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15년부터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내가 처음 한국어를 가르친 곳은 몽골 울란바토르이다. 당시 나는 코이카(KOICA. 한국국제협력단) 해외봉사단 한국어교육 단원으로 몽골국립교육대학교에서 활동했었다. 몽골에서 학생들과 많은 추억을 쌓았고, 그중 몇몇 학생과는 내가 몽골에서 귀국한 지 오래되었음에도 계속 연락을 이어가고 있다. 오늘 소개할 '바야르'(가명)라는 학생은, 그중에서도 정말 특별한 학생이다.
바야르를 처음 만난 건 2015년 1학년 한국어 발음 수업 때였다. 그는 아주 소심하고 말도 거의 안 하는 조용한 학생이었지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한국어 실력은 별로 좋지 않았는데, 특히 말하기가 안 좋았다. 자신감 없는 태도에 부정확한 발음이 문제였다. 나는 한국어를 '잘하는' 학생보다 '잘하려고 노력하는' 학생들에게 더 마음이 간다. 그래서 티는 많이 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바야르를 많이 응원했다.
하지만 2학년이 되자 바야르의 태도가 좀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눈치를 보더니, 점점 수업 시간에 친구들과 잡담을 하고 과제는 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나는 그런 수업 분위기와 내 역량에 비해 너무 많은 수업, 좋지 않았던 학교 분위기, 개인적인 고뇌에 지쳐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형식적으로 수업에 집중하라고, 과제를 하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쓰기 과제를 주고 감독을 하고 있었는데, 바야르가 과제는 안 하고 옆 친구와 잡담을 하는 걸 보았다. 나는 이번에도 무미건조하게 조용히 하고 쓰라고 한 것을 쓰라고 말했다. 바야르는 알겠다고 했지만, 내가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니 다시 딴짓을 했다.
'역시, 너도 변하는구나. 될 대로 돼라. 잔소리하면 내 입만 아프지'
이렇게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문득 이 학생이 1학년 때 열심히 공부하면 모습이 떠오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변한 걸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실력이 늘지 않아 포기한 걸까?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는데. 한 번만 더 다그쳐 볼까? 도와주고 싶다.'
나는 바야르에게 다시 다가가서 말했다.
"아까 조용히 하고 쓰라고 했는데, 왜 안 쓰고 계속 떠들지?"
바야르를 포함한 반 전체 학생이 얼어붙었다. 학생들을 혼낸 적은 있어도 개별 상담 시간에 했지 수업 시간에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수업을 할 때 나는 항상 '친절하고 젊은 한국인 선생님'이었다. 바야르도 많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1학년 때는 이러지 않았잖아. 항상 열심히 공부해서 좋았는데, 요즘은 왜 그래? 공부가 싫으면 수업에 오지 마! 공부를 안 할 거면 수업에 올 필요가 없어. 출석 인정은 해 줄 테니 오지 마. 그런데 올 거면 공부를 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바야르는 사색이 된 표정으로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여러분도 똑같아요. 수업이 듣기 싫으면 오지 마세요. 공부하고 싶은 학생만 오세요. 진심입니다. 수업은 여러분들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공부를 안 하고 떠들거나 핸드폰만 할 거면 올 필요가 없어요."
나는 자리로 돌아와서 학생들에게 말했다. 그날은 처음으로 수업이 얼음장 같은 분위기 속에 끝났다. 바야르는 모든 학생이 나간 후 내게 와서 다시 한번 죄송하다고, 앞으로는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다른 학생들이 다 보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혼낸 거고, 자기보다 더 심한 학생이 있음에도 자신만 저격해서 혼을 낸 것이라 반발하고 싶을 만도 한데, 그의 표정은 진심으로 뉘우치는 듯했다.
그 후, 바야르는 정말 다시 돌아왔다. 수업 시간에 한 번도 딴짓을 안 하고 집중했으며, 숙제도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다. 나는 그런 바야르를 많이 응원하고 격려했다. 아마 수업 시간에 화를 낸 것이 자신을 정말 도와주고 싶어서 그랬던 거라는 걸 그도 느낀 게 아닐까 싶다. 한 번 그렇게 혼을 내니, 집중을 안 하던 다른 학생들의 태도도 조금 나아졌다.
2015년 가을 어느 날, 울란바토르에서 주몽골 한국 대사관의 주최로 한국문화의 날이라는 행사를 했었다. 그때 2014년에 한국에서 크게 흥행한 영화 <국제시장>도 영화관에서 상영했는데, 영화 관람 후 윤제균 감독과의 질의응답 시간도 있었다. 대사관에서 한국어 전공 학생들에게 표를 나눠 줬고 나도 희망하는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같이 영화를 봤다. 관객들의 반응은 아주 좋았다. 흥남 철수 장면, 이산가족 찾기 방송 장면에서는 우는 소리가 많이 들렸다. 학생들은 영화가 아주 감동적이라고 했다. 영화가 끝나고 감독님이 나오셔서 인사를 하시며 영화에 대한 설명을 하셨다. 그리고 곧 질의를 받았는데,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한국인인 내가 질문할 수도 없고, '감독님이 울란바토르까지 오셨는데 누구라도 질문을 하면 좋으련만...' 하고 생각할 때였다.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진행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놀랍게도 바야르였다.
바야르는 감독님에게 흥남 철수 장면에서 헤어진 주인공의 아버지가 영화 마지막까지 어떻게 됐는지 알려주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물어봤다. 감독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답변하셨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만한 답변을 해 주셨다. 그때 나는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었던 바야르의 의외의 모습이 기억에 강하게 남았다. 항상 뒤에서 조용히 공부하던 학생이었는데, 그때 이 학생이 이런 자리에서도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학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외에도 바야르는 교내외 한국어와 한국문화 행사에 성실하게 참가했다. 한국 퀴즈 대회인 '퀴즈 온 코리아', 한국어 연극 대회, 교내 한국어 말하기 대회, 대사관 주최 한국문화 행사 등 빠지는 곳이 없었다. 비록 대회에서 수상을 하지는 못했지만, 태도만큼은 1등이었다. 바야르는 학창 시절 한국 자원봉사자들이 고향에 와서 축구를 가르쳐 줬는데, 그때부터 한국어에 관심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어를 다시 열심히 공부하고 성적이 많이 올라 자기도 놀랄 만큼 공부를 즐기고 있다고 했다.
2학년 2학기, 나는 학기 중간에 임기 만료로 귀국을 해야 해서 정규 수업을 맡지 않았다. 대신 TOPIK(토픽. 한국어능력시험) 반과 한국어 보충 반을 운영했다. 동아리 형식 수업이고 정규 수업이 끝난 후에 하는 거라 학생이 많지는 않았지만 몇몇 학생은 꾸준히 와서 한국어를 공부했고, 그중 바야르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수업에 참여했다.
어느 날, 바야르가 잔뜩 풀이 죽은 채로 나한테 말했다.
"교수님, 제 발음이 정말 안 좋아요?"
"응? 갑자기 왜?"
"오늘 한국어 말하기 테스트를 했는데, 발음이 안 좋다는 말을 들었어요."
사실 노력하는 것에 비해 발음이 많이 안 좋기는 했다. 그런데 바야르는 몽골어 발음도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어 실력만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었다. 지금이라면 좀 더 효과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겠지만, 당시 나는 한국어 초보 교사였기 때문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그 이후로 바야르에게 발음 연습을 중점적으로 더 시켰지만 크게 좋아지지는 않았다. 바야르는 발음 문제 말고도 점점 어려워지는 한국어 수업 내용에 비해 자기 실력은 늘지 않는 것 같아 위축되어 있었다. 주변에 한국어를 아주 잘하는 친구가 몇몇 있어 더 그런 듯했다. 나는 일단 한국어를 공부할 동기를 주고 싶어 바야르에게 제안했다.
"10월에 울란바토르 대학교에서 하는 한국어 올림피아드 대회에 도전해 볼래? 말하기하고 글짓기 대회에 나갈 수 있어. 대회 준비하면서 나하고 같이 한국어 공부도 더 집중적으로 해 보자."
내 말을 들은 바야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자기는 절대 상을 받지 못할 거고 자신이 없다며 대회에 나가기를 주저했다. 하지만 상을 타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회 준비를 하면서 한국어 연습을 한다는 생각으로 나가 보라는 내 말에 결국 글짓기 부문에 도전하기로 했다. 다른 학생들에게도 대회를 공지했지만 2학년 중에서는 바야르만 나가게 되었다.
대회 날이 될 때까지 약 한 달 동안, 우리는 1:1로 글짓기 연습을 했다. 연습을 하다 보니 글짓기 실력은 점점 늘었지만, 몽골에는 워낙 한국어를 잘하는 학생들이 많기에 바야르도 나도 수상을 할 거라는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상을 탈 수 있어"가 아니라 "상을 탈 수도 있고 못 탈 수도 있지만,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하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대회 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모든 대회가 끝나고 수상자 호명을 할 때였다.
바야르가 동상을 수상한 것이다! 깜짝 놀라 옆에 앉은 바야르를 바라보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앉아만 있었다. 나와 주변 친구들이 "너야, 너! 빨리 나가!"라고 해서야 단상으로 나갔다.
바야르는 자기가 상을 탈 수 있을 줄 몰랐다며 아주 뿌듯해했다. 나도 정말로 기뻤다. 바야르의 노력이 좋은 결실을 맺었다. 더불어 나 자신도 학생에게 정말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선생님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접 체험했다.
바야르는 이 이후에 한국어에 자신감을 좀 더 갖게 되었다. 한 달 뒤, 나는 임기 만료로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바야르는 나에게 교수님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다고, 앞으로도 계속 노력할 것이며 꼭 TOPIK 6급에(최고 등급이 6급이다.) 합격하여 한국어와 관련된 일을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약 1년 후, 후임 코이카 단원이 몽골국립교육대학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후임 단원은 나와 몽골에서 친하게 지낸 동생 단원이었는데, 임기 만료 후 재지원해서 몽골국립교육대학교에 파견을 갔다. 어느 날 후임 단원에게 학교와 학생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바야르 이야기를 했다.
"언니, 그런데 학년에 비해 한국어를 잘 못하는 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네. 특히 지금 4학년은 졸업해야 되는데 아직 한국어를 잘 못하는 학생이 많아서 걱정이야."
"맞아. 나는 그래서 보충 수업을 계속했었어. 그래도 4학년에 OOO 하고 OOO, 바야르는 한국어 잘하지?"
"바야르가 누구야?"
"4학년 남학생 있잖아."
"내가 아직 학생들 이름을 못 외워서..."
"그 학생 정말 열심히 하는 학생이야. 잘 도와줘."
얼마 후, 후임 단원이 다시 연락했다.
"언니, 바야르라는 학생 자퇴했대."
이럴 수가, 자퇴라니? 최근에는 연락을 안 했지만, 내가 몽골에서 귀국한 후에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었고, 그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했었다. 귀국 전만 해도 의욕에 가득 찼던 학생이 자퇴라니, 믿기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