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광풍속 은신처에서 보낸 2년의 기록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만 원 이하의 벌금형, 자가격리를 위반하는 이들에 대한 처벌이 강화됐다. 무단이탈 등으로 자가격리 지침을 어겨 사법처리 절차가 진행중인 사람이 70명을 넘었다는 뉴스를 보고 놀랐다.
하루 아침에 방 한 칸에 갇혀 외출은 고사하고 가족조차 만나지 못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갑갑해서, 꽃구경을 하고 싶어서 등의 이유로 자가격리를 위반하고 거리를 활개하고 다니는 이들의 이기적인 행동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급기야 전자팔찌, 손목밴드를 부착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코로나시국에 '안네'가 떠올랐다.
2차 대전의 광풍 속 은신처에서 2년을 보낸 '안네', 밖으로 나가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창 밖을 내다보는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은신처의 생활, 14살의 소녀가 키가 한 뼘이나 자라 16살의 숙녀로 성장해 간 2년의 시간동안 ,은신처에 갇혀 지내야 했던 안네, 안네는 그곳에서 무엇을 하며 2주가 아니고 2년을 견뎠을까?
'인종 청소'를 명분으로 한 나치의 광풍이 전 유럽을 휩쓸던 194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살던 14살의 평범한 소녀 안네는 이제 막 중학생이 돼 친구들과 어울려 거리를 활보하던 유쾌한 소녀였다. 그런데 1942년 7월 6일, 급작스레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가족과 함께 은신처에 몸을 숨긴다. 아버지의 잼 공장 3층 창고와 4층 다락방이 아버지가 미리 마련해 둔 가족들의 은신처, 안네는 이 곳에서 나치에 의해 발각되는 1944년 8월 4일까지 2년 동안을 숨어 지내게 된다.
아버지 회사의 공장장이었던 판 펜스의 가족 3명과 안네의 가족 4명, 그리고 치과의사 알베르트 뒤셀까지 합류해 8명이 함께 지내게 된 은신처. 좁은 공간에서 낯선 사람들과 24시간 함께 지내야 하는 은둔 생활은 얼마나 불편했을까? 창문을 여는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는 생활, 너무 답답하면 창문틈에 코를 가까이 대고 바람을 마셨다는 안네, 그것도 끝을 짐작할 수 없는 시간들이 얼마나 암담했을까? 은신처에 숨은 지 4개월여 뒤인 1942년 11월 28일 일기에 그녀는 이렇게 적고 있다.
수수께끼 놀이를 하기도 하고, 어두운 곳에서 체조를 하기도 하고, 영어와 불어로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고 즉석에서 독서토론회를 열기도 합니다
스스로를 유쾌하고 긍정적인 소녀라고 밝힌 안네는 은신처에서도 불평하기보다 모든 상황을 밝고 긍정적인 태도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언젠가 다시 찾아올 자유의 시간을 기다리며 언니와 함께 매일 불어 불규칙 동사 5개씩을 매일 외우고 영어, 라틴어를 공부하기도 한다. 책 읽기에도 몰두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했던 가장 중요한 일, 안네는 일기를 쓴다.
이 곳에서는 날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납니다. 하지만 나는 게으르고 지쳐 있기 때문에 도저히 모든 이야길 다 쓸 수는 없습니다.
이 구절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숨겨진 다락방에서 한 소녀가 아니라 세계적인 대작가가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좁은 공간, 똑같은 일상, 똑같은 사람들, 그런데 안네는 매일 도저히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적고 있다.
안네는 늘 눈을 반짝반짝 뜨고 사람들을 바라보고 사람들의 말을 듣는데 귀 기울였다. 판단 아주머니와 엄마는 왜 다투는지, 치과의사 엘베르트 뒤셀은 어떤 사람인지, 사람들의 특성과 생각, 말 어느 것 하나도 흘려듣지 않고 관찰한다.
글의 힘은 남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내가 '발견'하는 데 있다. 나의 발견에 사람들이 공감할 때 나의 글은 힘을 가진다. 일상을 자세히 관찰하고 글감을 발견해 내는 능력, 작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이 능력이 은신처에서 갇혀 사는 안네에게는 이미 갖춰져 있었다.
그렇게 써 내려간 < 안네의 일기>는 전 세계 베스트셀러 10위에 오르며 2700만 부가 팔렸다. 베스트셀러답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네의 일기>를 학창 시절을 거치며 언젠가 읽었다고 생각을 하지만, 무삭제판 <안네의 일기>를 읽은 사람들은 많지 않다. 문학사상에서 펴낸 < 안네의 일기 >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무삭제판은 기존 < 안네의 일기>에 비해 200여 쪽이 더 많다. 그러니 기존 < 안네의 일기>는 거의 반쪽짜리 일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안네의 진면목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무삭제판 < 안네의 일기>를 읽어야 한다.
반쪽 짜리 < 안네의 일기 >가 초판으로 나온 이유는 2차 대전 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빠가 안네의 일기 원본에서 문제가 될 만한 내용들을 삭제하고 출판을 했기 때문이다. 안네가 적나라하게 적어놓은 동거인들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여성으로 성숙해 가는 안네가 느끼는 페터와의 떨리는 사랑에 관한 부분들을 다 삭제하고 펴낸 탓이다.
<안네의 일기> 초판이 나온 50년 뒤 발간된 무삭제판 < 안네의 일기 >는 아무리 봐도 10대 소녀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는 깊이를 담고 있는 책이다. 때문에 한때 <안네의 일기>는 안네가 직접 쓴 게 아니라는 진위여부가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네덜란드 국립 자료 연구소에서 모든 조사를 거쳐 안네가 직접 쓴 일기임을 증명해 내기도 했다.
나는 글 쓰는 걸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엄마와 판 단 아주머니, 그 외에 많은 여성들처럼 매일 집안일만 하다가 어느 사이엔가 잊힌 존재로서 한평생을 보내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꼭 무언가를 얻고 싶습니다. 남편과 아이들 말고도 이 한 몸을 바쳐도 후회하지 않을 무언가를 말이에요.
1940년대의 시대 상황 속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가졌던 안네는 훗날 주체적인 여성으로 성장 하기 위한 노력을 은신처에서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들 가족이 2년간의 은둔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 공장의 직원인 클레이먼과 베프, 퀴흘레르가 옥죄어 오는 감시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생활을 은밀하게 뒤에서 도왔기 때문이다. 몰래 배급표를 사서 물자를 공급해 주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안네에게 넣어주기도 한다. 이들의 도움을 받아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안네는 작가의 꿈을 키운다. 전쟁이 끝나면 네덜란드 국민들의 전쟁 수기를 모집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안네는 더 열심히 일기를 쓴다. < 은신처 >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쓸 계획도 세워둔다.
내가 결국에는 이 일기장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은 키티는 언제나 참아주고 나의 주장을 끝까지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꾹 참고 견뎌 보겠다고 말이에요, 눈물을 삼키며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나의 길을 발견해 내고야 말겠어요
'종이는 사람보다 잘 참는다'라고 믿었던 안네는 좁은 공간에서 부딪히는 어려움과 고통, 전쟁에 대한 공포,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이해할 수 없는 박해 등 안네가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일기장 키티에게 털어놓는다. 안네의 마음이 거울처럼 오롯이 비쳐 드러나 있는 < 안네의 일기> 그런 와중에도 안네는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켜주는 선한 이웃들을 통해 다수 인간의 선함을 믿고 결국은 해방될 날이 다가올 것임을 간절히 기대한다.
네덜란드 전체에서 얼마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보수를 받고 안 받고는 별개로 당국에 쫓기고 있는 기독교도뿐만 아니라 유대인들까지도 숨겨 주고 있었는가를 나중에 알게 되면 누구라도 틀림없이 놀랄 겁니다 -1943.5.2
마치 친구에게 고백하듯 경쾌한 어투로 일기징 친구 '키티'에게 진심을 털어놓았던 안네, 안네는 항상 일기장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그럼, 다음에 또. 안네로부터
2년 동안 꾸준히 이어진 그 약속은 1944년 8월 1일의 마지막 일기 이후 더 이상 지켜지지 못한다. 사흘 뒤인 8월 4일, 독일의 비밀경찰 습격을 받고 은신처에 있던 8명은 모두 잡혀간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오직 아버지만 살아남았을 뿐 엄마와 언니, 안네는 모두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죽고 만다.
역사에는 가정이 있을 수 없지만 만약 살아있었다면, 우리는 훌륭한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수많은 대표작을 쓴 뛰어난 작가를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인간의 계산과는 다른 신의 뜻이 있는지, 안네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어쩌면 안네는 죽어서나마 자신의 꿈을 이룬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뚜렷한 목표 없이 그냥 타성에 젖어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기쁨을 주는 존재이고 싶습니다. 내 주위에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필요한 존재이고 싶습니다. 나는 죽은 후에도 여전히 기억되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저널리스트나 작가가 될 수 있을까요?
겨우 16년을 살다 지구별을 떠났지만 그의 일기는 전 세계를 여행 중이다. 수십 개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시대를 넘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주고 있으니,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안네의 꿈은 이뤄진 것은 아닌지...
읽을 때마다 감동을 안겨주는 책이긴 하지만 본의 아니게 전 세계인에게 '자가격리', '사회적 거리두기 '의 미션이 주어진 코로나 시국에 읽는 < 안네의 일기>는 갇혀 있는 안네의 고통을 새삼 온 몸으로 느끼게 한다. 2주가 아니라 2년을 잘 버티고 인내한 안네, 안네에게 2주의 자가격리 시간이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몸은 비록 좁은 공간에 갇혀 있으되 끊임없이 성장하기 위해 애쓰는 강건하고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 안네를 보면서 어떠한 혹독한 조건도 감히 인간의 정신까지는 가둘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여러가지 이유로 자가격리에 들어간 사람들이 내 주변에도 있다. 그들에게 바로 그 곳, 세상과 격리된 조용한 공간에서 < 안네의 일기>를 다시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반드시 무삭제판 < 안네의 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