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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매기 조나단 Aug 11. 2020

독해는 곧 소통이다

독해력이 필요한 이유

독해는 곧 소통이다

뇌경색(뇌졸증) 환자들은 팔이나 다리에 제대로 힘을 주지 못해 혼자 밥을 먹거나 걷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근육을 통제하여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힘'을 쓸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근육이 있어도 그 근육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사용할 수 없는 상태, 그것이 뇌경색의 무서움이다. 


힘을 쓴다는 것

살아가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숨을 쉴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사소한 일상 어느 것 하나 힘을 쓰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더러는 '큰 힘'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큰 압력을 버텨야 할 때가 그렇다. 살다보면 그런 위기의 순간, 결정적인 순간에 평소 발휘하지 않았던 큰 힘이 필요해지고, 그 힘을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곧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자신의 원하는 바를 성취하게 된다. 반대로 힘을 사용할 수 없으면 생활을 이어나가기 어렵고, 자주 실패를 경험해야 한다.


그래서 힘은 중요하다. 그리고 '독해력' 또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힘 중의 하나이다. 


글읽기와 말듣기는 같다.

독해라는 단어는 독(讀, 읽다)과 해(解, 풀어내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한자어이다. 읽는 것은 문자를 소리를 바꾸는 행위이고, 풀어낸다함은 '을 그 소리 속에 담겨진 뜻(의미)을 해석해낸다는 것이다. 본래 말과 글은 그 뿌리가 하나다. 그 뿌리는 곧 누군가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을 생각(의미)이다. 그 생각이 부모이고, 말과 글은 자녀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여러가지 형태로 바꾸어 이를 표현하게 되는데, 그것을 소리로 전하면 말이되고, 문자로 적으면 글이 될 뿐이다. 그래서 말과 글은 하나이며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말을 이해하는 것은 쉽다고 느끼는 반면, 글을 이해하는 것은 보통 더 어렵게 느낀다. 물론 이런 느낌은 상대방의 말을 잘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마치 글읽기만 어려운 것처럼 착시현상을 겪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극복한 경우에도 여전히 듣기보다느 읽기를 어렵게 느낀다. 

 

왜 말보다 글을 어려워 하는 것일까? - '소통하지 못함'

말보다 글이 어려운 이유는 말은 '소통'의 도구라고 생각하지만 글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을 할 때는 상대방과 눈을 맞추고, 상대방의 생각(뜻, 의미)이 무엇인지에 집중한다. 따라서 그 사람이 말하는 내용 속의 핵심을 파악하려 자연스레 노력하게 된다. 그렇지만 상대방의 말을 들으며 그 사람이 말한 단어 하나하나를 모두 기억하려 애쓰는 사람은 없다. 혹은 상대방의 말을 중간에 끊고 어떤 '단어'를 골라내 엉뚱한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려는 사람은 삼천포에 빠졌다고 지적받게 된다. 대화 중에는 잘 이해하지 못한 내용이 있어도 그것이 뜻이 통하는 데 중요하지 않다면 기꺼이 흘려보내고 무시한다. 정 필요하다면 다시 물어보면서 그 뜻을 다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만큼 '듣기'는 상호적인 대화 상황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철저히 '소통'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하지만 글은 다르다. 사람들은 글을 읽을 때 누군가와 소통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글읽기는 혼자 하는 외로운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상대방(글쓴이)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지금 말하고 있는 상대방의 말뜻과 취지(목적, 결론)이 무엇인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다가 눈 앞에 보이는 어떤 엉뚱한 정보 하나에 꽂히거나(그 단어가 뭔가 중요해보이지만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경우에 특히!) 전체 대화의 맥락을 놓쳐버리게 되는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그렇게 글을 잘못이해하는 경험이 반복되면 어느새 글읽기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게 되고, 점점 더 글읽기를 기피하게 된다. 

 

글읽기를 듣기처럼

독해를 잘하고 싶다면 상대방과 대화하듯 글을 읽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글을 읽을 때 상대방은 당연히 글쓴이다.즉, 정보에 집중하지 말고 글쓴이의 생각, 그가 지금 내게 무슨말을 해주려고 이처럼 애쓰고 있는지를 헤아리며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글을 읽을 때도 자꾸 끊겨서는 안된다. 생생한 말소리를 듣는 것처럼, 대화하듯 글을 읽어야 한다. 때로는 경쾌하게, 어떤 정보는 흘려보내면서 상대방의 목소리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대화의 속도를  맞출 수 있게되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충분히 훌륭한 대화(뜻의 소통, 독해)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할 때 한 눈 팔 수 없듯이 글을 올바로 읽다보면 글쓴이의 생각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아예 글을 읽지 않으면 모를까 이해하지도 못한 글을 마주하며 페이지를 의미없게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이런 글읽기의 습관이 잘못되어 있다면 다시 글을 읽어봐야 한다.)


상대방이 전체적으로 무슨 이야기 하고 있는지 그 '감'을 놓치지 않으려 애써야 하고, 대화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게 노력하듯 중간중간에 나오는 단어와 개념에 붙잡히지 말고 한 호흡으로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야(읽어야) 한다. 


견월망지(見月望指)의 지혜

견월망지(見月望指)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보지말고 달을 쳐다보라.'는 뜻으로 본질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글을 독해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 사람이 현란한 기교를 부리거나 전문용어를 많이 섞어 놓은 어려운 글을 써놓았더라도 결국 글읽기의 핵심은 그 정보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핵심 결론, 말뜻을 이해하는 것 뿐이다. 오직 그 뿐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손가락(전문용어, 배경지식, 표현법의 특징, 수사법 등) 이 아니다. 우리가 봐야할 것(달)은 상대방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일 뿐이다. 독해에 있어서 본질은 언제나 말하는 이(글쓴이)의 취지(논지)를 이해하고, 그 뜻을 헤아리는 것임을 기억하자. 


독해력이 좋아야 밥도 잘 먹는다

뇌경색 환자들이 혼자 밥을 먹지 못하는 이유는 근육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근육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근육을 사용하고 통제하는 뇌의 기능이 저하된 것이다. 독해력이 부족하다는 것도 어쩌면 이미 가지고 있는 충분한 독해의 근육(독해의 역량, 독해력)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하는 우리의 왜곡된 생각과 습관 때문일 수 있다.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글을 잘 독해할 수 있다. 

말과 글은 본래 부모가 같은 쌍둥이 이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학교에서도 독해는 결국 소통의 수단이다.

매순간 상대방이 나와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형식(보고서, 이메일, 문자, 편지 등)으로 글을 써서 서로 소통한다.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함께 일할 수 있겠는가? 말이 통화지 않는 부하직원에게, 또 내가 하는 말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협력업체 직원에게 추가적으로 일감을 맡기고 싶겠는가? 독해력이 부족하면 결국 내가 속한 집단에서 인정받기 어렵고, 밥값하기가 어려워진다. 학생들이 독해력이 부족하면 공부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도 당연한 결과다.  선생님의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글쓴이(책이나 글의 저자)의 취지를 깨닫지 못하면 교과서가 아무리 힌트를 알려주고, 지식을 전해주려 해도 혼자 딴소리만 늘어놓게 된다.  



한 줄 정리, 

글을 잘 읽고 싶다면, 글과 말이 같은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말을 이해하듯 글을 이해하는 연습을 해보자.) 



덧붙이는 말, 

혹시 '듣기' 자체가 어렵다면?

만약, 근본적으로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면 애초에 '경청'의 훈련이 필요할 수 있다. 많이 듣는 것보다 정확히 듣는 연습이 필요하다. 경청의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을 수록 토론할 때 혼자 딴소리를 하는 경우가 많다. 깊은 대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경청'의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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