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오쿠보에서 김치찌개를 먹었을 뿐인데, 밤이 길어졌다

신오쿠보에서 김치찌개를 먹었을 뿐인데, 밤이 길어졌다 ep.1

by 추설

신오쿠보에ㅇ\ 김치찌개

신오쿠보에서 김치찌개를 먹었을 뿐인데, 밤이 길어졌다 ep. 01


퇴근하고 신오쿠보에 내렸다.

한인타운이라 그런지 역 주변부터 식당 간판이 빼곡했다. 한글이 눈에 익숙했지만, 평일 저녁의 신오쿠보는 늘 정신이 없었다. 역을 나서자마자 사람이 많았다. 식당 앞마다 줄이 늘어서 있었고, 누군가는 기다리다 지친 얼굴로 휴대전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밥을 먹으러 나온 거였는데, 몇 번이나 줄 앞을 지나치다 보니 괜히 피곤해졌다. 하루 종일 사람 속에 있었던 탓인지, 다시 그 무리에 섞이고 싶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말 안 하고 밥을 먹고 싶었다.

큰길을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갔다. 소음이 조금씩 멀어졌다. 불빛은 낮아졌고, 사람 그림자도 띄엄띄엄 보였다. 허름한 김치찌개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간판은 오래돼 있었고,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손님 수도 많지 않았다. 잠깐 서서 안을 들여다보다가 문을 열었다.

가게 안은 조용했다. 테이블 수는 많지 않았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있어 보였다. 다들 말없이 밥을 먹고 있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 사람은 나 혼자인 것 같았다. 그게 이상하게 편했다. 괜히 자세를 고쳐 앉게 됐다.

메뉴판을 펼쳐 들고 있는데, 서빙을 하던 여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짙은 쌍꺼풀이 또렷한 눈에, 흰 피부였다. 머리는 어깨 아래로 곧게 떨어지는 검은 생머리였고, 묶지 않은 채 그대로 내려와 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단정한 옷차림이었는데, 꾸민 느낌은 아니었다. 그냥 일을 하러 나온 사람의 모습이었다.

얼굴을 보는 순간 생각이 잠깐 멈췄다. 놀랐다기보다는, 시선이 거기서 멈췄다. 그녀가 입을 열기 전까지, 내가 뭘 보게 될지 잠깐 잊고 있었다.

“김치찌개, 일인분 주세요.”

말을 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일본어였지만 말끝이 부드러웠다. 발음이 또렷했고, 필요 이상으로 길지 않았다.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귀에 남았다.

그게 나에게만 그런 건 아니라는 걸 곧 알았다. 다른 테이블에서도 같은 말투였다. 물을 내려놓고, 반찬을 옮기고, 빈 그릇을 치우는 동작까지 모두 비슷했다. 누군가에게만 친절한 게 아니라는 점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했다.

김치찌개가 나왔다. 김이 천천히 올라왔다. 숟가락을 들고 국물을 한 번 불어 식힌 뒤 입에 넣었다. 잠깐 숨을 골랐다. 맛은 평범했다. 집에서 먹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싫지도 않았다. 이 가게에는 그 정도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먹다 보니 자꾸 고개가 들렸다.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니었다. 그녀가 가게 안을 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앞치마 끈을 한 번 정리하고, 물컵을 내려놓고, 계산대 쪽으로 이동하는 동작들. 말은 짧았고, 웃음을 억지로 붙이지도 않았다. 일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정확히 지키는 것처럼 보였다.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시선을 오래 두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물을 내려놓는 손의 각도나, 돌아설 때 잠깐 보이는 옆모습 같은 것들이 자꾸 기억에 남았다. 내가 괜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시선은 몇 번이고 그쪽으로 향했다.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밖으로 나오자 다시 신오쿠보의 소음이 밀려왔다. 아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 있던 가게는 금방 골목 안으로 묻혔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했다. 옷을 벗어두니 김치 냄새가 났다. 물을 오래 틀어놓고 씻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어냈는데도, 가게 안의 공기와 그녀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침대에 누워 불을 끄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고, 눈을 오래 마주친 것도 아니었다.

이름도, 어디서 왔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잠들기 직전까지,

다시 그 골목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혼자서 몇 번이나 떠올리고 있었다.

그날 밤은, 생각보다 쉽게 잠들지 못했다.

writer: 추설

Instagram id: sc28zs

https://www.instagram.com/sc28zs/

표지.jpg 작가의 한일 국제 로맨스 소설 『세상에 없던 색』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7444521


월, 화, 수, 목,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