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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전 Apr 10. 2021

영화 같은인생, 엄마가주신 인생 Key로 열었죠

-지구 반 바퀴 돌아 미국에 정착한 메러디스 빅토리호 탑승자 이지연 여사

미국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코로나가 조금이라도 잦아들길 기다린 지 8개월 여, 방송 마감시간까지를 계산하면 더 이상 미국 출장을 미룰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미국 내 변이 바이러스 증가세가 우려스럽긴 했지만 백신을 맞는 사람들의 숫자가 꾸준히 증가한다는 뉴스를 듣고 드디어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2월 28일, 걱정과 우려가 앞섰지만  한편으로는 만나게 될 인물들이 들려줄 인생 이야기에 대한 설렘과 기대를 품고 비행기에 드디어 몸을 실었다.    

 

LA 도심에서 30분 정도를 달리자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거의 45도는 될 법한 높은 경사에 롤러코스트라도 타는 양 스릴까지 느끼며 도착한 곳은  산동네 꼭대기, 왼쪽에는 그린피스 전망대가, 오른쪽으로는 LA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동네였다. 산동네의 개념이 우리나라와 미국은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 자그마한 키에 은발 파마머리를 한, 허리 하나 굽지 않은 꼿꼿한 체구의 그녀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 증언하는 올해 87세 이지연 여사

평안남도 함흥이 고향이지만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지금은 미국 LA에 살고 있는 올해 나이 87세의 이지연 여사, 그녀는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탔던 승선자이다.

  엄마 사진 한 장이 없어요, 워낙 갑자기 정신없이 헤어지다 보니... 그게 제일 안타깝죠. 


들으면 들을수록 영화 같은 그녀의 인생 이야기가 펼쳐졌다. 평안남도 함흥이 고향인 이지연 씨, 1950년 12월 , 중공군이 밀고 들어오긴 전까지 함흥은 전쟁 중에도 비교적 일상이 이어졌다. 16살 소녀 이지연은 여느 날처럼 피아노 레슨을 막 마치고 사촌과 함께 거리로 나왔다. 아버지 없이 홀로 그녀를 키우던 어머니는 교육에 각별히 관심이 많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에게 피아노, 그림 등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교육도시 함흥에서 그렇게 유별난 일은 아니었다. 일찍이 독일과 프랑스의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와 있던 함흥에서는 여성들도 학교를 다니는 것이 당연했고 다양한 교육의 혜택을 누렸다. 


그런데 바로 그날, 그녀와 사촌 둘이 피아노 수업을 마치고 나오자 성천강을 건너는 유일한 다리인 만세교를 미군들이 점령하고 통행을 완전히 막고 있었다. 밀어닥친 중공군 때문에 모든 교량을 다 통제한 것이다. 집으로 가는 길이 막힌 그녀는 당황했다. 거리에는 이미 짐보따리를 이고 지고 거리로 나온 피난민들이 넘쳐 나고  있었다. 피난길을 나선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 그녀들 앞에 운명처럼 지프차가 한대 멈춰 섰다. 그리고는 빨리 차에 타라고 재촉했다. 


그 차에 첫 발을 올리는 순간이 그녀가 새로운 운명의 수레에 탑승한 순간이었다.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에 휩쓸린 그녀는 전혀 다른 운명의 공간으로 들어가게 된다.  


차에는 한국인 통역관 한 명과 미국 군인들이 앉아 있었다. 소녀 둘은 상황 판단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차에 앉아 있었다. 차는 피난민들로 어수선하기 그지없는 거리를 지나 그녀들을 흥남부두까지 데려왔고 어떤 큰 배에 태워 주웠다. 


"도착해 보니 큰 배가, 화물선이 있는데, 아저씨 우리 집 가야 해요.


이렇게 말했죠. 그랬더니 아저씨들이


안 돼 못 가, 죽어. 이 배를 타고 꼼짝도 말고 있어야 돼. 전쟁이 나서 다리를 건너가면 죽어. 


이러는 거예요.


통역관은 미국 사람들이 있는 큰 배 관계자에게 자신들을 부탁하고 사라졌다. 사촌과 그녀는 피난민들이 배에 타기 전 제일 먼저 배에 올랐다. 그렇게 오른 배가 메러디스 빅토리호였다. 


배 위에서 오들오들 떨며 두려워하던 그들은 우선 갑판 위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굴뚝 옆에 자리 잡았다. 잠시 후 엄청난 피난민들이 배에 올랐고 배는 흥남항을 벗어나 남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인생 항로는 그렇게 느닷없이 새로운 항구를 향해 출발해 버렸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있는 따스했던 고향과는 그렇게 이별을 했다. 배는 그녀를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낯선 섬, 거제도에 내동댕이 치듯 내려주고 떠났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뱃길은 아예 끊겨 버렸다. 


어머니라는 울타리가 사라진 세상에서 16살 소녀는 홀로 거친 세상을 마주해야 했다.  그녀의 인생 2막은 그렇게 한없이 당황스럽고 막막하게, 외롭게 시작되었다.

거제도 피난민촌에서 찍은 사진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제각기 살 곳을 지정받았는데 그녀는 64 야전병원 건설을 위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고현 천막촌에 배정을 받았다. 천막촌에 있는 피난민들 중 남자들은 야전병원 건설 현장에 나가 일을 하고 여자들은 야전 병원 의사들이 기거하는 숙소에 청소를 하러 나가 일을 해서 일당을 받아 하루살이 삶을 연명했다.


먹고살 길을 찾아야 했던 그녀도 할 수 없이 청소 일이라도 하기 위해 의사들의 숙소로 간 첫날, 그녀 눈에 거실 한가운데 놓인 피아노가 눈에 띄었다. 고향에서 10년을 배우던 피아노, 


그녀는 홀린 듯이 피아노로 다가가 '다뉴브강의 왈츠'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거제도 64 야전병원에서 피아노를 치는 이지연의 모습

연주를 하는 동안은 잠시 자신의 처지를 잊고 마치 고향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피아노 선율에 빠져 열정적인 연주를 마치자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외국인 의사와 간호사들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남루한 피난민 소녀의 열정적인 연주를 인상 깊게 들은 병원 원장은 통역까지 대동해서 그녀에게 피아노를 어디에서 배웠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자세하게 묻고는 그녀가 홀로 피난을 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놀라며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다. 


'저는 학교를 가고 싶어요, 공부를 하고 싶어요.'


이것이 낯선 피난민촌에 홀로 떨어진 16살 이지연 씨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엄마의 가르침대로 공부를 계속해야 살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원장은 거제도 성당의 신부와 함께 이지연 씨가 갈 수 있는 학교를 알아봐 주었고 결국 그녀는 피난민촌을 떠나 마산 성지여고로 가게 된다. 


저는 어머니가 제게 인생 key를 준 것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을 여는 열쇠, 어릴 때부터 엄격하게 교육을 시키고 가르친 것이 결국은 제가 홀로 세상을 살아가는 열쇠를 손에 쥐어준 것이죠.


피난민촌을 떠나는 그녀에게 피아노 연주를 들었던 외국인 간호원장이 흰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이 봉투는 여고를 다니는 3년 동안은 절 때 열지 말고 소중히 보관했다가 여고를 마치고 사회를 나갈 때, 진짜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열어봐.'


이지연 씨는 그녀의 말대로 봉투를 3년 동안 소중히 숨겨두고 열지 않았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가정교사를 하며 생활비를 벌면서도 악착같이 공부를 해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마친 그녀는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막막했다. 돈도 없을뿐더러 호적조차 없었다. 고향 친구의 도움으로 호적을 만들고 돈이 없어 고민을 하던 그녀는 3년 전 간호원장이 준 봉투가 생각났다. 봉투를 열자 그 안에는 20달러짜리 지폐가 5장이나 들어 있었다. 그 돈은 그녀가 또다시 낯선 땅 서울에서 새 출발을 하는 밑천이 돼 주었다.

대학 생활 내내 제 집은 가정교사 집이었어요. 피아노를 가르치고, 공부를 가르치고, 그러면서도 악착같이 공부를 했죠. 머리 좋은 건 둘째, 인생의 첫째 비결은 성실이죠. 오직 성실한 자세로 세상을 맞서 나갔어요. 


어린 시절 엄마가 가르친 인생 교훈을 잊지 않고 하루하루 살았다. 중앙대학교 약학대학을 장학생으로 들어간 그녀는 악착같이 공부를 하고 동향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건축 디자인을 하는 남편을 따라 베트남, 태국, 영국을 거쳐 1980년도에 미국에 정착을 했다. 지금은 아버지를 따라 건축가가 된 그의 아들은 LA에서 "한국 이민 100주년 기념관" 설계를 맡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갑자기 자신 앞에 멈춰 선 지프차, 그 차에 오르면서 운명이 바뀌게 된 이지연 여사, 때문에 고향과 부모님과 헤어져 홀로 세상을 헤쳐와야 했지만 그 통역관을 원망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북한에 남게 되었다고 해도 그 후의 삶이 어디로 흘러갔을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함께 왔던 사촌도 일찍 세상을 떠나고 그야말로 혈혈단신 홀로 세상을 맞섰던 이지연 여사, 그녀는 비록 어머니와 몸은 헤어져 살았지만 한 순간도 고향과 어머니를 잊은 적이 없다고 한다. 늘 어떤 순간에나 어머니를 기억하고, 상상 속의 어머니에게 물어보며 인생의 항로를 결정해 왔다는 그녀의 유일한 소원은 단 한번 만이라도 고향에 가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갈수록 그 꿈이 실현 가능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녀는 마지막 꿈을 꾸게 됐다. 

    

우리 고향은 반룡산이 참 웅장해요, 그리고 우리 집 앞에는 버드나무가 참 많았어요. 고향 생각하고 어머니 생각하는 건, 평생, 말도 못 하죠 평생 간직하고 있어요. 나는 묘지도 안 샀습니다. 죽어서 수장을 하면 바다 물결 따라 흥남부두 가면 고향 함흥에 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제 마지막 소원이에요.


우리나라의 굴곡진 현대사를 헤쳐온 그녀의 마지막 꿈은 메러디스호를 타고, 혹은 1950년 12월 또 다른 배들을 타고 흥남부두를 떠나던 수많은 이들이 간직한, 슬프디 슬픈 마지막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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