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선이 모여 최선'이 되는 인생의 진리
살아보니 내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기회는 좀처럼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게 생의 본질인 모양이다. 간절히 원했던 것이 주어지지 않을때, 주변 상황을 탓하고 좌절하기 쉽지만 그 순간 진짜 필요한 것은 '차선'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이다.
건축가 유현준이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차선이 모여 최선이 된다'는 말이 자신의 인생철학이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전적으로 동감했다. 유현준은 유학을 다녀와서 한국에서 건축사무소를 차렸지만 직원들 월급을 주며 한 달 한 달 버티는 것조차 힘든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 지인에게서 신문에 건축에 관한 칼럼을 몇 편만 쓰라는 요청이 왔는데 원고료가 15만 원 정도였단다. 미국 유학에다 유명 건축사무소 근무 경력까지 있는 유능한 건축가에게 칼럼을 쓰는 일은 그가 꿈꾸던 최선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차선'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의외로 그 칼럼이 유현준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고 방송 출연까지 하게 되는 계기가 됐단다. 지금의 유명인 건축가를 만든 시발점은 그가 차선으로 선택한 그 '칼럼 쓰기'였다고 본인은 말한다.
비단 그의 인생만 그럴까? 내 인생도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기회는 별로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차선'이라도 늘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쪽을 선택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맞이했던 3월 2일을 잊을 수가 없다. 가야 할 곳도, 해야 할 일도 없는 하루를 처음 맞이한 것이다. 하다 못해 언제까지 제출해야 하는 과제조차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영원히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끔찍했다.
주변 친구들이 무엇을 하는지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그중 후배 한 명이 당시만 해도 도시 빈민운동이 활발하던 때라 그곳에서 공부방을 하는데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월급은 한 달에 15만 원, 최저 임금이라는 개념이 없을 때였다. 나는 일단 그곳에서 함께 일을 하기로 했다. 매일 아침 9시까지 출근해 공부방 수업까지 하고 나면 밤 9시가 돼서야 퇴근을 하는 힘든 일이었다. 공부방 일이 얼마쯤 정착되자 동네신문을 발행하는 일도 겸해서 했다. 4면짜리 신문을 만들어 배달하는 일까지 맡아서 했다. 물론 그때는 이렇게 세상 공부를 해서 언젠가는 이 이야기들을 소설로 쓰겠다는 꿈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참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았다. 일 년쯤 후 방송국에서 알던 피디가 내게 프로그램을 같이 해보자는 연락이 왔다. 그렇게 방송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방송작가로 생활하던 동안에도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순간들은 잘 오지 않았다. 나는 늘 방송으로 바쁜 작가이길 원했지만 어느 순간 방송일이 거의 끊기는 시절도 있었다. 그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가를 찾아 헤매다 브런치를 비롯해 인터넷 매체에 글 쓰는 방법을 또 찾아냈다. 자꾸만 최선이라 생각했던 길을 아쉬움을 가지고 돌아보게 되긴 했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보내기보단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그 일에는 최선을 다하는 방법을 택했다.
'최선'보다 '차선'을 선택하는 데는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하다. 최선의 순간이 가져올 영광의 순간보다 남루함을 견뎌내야 한다. 그러나 마냥 최선의 순간만을 꿈꾼다면 어쩌면 어떤 시작도 할 수 없을지 모른다. 차선을 선택하고 두려움 속에서도 그만두지 않고 한발 한발 앞으로 내딛는다면 그 길은 어디선가 다른 길로 이어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처음 길을 나설 때 기대했던 '최선'과도 맞닥뜨리는 행운이 간혹 주어지기도 한다.
올 한 해도 수많은 '차선'을 선택하며 달려왔다. 골인지점에 이르러 돌아보니 '최선'을 기다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 '차선'을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한 것이 한결 의미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 인생에서 진짜 필요한 것은 '차선을 선택할 용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