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에서는 2년, 베트남에서는 2년이 좀 안되게 지냈다. 그리고 작년에 또 파견 교원이 되었다. 작년에는 코로나도 그렇고 여러 문제가 있어 한국에서 재택근무를 했지만, 올해는 다시 베트남으로 가려고 준비하고 있다. 주위 사람들은 이렇게 자꾸 해외로 가는 나에게 물었다.
"해외에서 혼자 살면 무섭지 않아?"
당연히 무서울 때도 있다. 여자이고 혼자 사는 외국인이고 말도 잘 안 통하기에 더 그렇다. 해외 생활을 그리 오랜 시간 한 것은 아니지만 무서웠던 적도 꽤 있었다. 그런데도 해외로 가냐고 물으면, 언어 문제를 빼면 한국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강력 범죄 비율은 몽골과 베트남보다 한국이 더 높다. 해외라서 무서운 경험을 한 것이 아니라, 무서운 경험을 한 곳이 해외일 뿐이다. 그리고 내가 해외 파견 교사로 지원한 것은 일단은 일자리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고,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고 언어를 더 잘 배울 수 있는 등 해외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해외에 살면서 겪었던 무서웠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1. 왜 자꾸 따라와?
몽골에 파견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집을 구하고 한 달 정도쯤 됐을까. 내가 파견된 기관에서 우리 집까지 가는 길은 사람들이 많고 좀 번화가인 길과 좀 외진 길이 있었다. 그런데 외진 길로 가는 게 번화가 길로 가는 것보다 10분은 더 빠르게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번화가 길은 큰 도로가 있다 보니 매연이 많아서 나는 주로 외진 길로 갔었다. 외진 길이라고 해봤자 아파트와 작은 시장이 있어서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여느 때처럼 외진 길로 퇴근하고 있었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한 남자가 나와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나와 지나칠 때 내 쪽을 보며 멈칫하더니, 나를 따라 방향을 트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에이 설마' 싶었다. 우리 아파트로 가려면 옆 아파트 쪽문을 통과해야 했는데, 그 남자도 똑같이 쪽문으로 들어왔다. 아, 이건 확실히 이상하다 싶어서 무서워졌는데, 동시에 화도 났다.
'뭔데 날 따라오는 거지?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화가 나서 무서운 것도 조금 가셨다. 나는 전화를 하는 척을 하며 몸을 휙 돌려서 그 남자를 진심으로 노려봤다. 몽골 경찰 전화번호도 모르고 안다고 해도 전화로 신고는 할 수 없었지만, 경찰에 전화를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자 내 의도가 제대로 통했는지 내 쪽으로 걸어오던 남자가 당황해하더니 방향을 돌렸다. 나는 그 남자가 사라지고도 계속 그쪽을 노려봤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그냥 도망가는 게 제일 안전하지만, 내가 들어온 아파트 쪽문 바로 옆에 시장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고 거기에는 사람이 꽤 있어서 조금이나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아무도 없는 외진 곳이었다면 어땠을까. 그 남자는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나를 쫓아왔던 걸까. 그 이후로는 좀 귀찮아도 저녁에는 항상 번화가 쪽으로만 다녔다.
2. 여기가 대체 어디지?
한국에서는 낯선 곳에 갈 때 항상 네이버 지도를 이용한다. 네이버 지도는 친절하게도 지하철에서 내렸을 때 몇 번 출구로 나가면 되는지, 몇 미터 남았는지,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다 보여준다. 그런데도 나는 길을 헤맨다. 좀 심한 '길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외국에서 모르는 장소에 갈 때 얼마나 걱정이 많았는지... 구글맵이 있었지만 구글맵의 기능은 네이버 지도보다 안 좋다. 그래도 대부분은 어떻게 잘 찾아갔는데, 길을 잃어서 정말 무서웠던 적도 있었다.
몽골에서 있었던 일이다. 코이카 해외봉사단은 현지에 파견을 가면 2달 동안 현지 적응훈련이라는 것을 하는데, 이 기간에 2주 동안 파견된 기관 관련자인 현지인의 집에 가서 홈스테이를 하며 파견 기관과 지역에 대해 알아보고 앞으로 살 집도 구한다. 나는 내가 가르칠 학생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했는데, 항상 학생과 같이 출퇴근을 했다. 어느 날은 학생이 약속이 있어서 나 혼자 홈스테이 하는 집으로 가야 했는데, 학생은 걱정을 했지만 나는 그래도 일주일 이상 왕복했던 길이니 갈 수 있을 거라고 학생을 안심시켰다. 그런데 학생이 맞았다. 내 안에 있던 길치의 본능이 이때다 싶어 자기 존재감을 드러냈다. 분명히 버스에서 제대로 내렸다고 생각했는데, 분명히 여기에서 1~2분만 걸어가면 홈스테이 하는 아파트가 나와야 하는데, 아파트는 있었지만 그 아파트는 아니었다!
뭐지? 주변을 아무리 찾아봐도 낯설다. 난 왜 익숙한 곳이라 생각하고 버스에서 내렸을까! 무서웠다. 이대로 길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부끄러웠지만 학생에게 전화해서 집을 못 찾겠다고 말했다. 학생이 최선을 다해 설명해 줬지만 길을 도무지 모르겠다.
"선생님 어디에서 내리신 거예요?"
"나도 잘 모르겠어. 여기가 맞는 거 같아서 내렸는데..."
"주변에 뭐가 있어요?"
"아파트랑 가게... 그런데 몽골어를 못 읽겠어."
"선생님, 주변에 몽골 사람 있어요? 바꿔 주세요."
나는 아무 가게에 들어갔다. "제가 길을 잃어버렸는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전화로 제 몽골인 친구한테 여기가 어딘지 대신 말해 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몽골어로 말했다.
"Туслаарай"
... 사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실력이 안 돼서, 하고 싶은 말을 "도와주세요" 한 마디로 응축하며 가게 주인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가게 주인은 매우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고 학생과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전화기를 다시 받으니 학생은 거기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 조금만 기다리는 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애도 아니고, 집 하나를 못 찾아가서 이런 민폐를 끼치다니! 내가 몽골어를 못하는 것도 학생한테 잘 갈 수 있다고 해 놓고 결국 이렇게 된 것도, 통화 이후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가게 주인의 시선도 부끄러웠다. 조금 후에 학생의 아버지가 나를 데리러 왔다. 알고 보니 두 정거장 정도 먼저 내린 것이었다. 몽골의 옛날 아파트와 가게들은 다 비슷하게 생겼고, 거리도 특색이 없어서 착각했다. 학생의 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그럴 수도 있다고 했지만 정말 부끄러웠다.
2년 뒤, 베트남에서 비슷한 일을 또 겪었다. 2성급 호텔에서 한 달 살이를 할 때였는데, 항상 택시를 타고 출퇴근을 하다가 한 번은 걸어가 보고 싶었다. 걸어가도 20분이 안 걸리는 거리였고, 역시나 택시로지만 여러 번 왔다 갔다 한 거리니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를 너무 믿었다. 이상하게 가도 가도 낯선 길만 나왔다. 구글 맵을 봐도 모르겠다. 나는 분명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글맵에서의 나는 목적지 호텔과 점점 멀어졌다. 다시 원위치로 돌아온 후 다시 길을 찾았다. 또 이상한 방향이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그때는 7시 30분 수업이 끝나고 퇴근하던 참이라 날이 다 어두워진 후였다. 늦은 저녁이라 무섭기도 하고 짜증도 났다. 택시를 타고 싶었지만 주변에 택시가 안 보였고, 전화로 부르려면 베트남어로 여기 주소를 말해야 하는데 당연히 베트남어도 못 하고 여기가 어딘지도 몰랐다. 할 수 없이 원위치로 돌아와서 방향을 다시 잡았다. 아, 다행이다. 이번에는 방향이 맞았다. 그런데 호텔이 하필이면 골목에 있다. 나는 결국 가는 길에 헤매고 또 헤매서 걸어가면 20분 안에 가는 거리를 1시간 이십 분 동안 걸어갔다.
3. 아저씨, 이 길이 아니잖아요.
외국에서 살면서 가장 긴장이 될 때는 택시를 탈 때이다. 특히 몽골의 경우 더 그랬다. 몽골은 본업 택시 기사가 아닌 부업 택시 기사가 많다. 차도 일반 택시가 아니라 본인 자가용이다. 그냥 길거리에서 손을 들고 있으면 내 앞에 차가 한 대 서는데, 그때부터 그게 택시가 되는 거다. 코이카에서는 정규 택시를 이용하라고 하지만, 애초에 정규 택시 자체가 별로 없어서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몽골에서 택시를 탈 때 긴장이 많이 되었다. 우리 기수가 파견되기 전에 나쁜 택시 기사에게 호되게 당한 단원이 있기도 했고 말이다.
다행히 안 좋은 일은 많이 당하지 않았다. 당하면 택시 요금 바가지 정도였다. 몽골은 한국과 달리 거리에 따라 요금을 낸다. 일반 자가용도 진짜 택시 같은 계기판이 있어 손님이 0km부터 시작해서 얼마나 달렸는지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 계기판을 조작하거나 일부러 먼 거리를 돌아서 가거나 해서 바가지를 씌웠다. 몽골어를 어느 정도 익히고 난 후에는 바가지를 당하는 일이 없었는데, 초반에는 몇 번 당했다.
그중 기억에 남는 바가지가 있다. 평소에도 몇 번 다니던 길을 택시를 타고 가는데 이상하게 평소와 다른 길로 돌아갔다. 아주 멀리 돌아가는 건 아니었지만, 처음 보는 길이었다. 문득 무서워졌다. 바가지를 씌우려는 목적으로 돌아가는 거면 차라리 다행인데, 그게 아니라면? 한국에서도 혼자 택시를 탄 여자 손님은 항상 을이다. 외국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나는 '이 길 아닌데요'라고 몽골어로 말할 수 있음에도 말하지 못하고 제발 목적지만 도착하길 빌었다.
다행히 택시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역시나 바가지를 씌웠다. 그런데 정도가 심했다. 만 투그릭(한국 돈 오천 원)을 내라고 하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4천 투그릭에 가는 거리였고, 길을 돌아온 걸 감안해도 5~6천 투그릭이었는데, 그 두 배인 만 투그릭을 내라니! 내가 따지자 그 기사는 능글맞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공휴일이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택시에 공휴일 할증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주변에는 택시 기사와 나밖에 없었고,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해도 택시 기사와 싸우는 것은 무서웠다. 나는 결국 만 투그릭을 내야 했다.
전에 썼던 글인'외국인이라 서럽네. 바가지 좀 그만 씌우세요'에도 썼던 내용인데, 베트남에서는 택시 기사와 싸운 적도 있었다. 동기 선생님과 택시를 타고 머물던 호텔로 가려고 했는데, 택시 기사가 길을 돌아도 한참을 돌았다. 그리고 택시 계기판에 찍히는 금액도 비이상적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하필이면 택시 기사가 돌아간 길이 아주 외지고 어두운 곳이라 혼자였다면 너무 무서웠을 것이다. 우리가 항의하자 택시 기사도 베트남어로 큰 소리를 쳤다. 우리가 내려달라고 해도 내려주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두 명이 같이 강하게 항의하자 결국 내려주긴 했다. 나는 솔직히 인상을 구기며 화를 내는 기사가 무서워서 화는 나지만 계기판에 찍힌 금액대로 내려고 했는데, 동기 선생님은 절대 그 금액대로 줄 수 없다며 더 적은 금액을 냈다. 택시 기사는 얼굴을 붉히며 고래고래 소리를 쳤지만 우린 뒤도 안 돌아보고 다른 택시를 잡았다. 일행이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혼자였다면 정말 정말 무서웠을 것이다.
4. 행사라도 하나? 왜 이렇게 사람이 많지?
베트남 후에에 있을 때였다. 어느 일요일, 초급 1반을 막 수료한 학생들에게 연락이 왔다. 자기들이 베트남 절에 갈 건데,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반에 스님 학생 한 명이 있는데 그 학생의 절에서 행사를 한다는 것 같았다. 내가 좋다고 하자 학생 두 명이 오토바이를 타고 나를 데리러 우리 아파트로 왔다.
아파트 옆에는 작은 건물이 있고, 그 건물 옆에는 무슨 관공서 같은 게 있었다. 학생이랑 같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데 그 관공서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지나가던 오토바이도 다 멈춰서 그것만 보고 있어서 길을 뚫고 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아침부터 집에서도 이상하게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만 그것 때문인 것 같았다. 행사를 하나? 싶었는데 사람들 표정이 행사를 보는 표정이 아니었다. 안에서 누가 소리를 지르는 것 같기도 하고, 몇몇 사람은 굉장히 심각한 표정으로 안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싶어도 사람이 너무 많아 알아볼 수 없었고, 우리는 가야 할 곳이 있었기에 궁금함을 뒤로하고 절로 갔다.
절에서 놀고 있을 때, 갑자기 학생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 이야기를 하더니 나한테 베트남 뉴스를 보여 줬다. 사진을 보니 뭔가 사건이 터진 것 같긴 했는데 무슨 사건인지는 이해 못 했다. 학생들이 스마트폰 사전과 영어, 몸짓을 사용해서 사건을 최대한 설명해 줬다. 정리하자면, 마약범이 저지른 인질극이었다.
마약범이 경찰 체포 중에? 아니면 감옥에서? 도망쳐서 관공서로 들어가 칼을 휘둘렀고, 여자 한 명을 인질로 잡아 한참을 대치하다가 경찰의 총에 맞고 체포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한창 대치 중일 때 그곳을 지나간 것이었다. 다행히 인질은 무사했다. 그런데 등골이 서늘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바로 옆 옆 건물이었다. 칼을 들고 관공서로 쳐들어가 인질극을 벌일 정도의 범죄자가 바로 근처에 있었다는 거 아닌가? 베트남은 마약에 관해서는 다른 나라보다 깨끗할 줄 알았는데, 학생들의 말을 들어보면 후에에도 마약 범죄자가 있다고 한다. 후에는 강력 범죄도, 베트남에서는 흔한 절도 범죄도 별로 없는 곳이라 안심했었는데 이 사건 이후로는 경각심이 들었다.
5. 똑똑똑... 똑똑똑...
해외에 살면서 가장 무서웠던 순간이다. 문을 두드리는 저 똑똑똑 소리... 우리 집에 오기로 한 손님이 아닌 사람이 문을 두드리는 경우는 대부분 광고를 하러 온 사람이거나 수도 요금, 전기 요금 통지서를 주러 온 사람이다. 광고하러 온 사람도 마찬가지고 통지서를 주러 온 사람한테도 나는 절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말도 안 통하고, 괜히 집에 젊은 외국인 여자 혼자 산다는 것을 낯선 사람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문을 두드렸을 때 집에 없는 척 가만히 있으면 유인물과 통지서를 문에 붙여 두고 간다. 몽골에서는 통지서를 가지고 은행에 가서 요금 납부를 하면 됐고, 베트남에서는 집주인이 요금을 받으러 대신 왔다.
어느 날, 몽골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아파트에 온 지 3주 정도 되었을까.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역시 가만히 있었는데 이 소리가 멈추질 않았다. 똑똑똑... 똑똑똑... 똑똑똑... 평소와 다른 느낌에 걱정이 되려던 찰나 소리가 멈췄다. 다행이다 싶어 저녁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봤다. 그런데 몇 분 지나자 또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똑똑똑...
뭐지? 혹시 집에 뭐가 문제가 생겨서 경비원 아저씨가 온 건가? 문 밖을 볼 수 있는 렌즈가 없었고 문에 안전 고리도 없었다. 확인하려면 문을 아예 열어야 했다. 조금만 참자, 곧 멈추겠지.
그런데 똑똑똑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멈췄다 싶으면 몇 분 뒤 다시 두드렸다. 심지어 자기 전인 밤 12시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방문도 잠그고 제발 저 소리가 멈추길 바라며 두려움에 떨면서 잤다. 다음날에는 괜찮겠지 괜찮겠지 하면서.
다음 날 아침 7시. 나는 눈이 번쩍 떠졌다. 7시에 맞춰 논 알람 소리가 아닌 '똑똑똑' 소리에. 이른 아침인데도 그 의문의 낯선 사람은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너무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그냥 '똑똑똑'... 너무 무서웠다. 출근을 해야 하는 건가? 밖에 나갔는데 그 사람이 나타나면? 대체 무슨 의도로 문을 두드리는 걸까?
나는 내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제발 경비원이기를 바랐다. 무슨 일인지는 짐작을 못하겠지만 경비원이 그랬으면 그럴 만한 이유로 문을 두드렸을 것이니까. 경비원은 항상 아파트 1층 프런트에 있는데 나와 매일 인사를 나눈다. 그러니 정말 용건이 있어 우리 집을 두드렸으면 이따가 출근할 때 1층에서 나한테 말을 할 것이다. 밖에 나가기가 너무 싫었지만 그래도 출근을 해야 했다. 1층에 가니 경비원이 활짝 웃으며 항상 그랬듯이 나한테 인사를 했다.
"Сайн уу!" (안녕!)
끝이었다. 별다른 말은 없었다. 경비원이 아니었다. 그럼 대체 누구인가! 그날 수업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 게 무서웠다. 오늘 또 문을 두드리면 어떻게 하지. 무서운 것도 그렇고, 어제오늘 아침 똑같은 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았다. 두려움을 안고 집으로 갔는데, 문에 이상한 그림이 있었다. 주변 집 문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낙서한 듯한 그림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 문만 조금 달랐다. 다른 집에는 그림만, 우리 집에는 그림 밑에 몽골어로 글자가 쓰여 있는 것이었다. 나는 사진을 찍어 코이카 몽골 사무소 안전 담당 직원에게 보내고, 어제오늘 일을 말하며 이 문장이 무슨 뜻인지 알려달라고 했다. 직원에게 온 답장에 소름이 돋았다. 그건 몽골어로 "나가!"였다.
문제의 그림과 글
코이카 몽골 사무소의 판단도 그렇고 내 생각에도 이 짓은 어린아이의 장난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하필 외국인인 내 집에만 '나가'라고 글을 쓰다니.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하루 종일 문을 두드리는 건 너무 심한 장난이 아닌가? 화가 나면서도, 어린이의 장난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안심이 되면서도, 혹시나 문을 두드린 사람이 어린이가 아니라 정말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나 싶은 생각에 한동안 집에서 두려움에 떨며 지냈다.
그리고 약 10개월 뒤, 너무 안타깝고 슬픈 소식을 들었다. 다른 나라로 파견 간 코이카 동기 언니의 사망 소식이었다. 동기의 명복을 비는 팝업 창이 코이카 홈페이지 뜨고, 인터넷 뉴스 상위권 순위에 사건을 다룬 기사가 굵은 글씨로 올라오고 명복을 비는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모르는 사람의 사망 사건을 뉴스로 봤을 때는 그냥 안타까운 감정만 들었었는데, 아는 사람이 일을 당하니 이 모든 것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아주 친했던 동기도 아니었고 멀리 떨어진 나라에 있었지만, 그래도 한 달 반의 국내 교육을 받으며 조별 활동을 할 때 항상 같은 조로 활동했었고, SNS를 통해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코이카 동기'라는 유대감으로 묶여 있었다. 그런데 그런 동기가 죽었다. 살해당했다. 가장 안전함을 느껴야 할 자신의 집에서.
코이카 국내 교육 마지막 날이자 봉사단 발대식 날, 우리는 눈이 빨개진 채로 주변 동기들과 파견을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나눴고, 나와 그 언니도 서로 안으며 인사를 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 언니에게 한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우리 건강하게 파견 갔다 와서 2년 후에 다시 만나요."
말이 씨가 되어 정말 건강하게 다시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기억하는 동기 언니는 매우 착하고 여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봉사활동을 하러 간 사람을 그깟 돈 몇 푼 훔치겠다고 죽인 범인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그 끔찍한 순간 동기가 느꼈을 감정을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픈 동시에 무서워졌다. 남의 일이 아니었다. 지금 바로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후로는 집을 두드리는 낯선 사람의 '똑똑똑' 소리가 더 공포스러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숨소리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