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오쿠보에서 김치찌개를 먹었을 뿐인데, 밤이 길어졌다 Ep.7
Ep.7
금요일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자주 떠올랐다. 일부러 계산하지 않으려고 했는데도 달력은 자꾸 눈에 들어왔고, 퇴근 시간은 평소보다 느리게 흘렀다. 회사에서는 늘 하던 일들을 처리했을 뿐인데 일이 쉽게 끝나지 않았다. 야근이 길어졌고, 모니터 앞에 앉아 있으면서도 집중이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문서를 넘기다 말고 멈추는 일이 잦아졌고, 방금까지 읽고 있던 문장이 어디까지였는지도 헷갈렸다.
신오쿠보에는 그 후로 가지 못했다. 일부러 피한 건 아니었다. 그냥 일이 늦게 끝났을 뿐이었다. 그래도 퇴근길에 전철을 타고 서 있으면서, 저번에 그녀… 아니, 혜나 씨에게 받은 휴대폰 번호가 문득 떠올랐다. 지금 연락해도 될까, 하고 잠깐 생각했다가 그만뒀다. 괜히 부담을 주는 것 같기도 했고, 약속도 없이 먼저 연락하는 게 맞는지 자신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런 이유보다도 내가 먼저 연락하는 게 조금 부끄러웠다.
뭐라고 시작해야 할지도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휴대폰을 꺼냈다가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보내지 않은 메시지는 머릿속에서만 몇 번이나 쓰였다가 지워졌다.
목요일이 되자, 시간이 더 느려진 것처럼 느껴졌다. 금요일은 바로 다음 날인데도 하루가 유난히 길게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으면서도 휴대폰은 계속 손이 닿는 곳에 두었다. 알림이 울린 건 아니었는데, 괜히 화면을 켰다 끄는 일이 잦아졌다.
연락은 없었다.
처음에는 아직 하루가 남았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굳이 전날에 다시 연락하지 않아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렇게 넘기려고 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생각이 다른 쪽으로 흘렀다. 혹시 약속을 잊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곧바로 그건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부정했다. 혜나 씨는 그런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혹시 내가 별로였던 걸까. 말이 너무 없어서 같이 있어도 재미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에서 했던 대화를 하나씩 떠올리다가, 괜히 말하지 않아도 될 부분까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
먼저 연락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또 멈췄다. 지금 연락하면 괜히 재촉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고, 답장이 바로 오지 않으면 그게 더 신경 쓰일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나은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불을 끄고 나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휴대폰을 베개 옆에 두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화면을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때 진동이 울렸다.
크게 놀랄 정도는 아니었는데,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화면을 켜자 혜나 씨 이름이 떠 있었다. 메시지는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내일 말이에요. 금요일이요. 설마 잊으신 건 아니죠?』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숨이 조금 늦게 나왔다.
곧이어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연락이 없어서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제가 먼저 연락했어요.』
손에 쥔 휴대폰이 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잊은 게 아니라는 사실보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게 먼저 와닿았다. 그러다 문득, 그래도 내가 남자인데 먼저 보냈어야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부끄러워졌다.
바로 답장을 보냈다.
아뇨. 잊지 않았어요.
저도 연락해야 하나 계속 고민하고 있었어요.
잠시 후, 다시 진동이 울렸다.
다행이다.
괜히 저만 신경 쓰고 있었나 봐요.
그 짧은 문장을 읽고 나서야,
내일이 정말 온다는 게 실감이 났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아까까지는 쉽게 잠들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생각보다 빨리 눈이 감겼다.
내일은,
괜히 한 번 더 시계를 보게 될 것 같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알람을 끄고도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괜히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아직 여유가 있었는데도 마음이 먼저 바빠졌다.
옷장 앞에 서서 한참을 서 있었다. 특별한 날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말했지만, 손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평소 입던 셔츠를 꺼냈다가 다시 넣고, 너무 단정해 보이는 것 같아 다른 걸 꺼냈다가 또 망설였다. 거울 앞에서 잠깐 서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결국 가장 무난한 옷을 입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한 선택이라기보다는, 더 이상 고민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출근길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전철 안도 늘 보던 풍경이었다. 그런데 회사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시간이 이상하게 흘렀다. 오전 내내 시계가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회의도, 이메일도, 익숙한 업무들도 전부 제자리에 있었는데, 시간만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나서부터는 더 그랬다. 아직 한참 남았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시계를 봤다. 그럴수록 시간이 더 늘어졌다. 집중하려고 모니터를 바라보다가도, 문득 혜나 씨 얼굴이 떠올랐다. 카페에서 웃던 표정, 말 끝을 살짝 올리던 말투 같은 것들이 아무 예고 없이 스쳤다.
그런데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상황이 반대로 바뀌었다. 방금까지 느리게 흐르던 시간이 갑자기 속도를 냈다. 메일 하나를 보내고 나니 어느새 시계는 퇴근 직전이었다. 급하게 정리하지 않아도 될 일들까지 괜히 서둘러 마무리했다. 가방을 챙기면서도 손이 어딘가 어색했다.
회사 건물을 나서자 숨이 조금 막혔다.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 정말 만나러 간다는 실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전철을 타고 가는 동안에도 마음은 계속 앞서갔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무엇을 먹게 될지, 그녀는 오늘 어떤 표정일지 같은 생각들이 뒤섞였다. 그러면서도 정작 하나도 제대로 정하지 못했다.
약속한 카페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생각보다 일찍 와 있었다. 가게 앞에서 잠깐 서서 유리창을 봤다. 안쪽에는 아직 자리가 몇 개 비어 있었고, 익숙한 커피 냄새가 문 밖까지 새어 나왔다. 괜히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가 다시 넣었다.
그때였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고개를 들자 혜나 씨가 서 있었다. 가게에서 보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앞치마 대신 가벼운 코트를 입고 있었고, 머리도 자연스럽게 풀어 내려 있었다. 웃는 얼굴은 여전했는데, 그게 오늘은 조금 더 가까이 느껴졌다.
“아니요. 저도 방금 왔어요.”
거의 동시에 나온 말이었다. 사실은 아니었지만, 굳이 바로잡지 않았다.
“다행이다.”
혜나 씨가 말했다. 그 한마디로 긴장이 조금 풀렸다.
“어디 갈지 정하셨어요?”
나는 잠깐 망설였다.
“…아직이요.”
솔직하게 말했다. 준비해 둔 답이 없었다.
혜나 씨가 웃었다.
“그럼 제가 가고 싶은 데가 있는데, 괜찮아요?”
“네. 좋아요.”
이번에도 대답은 빨랐다.
“이탈리아 레스토랑이에요. 여기서 조금만 걸으면 돼요.”
신주쿠 쪽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별로라며, 조금 덜 붐비는 쪽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옆을 걸었다. 나란히 걷고 있다는 사실이, 그제야 조금 실감이 났다.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아도 발걸음은 맞춰졌고, 신오쿠보의 저녁 풍경은 평소보다 조용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회사에서 카페까지, 그리고 카페에서 식당까지 이어지는 길이
이상하게 짧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게, 조금은 아쉬웠다.
메뉴판을 펼쳤는데, 볼수록 더 모르겠어졌다.
스테이크, 파스타, 피자. 이름은 다 아는데, 그래서 더 고르지 못하겠다.
“쿠도 씨, 아직이에요?”
“…네.”
괜히 메뉴판을 다시 넘겼다.
“뭘 먹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아, 그런 날 있죠.”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반대예요.”
“네?”
“오늘은 다 먹고 싶어요.”
말이 너무 또렷해서 잠깐 멍해졌다.
“하나만 시키면 꼭 다른 게 생각나거든요.”
“…아.”
“그래서 그냥 다 시키고 싶어요.”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대답이 빠르다 싶을 정도였다.
“일본 와서 저녁은 거의 김치찌개만 먹었거든요.”
“…매일이요?”
“네. 주 5일 출근하다보니까요. 저희 가게는 저녁을 제공해주거든요”
웃으면서 말했지만, 바로 이어서 덧붙였다.
“싫진 않은데요. 어느 순간부터는 양식이 너무 먹고 싶더라고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양식.”
“맞아요.”
조금 있다가 말을 이었다.
“같이 올 친구도 없고요. 아직 여기서는 친구를 못 만들었어요.”
그 말이 설명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그래서요.”
말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는 쿠도 씨랑 자주 오려구요.”
“…네?”
이번에는 대답이 늦었다.
“아, 부담되면 안 돼요.”
고개부터 저었다.
“아..아니요!”
말이 먼저 나왔다.
“…그런 건 아니고요.”
조금 있다가 덧붙였다.
“그냥… 이런 말, 잘 못 들어봐서요.”
“그런가요?”
웃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많이 부끄러워하시네요, 쿠도 씨.”
“…네.”
괜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 편이에요.”
“그럼 어때요, 그게 쿠도씨 매력인거죠”
그 말에는 대답을 못 했다.
음식이 나오자 테이블이 단번에 가득 찼다.
“…와. 많네요..”
“너무 많이 시킨걸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여..열심히 먹어보죠..”
writer: 추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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