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함과 사랑의 경계를 넘어서
첫사랑은 왜 이토록 가슴 깊이 새겨질까요?
사랑이라는 단어의 무게조차 알지 못했던 시절, 우리는 그 감정을 그저 ‘좋아한다’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 풋풋한 떨림은 어른이 되어 마주하는 ‘사랑’과는 사뭇 다른 빛깔을 띠고 있더군요.
고1 때, 중학교 시절부터 마음에 품어왔던 여학생에게 편지를 건넸습니다. 한 달 뒤, 마침내 기다리던 답장이 도착했지요. 틈만 나면 펼쳐 읽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읽고는 바보처럼 웃곤 했습니다. 그때 처음 깨달았습니다. 글에서도 향기가 난다는 사실을. 그렇게 매일같이 편지를 부둥켜안고 정신줄을 놓은 채 행복에 잠겨 있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께서 눈치를 채셨습니다.
“너, 걔 좋아하냐?”
속으로는 ‘사랑합니다!’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 한마디가 목구멍에서 맴돌다 끝내 나오지 않더군요. 그날 밤, 잠 한숨 이루지 못한 채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이 다를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저에겐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을 뿐이었죠. 그렇게 제 첫사랑은 물음표로 가득한 채 시작되었습니다.
세월이 훌쩍 흘러, 어느 새벽 커피를 내리며 문득 그 시절의 질문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좋아한다’는 건 마치 커피 향에 끌리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아내가 구해준 호이안 원두를 갈아 드립으로 내릴 때, 그 향이 방 안을 가득 메우는 순간. 쓰디쓴 향인데도 매혹적이지요. 하지만 커피 향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좋아함이란 어쩌면 이렇게 가볍고 일시적인 감정이겠죠.
반면, ‘사랑한다’는 것은 향을 넘어 쓴맛까지 삼키는 것입니다. 커피의 깊은 맛은 쓴맛과 상큼한 신맛, 은은히 숨어 있는 단맛이 어우러져 완성됩니다. 사랑도 그렇지요. 상대의 부족과 아픔과 허물까지 껴안으며 점점 깊어지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사랑 아닐까요.
좋아함은 ‘호감(attraction)’의 단계에 머무르며,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나타나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고 심리학에서는 설명하지요. 방 안 가득했던 커피 향처럼,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는 법입니다.
사랑은 그 너머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자라납니다. 학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정서적 이끌림(attachment)’과 ‘헌신(commitment)’이 그 성장을 돕는다고 합니다. 마치 향은 사라졌지만 다시금 커피를 찾게 만드는 그 힘처럼 말이지요.
이끌림은 커피를 우려내는 따뜻한 온도와 같습니다. 첫 설렘은 차츰 식어가지만, 함께 있는 시간은 곧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은은한 맛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찾아오는 헌신은 더 깊습니다.
매일 아침 정성껏 커피를 내리듯, 피곤하고 바쁜 날에도 변함없이 마음을 쏟는 선택이죠.
그래서 사랑은 내 안을 돌보는 일이 아니라, 지치고 힘든 나를 아무 일도 없는 듯 그대 곁에 머물게 하는 의지랍니다. 비록 이끌림과 헌신은 아주 작아 보일지라도,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고 이어지며 자라납니다.
사람들은 종종 향에 반해 그것이 전부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커피의 본질은 향이 사라진 뒤에도 남는 여운과 깊이, 입 안에 맴도는 쓴 흔적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잠시의 설렘을 넘어, 결핍과 무게까지 끌어안는 순간에야 비로소 성숙을 향한 걸음이 시작됩니다.
커피 한 모금 속에서 생각해 봅니다.
“왜 첫사랑의 향기는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걸까?”
첫사랑이 잊히지 않는 이유는, 그 대상 자체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처음 내 마음에 싹튼 순간을 기억하기 때문일 겁니다. 비록 미완의 사랑이었지만, 누군가로 인해 세상이 달라지는 신비로운 체험을 선물 받았던 그때. 내 안에 없던 감정의 씨앗이 움트고, 세상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처음 발견했던 순간. 이만큼의 이유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첫사랑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내 존재가 사랑을 처음 배운 순간의 나이테처럼 남아 있는 나만의 성장 기록입니다. 그뿐인가요. 첫사랑의 향기, 오직 그때 그녀만이 줄 수 있었던.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그 향기는 변치 않고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낡은 책갈피에 고이 눌린 라일락 꽃잎처럼, 빛은 바랬어도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지요. 그 향기와 함께 떠오르는 그녀의 미소. 순수하고 맑았던 웃음은 잊을 수 없는 첫인상을 남겼고, 눈망울은 세상을 비추는 두 개의 별처럼 어린 청춘의 내면을 밝혀주었습니다. 그 시선 하나, 저를 바라보며 살짝 떨리던 눈꺼풀 하나까지, 모든 기억이 그때의 향기로 남아 있답니다.
서울로 올라가 대학을 마치고, 군 생활을 거쳐 결혼을 했습니다. 첫 아이가 태어나 고향을 찾았던 어느 날, 아직 돌도 채 지나지 않은 딸의 기저귀를 사러 시내 쇼핑몰로 향했지요. 차를 몰아 주차장 입구로 천천히 들어서던 순간이었습니다. 문득, 손도 시선도 자동차도 모두 얼어붙듯 멈춰 버렸습니다.
마치 세상의 시간이 한순간에 끊겨버린 듯, 주위에는 깊은 고요만이 흘렀습니다.
한 여자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낯익은 미소가 제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무언가를 종알거리자, 그녀는 아이를 덥석 안아 올려 제가 가려던 길을 가로질러 지나갔습니다.
저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온몸이 굳어버린 듯, 손끝에 스며드는 야릇한 떨림만이 저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아마, 제가 잘못 본 것이겠지요.
단지 그 향기만 코끝을 스쳐 지나갔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