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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국어 교원 Feb 08. 2023

튀르키예를 위하여...

튀르키예(터키) 지진

튀르키예(터키)와 시리아에 최악의 지진이 덮쳤다. 80여 차례의 지진으로 도시가 붕괴되고 6천여 개의 건물이 무너졌으며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지금까지 1만 1천 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다고 하는데, 튀르키예에서만 80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다. 시신이 너무 많아 병원 건물 바깥에 수십 구의 시신이 줄지어 누워 있으며, 담요와 시트로만 덮인 시신들도 많다고 한다. 그런데 아직 매몰된 지역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여진으로 인해 구조 작업이 어려워 전 세계에서 도움의 손길을 보내고 있다.


나는 튀르키예 친구가 두 명 있다. 비록 연락은 거의 못 하고, 단 2주 동안 같이 지냈을 뿐이지만 그 2주는 나에게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2주였기 때문에 그 친구들 또한 나에게 정말 특별한 친구들이다.


2011년, 대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해외에 나갔다. 학교를 통해 국제워크캠프라는 해외 봉사활동 프로그램에 친구 한 명과 같이 참가했는데, 이탈리아의 한 작은 시골 마을인 모길라제(Mogilazze)에 가서 마을 주민의 일을 돕는 것이었다. 모길라제는 마을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곳이었다. 아주 깊은 산골에 사람들이 숙식하고 일하는 건물 몇 채가 있었다. 우리는 이탈리아, 스페인(이들은 자기들을 스페인이 아닌 '카탈로니아' 사람이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카탈로니아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곳이었다.), 프랑스, 영국, 체코공화국, 그리고 터키에서 온 사람들과 한 팀이 되어 마을 일을 했다.


우리가 한 일은 블루베리와 토마토 잼을 만들기 위해 따고 씻는 일, 아침마다 양들에게 먹이 주기, 나무 베고 장작 패기 등이었다. 해가 떠 있을 때는 힘든 일과를 하고 해가 지면 서로 모여 게임을 하고 먹고 마시고 놀았다. 언젠가는 이탈리아 친구가 가져온 보드카를 마셨는데, 나와 내 친구는 보드카가 뭔지 모르고 그냥 소주 냄새가 나서 소주 같은 것이겠거니 하고 원샷을 했었다! 우리는 독약을 먹은 줄 알았다. 연거푸 물을 마셨지만 배에서 불이 나는 듯했고 다른 외국 친구들은 괜찮냐고 하면서 깔깔 웃었다.


밤이 되면 다 같이 숙소 밖에 있는 의자에 앉아 밤하늘을 구경했다. 모길라제는 산속 마을이라 은하수가 다 보였다. 처음으로 본 은하수는 정말 황홀했다. 왜 은하'수(水)'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별이 흐른다는 게, 강 같이 보인다는 게 이런 말이구나 싶었고, 친구들과 같이 봐서 더 낭만적이었었다.


주말에는 봉사활동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길라제 밑에 있는 작은 도시인 '보비오'라는 곳으로 내려가 신나게 놀았다. 저녁을 먹은 후에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보비오 광장에 음악이 흐르자, 한국인 친구가 갑자기 막춤을 추기 시작했고 이어 다른 친구들도 신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느새 광장 전체가 춤을 추게 됐다. 신나는 음악이 나오면 정열적으로 막춤을 추고, 잔잔한 노래가 나오면 격식 있는 무도회장에서 추는 것처럼 부드러운 춤을 줬다. 광장 사람들은 처음 춤을 시작한 우리 팀에게 환호를 보냈다. 밤이 되고 나와 한국인 친구, 그리고 체코 친구 한 명은 호텔에서 자고 다른 친구들은 야생을 즐기고 싶다며 공원에서 침낭을 펴고 잤다. 씻는 건 우리 호텔에서 하고 말이다. 아침이 되고 다들 초췌한 모습으로 보비오를 구경하고 차를 타고 모길라제로 복귀했다.


모길라제에서...

봉사활동이 끝났을 때, 단 2주 동안만 같이 있었는데도 아주 오랫동안 함께 했던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 같아 너무 아쉽고 슬펐다. 나와 친구는 비행기 시간 때문에 다른 친구들보다 하루 먼저 떠났는데,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차를 타고 모길라제를 내려오던 순간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우리는 서로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모갈라제에서의 경험은 나에게 참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는 해외에 그것도 한국과 아주 멀리 떨어진 이탈리아에 가는 게 무서웠는데, 다른 나라의 문화를 체험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재미있고 의미 있는 경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적어도 2년에 한 번은 해외여행을 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봉사활동 전에 나는 항상 자신감이 없고 소극적이고 극도로 내성적이며 도전하기를 두려워하는 성격이었다. 국제워크캠프도 친구가 같이 가자고 계속 말해서 신청한 것이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지 적극적으로 나서고, 나를 활동적일 수밖에 없도록 이끌어주는 외국 친구들과 있다 보니 이런 성격도 조금은 고쳐지게 되었다. 또 도전이 두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말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어 교원이 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직접적인 계기는 국어국문학 전공인 내가 대학교 4학년 때 전공 수업으로 '외국어로서의 한국어교육 수업'을 듣고 난 후 한국어 교원이라는 직업에 관심이 생긴 것이었지만, 국제워크캠프에서의 경험이 진로를 확실하게 정할 수 있게 해 준 것 같다.


외국 친구들과 어울리며 좋은 추억을 쌓은 것 외에도 나와 친구가 먹는 컵라면을 보고 마을 주민이 이게 그 유명한 '김치'냐고 물었던 것, 자기 나라 소개 시간에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특히 각자 자기 나라의 노래를 소개하는데 순간 머리가 하얘져서 겨우 애국가만 부른 것, 봉사 활동 때는 아니지만 이탈리아를 다니면서 가게에 들어갈 때마다 직원이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해서 'Korea'라고 대답하면 갑자기 직원이 경계하며 우리에게 '북한'사람이냐고 물은 것 등의 경험이 '한국을 제대로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 줬다.


'2년에 한 번은 꼭 해외여행을 하자'라고 스스로 다짐한 것은 지켰다. 몽골과 베트남은 해외여행으로 간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봉사활동 후 2년 후에 첫 번째로 간 해외는 터키, 지금의 튀르키예였다. 왜냐하면 봉사 활동을 하며 만난 터키 친구 두 명을 꼭 다시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봉사활동은 너무 좋았지만, 언어의 문제로 소통은 힘들었다. 외국 친구들은 모두 유럽인이고(터키가 유럽이라는 데는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 영어를 잘했다. 하지만 나와 내 한국 친구는 영어를 그냥 일상 회화 정도만 간신히 하는 수준이었다. 같이 게임을 하는데 우리만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해 다른 팀원들에게 미안하고 위축된 적도 많았다. 게다가 원래 나는 많이 소극적인 성격이라 서양 친구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런 나와 가장 친하게 지낸 친구들이 터키 친구들이었다. 터키 친구들은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우리를 제일 좋아했다. 우리도 그 친구들이 가장 편했고, 항상 가까이 지냈다. 그들의 이름은 '나잔'과 '투체'였다. 


나는 귀국할 때 나잔과 투체에게 꼭 터키에 갈 것이니 터키에서 보자고 했다. 그리고 2년 후인 2013년에 이스탄불-에페스-파묵칼레-카파도키아 일정으로 터키 여행을 갔다. 아쉽게도 내가 터키에 갈 때 나잔은 해외에서 인턴쉽을 하고 있었고 투체는 수도인 앙카라에 있었다. 앙카라에 가고 싶어도 그때는 앙카라에서 폭탄 테러도 일어나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었기에 가지 못했다. 페이스북으로 여행 내내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에만 만족해야 했다.


친구들은 만나지 못했지만, 나는 터키 여행을 제대로 즐겼다. 동서양의 아름다움이 모두 어우러져 있는 이스탄불, 과거 로마 시대의 유물들이 날것 그대로 남아 있는 역사 도시 에페스, 천국에 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하얗고 아름다웠던 파묵칼레, 스타워즈의 촬영장이었다는 동굴과 기암괴석의 도시 카파도키아! 한 번 가봤지만 다시 꼭 가 보고 싶은 나라이다. 터키는 사람들도 참 좋았다. 이스탄불에서는 너무 적극적인 호객 행위 때문에 마음 상했던 적도 있었지만 에페스, 파묵칼레, 카파도키아에서 만난 터키인들은 모두 친절했었다. 



튀르키예를 덮친 너무나 큰 재난에 나잔과 투체 생각부터 났다. 그리고 터키 여행 때 만났던 친절했던 사람들도... 투체는 SNS를 안 해서 소식이 끊겼지만, 나잔은 인스타그램에 튀르키예 지진 현황을 알리며 기부를 부탁하는 글을 올렸다. 나는 9년 만에 나잔에게 괜찮냐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튀르키예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도울 것이라는 말도 했다. 나잔은 다행히 자신과 가족들은 괜찮은데 상황이 너무 안 좋다고, 마음 써 줘서 고맙다고 답장했다.


방금 전 네이버 해피빈 굿네이버스 튀르키예 구호 활동 기부금을 조금 냈다. 조금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는 일에 소중히 쓰였으면 한다. 튀르키예도, 무정부상태에 가까워 구조 활동이 더 어렵다는 시리아도 더 많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빨리 구조되기를, 종교는 없지만 진심으로 하늘에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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