 또 새로운 전차에 몸을 싣고 달려왔다. 때로는 삿포로의 전차처럼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낯설게 변했을지라도, 여전히 우리를 삶의 목적지로 데려다주는 일상의 궤도는 쉼 없이 이어졌다. 만약 당신이 지금 삶의 무게에 눌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당신 안의 기억 필터가 작동하기를 조금만 더 기다려주길 바란다. 훗날 우리는 오늘의 이 고단함조차 "그때 참 뜨겁고 치열했지"라는 말로 아름답게 회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간 모든 것은 아름답다. 그 시간 속에 우리의 서툰 진심과 눈물겨운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나온 시간을 기꺼이 긍정하자.
다가올 새해에는 과거의 찬란한 기억들을 삶의 활력소로 삼아, 현재라는 궤도를 조금 더 힘차게 달려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삿포로의 시린 눈발 속에서 온기 가득한 전차를 기다리던 그 설레는 마음으로, 우리 앞에 놓인 새로운 시간들을 맞이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