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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전 May 16. 2022

죽음은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야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던 중 친구의 부고를 받았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일이기에 길을 가다 뒤통수를 심하게 얻어맞은 듯 삶이 휘청 했다. 장례식장 영정 사진으로 만난 친구는 평소처럼 순하면서도 따뜻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장례식장에선 모든 상황들이 비현실적이어서 어느 하룻밤의 꿈인 듯 몽롱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이 돼도 그 꿈은 깨어나 지지 않았다.     


돌아와 시간이 좀 지난 후 이어령의 책을 다시 펼쳤다. 이 책은 인터뷰어로 유명한 김지수 기자가 암을 선고받고도 모든 치료 중단을 선언한 이어령 선생을 매주 화요일 만나 나눈 대담들을 기록하고 있는 책이다. "병원 들락거릴 시간에 글 한자라도 더 쓰고 죽자"라고 결심할 정도로 글쓰기가 소명이었던 사람, 글을 쓸 수 없는 순간이 오자 각혈을 하듯 말로라도 유언처럼 그가 남기고 싶어 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이어령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이야기로 죽음의 공포를 대신 설명한다. 최초로 죽음학을 하며 죽음에 대한 강의를 많이 했던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그러나 그도 자신이 암에 걸리고는 다가오는 죽음을 감당하기 힘들어했다고 한다. 기자가 엘리자베스 퀴블러에게 그 이유를 묻자 그의 대답은 이랬다.


"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타인의 죽음이었어. 동물원 철장 속에 있는 호랑이었지.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철창을 뛰어나온 호랑이가 나한테 덤벼들어. 전두엽으로 생각하는 죽음과 척추 신경으로 감각하는 죽음은 이토록 거리가 멀다네."


죽음학을 해 온 정신과 의사조차 두려움에 떨게 하는 죽음, 매일 밤 철창을 뛰쳐나온 호랑이와 씨름하면서 이어령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지능과 덕으로 최선을 다해도 우리는 다가올 운명을 바꿀 수 없네. 데카르트처럼 모든 것을 회의하면서 끝까지 가도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과 만나게 돼. 합리주의의 끝에는 비합리주의가 있지... 그리스에서 말하는 운명론이란 힘껏 노력하고 지혜를 끌어모아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는 거야..... 지혜자만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네."


그래, 고개가 끄덕여졌다. 친구의 부고도 합리주의의 끝에서 만난 비합리주의였고,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혜롭고자 한다면 그 사실을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운명 앞에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어야 하는가?


"결정된 운이 7이면 내 몫의 3이 있다네. 그 3이 자유 의지야. 모든 것이 갖춰진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 그게 설사 어리석음일지라도 그게 인간이 행사한 자유의지라네.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수만 가지 희비극을 다 겪어야 만족하는 존재라네."


누구보다 치열하게 매 순간을 살아낸 이어령이 말하는 운명론은 왠지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운명론 뒤에 남은 3의 자유의지는 위안이 됐다. 그러니까 우리 삶은 그 3이 전부인지 모른다. 결국 3을 어떻게 살아내느냐가 인생을 결정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자유 의지로 어쩌면 겪지 않아도 될 수만 가지의 희비극을 다 겪으며 살아가는 내 인생의 몫'3'. 그것을 이어령 선생은 어떤 자세로 살아왔을까?


" 나는 평생 누굴 보고 겁을 먹은 적이 없어. 헤겔, 칸트도 나는 무섭지 않았어. 나는 내 머리로 생각했으니까.... 그 사람만의 생각, 그 사람만의 말은 그 사람의 얼굴이고 지문이야. 용기를 내서 의문을 제기해야 하네. 간곡히 당부 하네만, 그대에게 오는 모든 지식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지 말게나."
"뜬소문에 속지 않는 연습을 하게나. 있지도 않은 것으로 만들어진 풍문의 세계에 속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 진실에 가까운 것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네. 그게 싱킹 맨(thinking man)이야."

 

숙명적으로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살아가며 끊임없이 질문했던 이어령.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스스로 생각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자로 사는 그의 삶은 늘 외로웠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이 아무개가 외롭다니 우리가 찾아가서 좀 도와줍시다'그래. 오해하지 마시게. 그건 남이 도와줘서 없어질 외로움이 아니야. 다르게 산다는 건 외로운 거네. 그 외로움이 모든 사회생활에 불리하지만 그런 자발적 유폐 속에 시가 나오고 창조가 나오고 정의가 나오는 거지."


평생을 올곧은 싱킹 맨(thinking man)으로 살아온 그는 시인이자 작가이자 교수이자 문화기획자이자 시대의 지성이었다. 그런 그가 마지막 숙제 '죽음'의 고찰을 통해 얻은 답은 무엇이었을까?

  

"신나게 애들이랑 놀고 있는데 불쑥 엄마가 부르는 소리를 듣는 거야,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 이 쪽으로, 엄마의 세계로 건너오라는 명령이지. 어머니 곁 , 원래 있던 모태로의 귀환이야."


철창을 뛰어나온 호랑이와 마주하고 두려워했던 정신과 의사와 달리 이어령은 죽음 앞에서조차 싱킹 맨의 자세를 잃지 않고 자신만의 언어로 죽음을 재해석한다. 그것이 이렇게 따스한 해석이라니..."엄마가 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 그게 죽음이야." 이게 대체 뭐냐고 이렇게 황당한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니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라는 거냐고 하늘을 향해 삿대질이라도 하고 싶던 친구의 부고가 온통 절망스럽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친구도 엄마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던 것일까?   


"내가 느끼는 죽음은 마른 대지를 적시는 소낙비나 조용히 떨어지는 단풍잎이에요. 때가 되었구나. 겨울이 오고 있구나... 죽음이 계절처럼 오고 있구나. 그러니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돌려주려고 해요. "


이 책은 그의 번쩍이는 지성이 남긴 마지막 선물이다. 김지수 기자는 대화를 나누는 이어령 선생을 보며 이렇게 표현했다.


<그와 대화를 나눌 때면 그의 시한부 삶이 그의 입술 끝에 매달려 전력 질주하는 것 같았다.>
<멘토나 롤 모델, 레퍼런스가 아니라 정확하게 호명할 수 있는 스승이 곁에 있다면 우리는 애틋하게 묻고 답하며 이 불가해한 생을 좀 덜 외롭게 건널 수 있지 않을까.>


불가해한 생....이라는 말이 가슴을 저며왔다. 나의 생을 포함하여 모두의 생은, 살아갈수록 얼마나 불가해 한지. 그저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저자는 이어령이라는 스승을 만나 대화하는 시간이 외롭지 않고, 달콤한 꿈같은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책에는 이어령의 번뜩이는 지성으로 재해석한 삶과 죽음, 고통과 예술에 대한 명문장들이 숱하게 들어 있다. 머릿속에 오롯이 기억하고 싶지만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은 나는 자주 이 책을 펼쳐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삶에 지쳐 일어나기 힘들 때, 인생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 펼쳐보면 그때마다 이어령 선생은 88년을 오롯이 싱킹 맨으로 살고 깨친 삶과 죽음에 관한 그만의 독특한 삶의 지혜를 들려주실 것 같다.

"나는 이제부터 자네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네. 이 모든 것은 내가 죽음과 죽기살기로 팔씨름을 하며 깨달은 것들이야. 어둠의 팔목을 넘어드리고 받은 전리품 같은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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