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길 간다더니, 누굴 따라가나

아이러니의 미학

by Itz토퍼

"나는 과연 홀로서기에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가?"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난 고대 그리스의 어느 야외극장.


비스듬히 기울어진 햇빛이 무대 위로 입장하고, 관객들의 웅성거림이 반원형 객석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무대 위에는 두 남자가 서 있다.


한 사람은 화려한 갑옷을 입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자신의 무용담을 끝없이 늘어놓는다. 그는 바로 알라존(Alazon)이라는 인물이다. 알라존은 스스로를 위대한 영웅이라 믿는다. 마치 세상의 모든 진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오만한 목소리로 열변을 토한다. 전쟁에서의 승리, 자신의 용기, 남들보다 뛰어난 지혜를 과시하며 무대를 장악하려 한다. 그의 말은 거창하고 화려하지만, 어딘가 지나치게 과장된 냄새를 풍긴다.


그 맞은편에는 전혀 다른 인물이 서 있다. 남루한 옷차림, 어수룩한 표정. 몸을 약간 웅크린 채 상대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는 사람. 그는 바로 에이론(Eiron)이다. 겉보기에는 알라존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듯하다. 스스로를 대단치 않은 사람처럼 낮추고, 상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극의 흐름이 절정에 이르면 기묘한 반전이 일어난다. 에이론은 가장 비굴해 보이는 표정으로, 그러나 가장 날카로운 지점을 향해 단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거창한 논박이 아니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으로 시작하는 아주 작고 낮은 목소리다. 하지만 이 보잘것없는 질문은 알라존이 쌓아 올린 견고한 논리의 성벽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균열이 된다.


“그토록 완벽한 승리를 거두셨는데, 어째서 당신의 손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입니까?”


그 순간 무대 위의 공기는 차갑게 내려앉는다. 무지(無知)를 가장했던 에이론의 겸손은 사실 알라존의 허영을 끌어내기 위한 정교한 덫이었음이 드러난다. 가장 무력해 보였던 자가 던진 한마디가 가장 위대해 보였던 자를 가장 초라하게 만드는 순간, 관객들은 아이러니의 본질을 목격한다.


승자는 패자처럼 보이고, 패자는 승자처럼 보이는 이 기막힌 전도는 에이론이 스스로를 낮추었기에 가능했던 역설적인 승리다.


바로 이 연극적 장치에서 아이러니(Irony)라는 개념이 태어났다.


아이러니의 어원인 그리스어 eirōneía는 본래 ‘모르는 척하며 질문하는 태도’를 뜻했다. 다시 말해, 에이론의 전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by ChatGPT

겉으로는 무지하거나 약한 척하지만, 그 태도 속에 숨겨진 질문과 시선이 오히려 상대의 과장과 허위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래서 아이러니는 단순히 “말과 뜻이 반대인 표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던지는 직설적인 공격이 아니다. 오히려 한 발 물러난 자리에서 던지는 조용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이 상대의 허영과 모순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순간, 관객들은 비로소 웃음을 터뜨린다.


어쩌면 아이러니란 이런 지혜일지도 모른다. 목소리를 높여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한 발 낮은 자리에서 상대의 허영이 스스로 무너지도록 기다리는 방식.


이 어원처럼 아이러니는 단순한 우연을 넘어, 우리 삶의 필연적인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마땅히 그래야 할 것 같은 상황이 정반대로 흘러가거나, 간절히 의도한 목적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을 때 우리는 무대 위의 에이론을 마주한 관객처럼 당혹감과 묘한 통찰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홀로서기라는 이름의 집단적 행군


인생에는 누구에게나 앞만 보고 달리던 시기가 있다. 취업 준비의 고단함, 첫 직장에서의 서툰 발걸음, 낯선 도시에서의 홀로서기. 우리는 모두 ‘나만의 삶’을 살기 위해 그 치열한 레이스 속으로 뛰어든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가장 큰 아이러니는 따로 있다.


홀로서기를 선언한 우리가 정작 내면의 목소리보다 타인의 발자취를 먼저 찾아다닌다는 사실.


우리는 독립적인 삶을 일구어내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다. 그리고 서점으로 달려가고, 유튜브를 뒤지며 남들이 성공했다고 말하는 공식을 익히고 암기한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과 거주지를 꿈꾸며, 어느새 ‘성공의 정답’이라는 것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나를 찾기 위한 여정이 어느 순간 ‘남들과 비슷해지기 위한 노력’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의 첫 번째 거대한 아이러니와 마주한다. 나를 세우기 위해 남의 뒤를 쫓는 이 역설적인 행군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에이론의 미소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진정한 독립의 시간은 타인을 모방하는 에너지가 모두 소진된 뒤에야 비로소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린 그것을 '나다움'이라고 말한다.


우리 삶 속에 펼쳐지는 역설의 풍경들


아이러니는 삶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우리가 흔히 겪는 몇 가지 장면만 떠올려 보아도 그 모순의 결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필자가 여러 글에서 수차례 언급했던 내용들이기도 하다.


첫 번째는 성공을 위한 희생의 아이러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지만, 정작 그 일 때문에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과 자신의 건강을 잃는다. 행복의 수단을 마련하느라 정작 행복을 누려야 할 목적을 잃어버리는 셈이다.


두 번째는 연결의 아이러니다.

SNS를 통해 전 세계 수천 명과 실시간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순간 밀려오는 고립감은 그 어느 때보다 깊다. 더 많이 연결될수록 인간은 더 외로워지는 기술의 역설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완벽주의의 아이러니다.

결점을 하나도 남기지 않으려는 완벽한 준비는 때때로 일을 시작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된다. 최고를 지향하는 마음이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최악의 정체를 불러오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기억의 아이러니가 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말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잊으려고 애쓰는 기억일수록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망각을 향한 강한 의지가 오히려 기억을 강화하는 이 모순적인 메커니즘은 종종 우리를 길 잃게 만든다.


아이러니를 수용하며 걷는 길


결국 인생이란 아이러니로 가득한 풍경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진정한 홀로서기는 시작된다. 내가 타인의 발자취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 발자취에서 벗어날 준비를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을 따라가는 어리숙한 에이론의 시간을 지나서야 비로소 알라존이라는 이름의 허영 가득한 자아를 무너뜨릴 수 있게 된다.


아이러니는 우리를 조롱하는 운명의 장난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앞만 보고 달리다 잠시 멈춰 서서, 내가 내딛는 이 걸음이 정말 나의 의지인지 아니면 타인의 속도에 맞춘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순간, 우리는 무대 위의 에이론처럼 삶의 반전을 준비할 수 있게 된다.


타인의 발자취를 찾아 헤매던 그 모든 모순적인 시간조차 결국 ‘진정한 나’를 발견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했던 필요악이었음을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 서글프면서도 아름다운 모순마저 사랑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낯선 도시에서의 진정한 독립을 완성하게 된다.


홀로서기란 결국 타인의 발자취 끝에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 멈춰 서는 소극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보폭에 맞춰진 발을 과감히 들어 올려, 지금 내가 딛고 선 삶의 자리, 즉 자신의 발바닥 밑을 직시하며 오직 나만의 첫걸음을 내딛겠다는 결연한 의지로부터 시작되는 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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