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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전 Dec 20. 2024

비수기에 떠나는 유럽여행

3편. 오르세의 역설, 19세기 살롱전 낙선작이 명작입니다.

파리 '세느 강'은 그 이름만으로도 낭만적이고 아련한 감성을 자극한다. 어쩌면 그건 젊은 시절 해외여행이 쉽지 않던 우리 세대가 오래도록 영화에서나 문학작품 속에서만 세느 강을 접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느강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른다
우리의 사랑이 흐르듯
....
인생은 얼마나 지루하고
희망은 얼마나 격렬한가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 기욤 아폴리네르 < 미라보 다리> 중


늦가을 세느강변


이제 공식적인 표기법상 '세느강'이 아닌 '센강'이 맞는 표현이라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세느 강'이 익숙하고 낭만적이다. 마로니에 가로수가 열병하듯 늘어서 있는 강변을 따라 걷다가 영화 <퐁네프의 다리>로 유명한 퐁네프의 다리도 걸어서 건넜다. 11월 중순의 날씨가 제법 쌀쌀한데도 강변을 따라 마라톤을 하며 뛰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면 세느 강은 생각보다 폭이 너무 좁아서 놀란다. 한강의 폭은 900미터에 달한다고 하는데, 세느강의 폭은 50미터라고 하니, 우리 기준으로 보면 작은 하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이 작은 강은 그 자체로도 세계 문화유산이면서 주변에 수많은 뛰어난 건축물들을 품고 있다. 노트르담 성당을 비롯해 루브르 박물관과 오랑주리 미술관, 퐁피두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이 전부 세느 강 주변에 걸어서 이동이 가능한 거리에 있다.


파리에 머무는 시간이 한정돼 있는 관계로 여행 계획을 짜면서 세느 강 주변에 있는 많은 뮤지엄과 미술관 중에 어느 곳을 가 볼까, 고민이 많았다. 고민 끝에 선택한 곳은 오르세 미술관과 오랑주리 미술관 두 곳이었다.


오르세 미술관 투어, 4시간도 부족해


프랑스 국립 미술관인 오르세는 19세기 작품들을 많이 소유한 갤러리로 유명하다. 7년 전 파리 여행에서는 가이드 없이 그냥 둘러보았던 곳인데, 이번에는 제대로 공부를 좀 하기 위해 현지 가이드 투어를 신청했다.


현지 가이드 투어는 자유 여행을 하는 이들이 선호하는 프로그램이다. 자유 여행자들이 프로그램과 시간을 보고 신청을 하면 현지에 있는 가이드들이 나와서 한 장소나 지역의 문화 해설을 집중적으로 진행하는 형식인데, 가이드들에 따라 문화 해설의 수준이 다소 차이가 나기도 한다.


그런데 여행 스케줄을 짜면서 보니, 인기가 많은 유명 현지 가이드들의 경우 11월은 여행 비수기라 아예 프로그램 진행을 하지 않는다는 공지를 하고 휴가를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 때문에 가이드 투어 종류가 성수기에 비해 줄어서 시간을 맞추기 좀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이런 부분은 어차피 비수기 여행을 선택했으니 내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오르세 미술관 투어는 미술관 정문앞 코끼리 상에서 오후 1시에 만나는 것으로 시작됐다. 우리 부부를 포함해 프랑스 지역을 자유 여행하는 7명 정도의 한국인들이 신청을 해 모였다. 각자 수신기를 하나씩 받아 이어폰을 장착했다. 이렇게 이어폰을 끼고 있으면 박물관 안에서 가이드가 속삭이듯 말하는 소리도 이어폰으로 선명히 전달된다.


미술관으로 들어서면 처음 맞이하는 풍경은 아치형의 높은 천장이 둘러싸고 있는 일종의 복도 같은 넓은 공간이다.


미술관이 이런 형태를 갖춘 이유는 원래 이곳은 1900년 만국박람회 당시 증기 기관차가 들어오도록 설계된 기차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후 기차의 크기가 커지면서 역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방치되다가 이 건물 사용을 둘러싸고 여러 의견들이 충돌했다.


그중에는 이 건물을 철거하자는 의견도 상당수였다. 그런데 1986년 철거 대신 미술관으로 변신을 해 재탄생을 하게 되었고, 도시 재생의 성공 사례로 남게 되었다. 산업용 시설인 기차역에서 미술관으로의 변신, 이런 선택도 예술의 도시 파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우리나라의 1층에 해당하는 오르세의 0층은 유리 천장과 유리창으로 둘러싸인 사방에서 자연의 빛이 스며들어 따스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가운데 복도 곳곳에 아름다운 조각상들이 놓여 있다. 조각상들 양쪽으로 여러 방들이 있는데, 방들마다 각기 다른 그림들이 전시 돼 있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많은 작품들을 이 미술관 한 곳에서 상당수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고흐와 고갱과 르느와르와 모딜리아니, 마네와 모네의 작품들, 마음만 먹으면 입장료 몇천 원을 내고 이런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는 파리 시민들은 얼마나 축복일까?


19세기 살롱전, 낙선작이 지금은 명작입니다


우리 투어팀이 처음 방문한 방은 밀레의 방이었다. 원작으로 보는 <밀레의 이삭 줍기>는 교과서의 작은 그림으로는 볼 수 없었던 감동을 느끼게 해 주었다.

밀레의 이삭줍기

그동안 이 그림을 볼 때는 이삭을 줍는 세 여인만 눈에 띄면서 평화로운 농촌의 그림을 그린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원작으로 자세히 보니 뒤편에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커다란 노적가리가 확연히 눈에 띈다. 말을 타고 수확을 감독하는 지주도 보인다. 지주가 낮동안 본격적인 수확을 해 많은 곡식을 거둬들인 뒤 어스름녁에야 세 여인은 수확을 마친 빈 들판을 돌며 떨어진 이삭을 줍고 있다.


자세히 보면 여인의 손도 거칠어 많은 노동을 해 왔음을 짐작하게 한다. 배경이 되고 있는 지주와 비교해 보면 겨우 몇 개의 이삭을 소중하게 들고 있어 여인들이 처한 현실이 더 처절하게 느껴진다. 농촌 출신인 남편은 어릴 적 고향에서도 수확할 자기 논이 없는 사람들이 수확이 끝나면 곡식을 주우러 다니는 이런 풍경을 많이 봤다고 한다.


당시 그림은 주로 돈 많은 귀족들이 화가에게 돈을 주고 자화상이나 영웅담의 그림을 의뢰해 그리게 하던 시기인데, 밀레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런 그림을 그렸으니 그것만으로도 혁명적이라고 평가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오르세 미술관에서 이렇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밀레도 당대에는 평가받지 못하는 예술가였다고 한다. 19세기 파리 미술의 주류는 살롱전이었다. 예술이 곧 삶이었던 도시, 파리에서 살롱 전이 열리면 관객이 100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무명작가들의 유일한 등용문이었던 살롱전의 심사를 맡은 사람들은 당대의 주류 화단의 관계자들이었다. 그들의 시각은 당대에 갇혀 있었고 젊은 화가들의 신선한, 혹은 새로운 시도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밀레도 몇 차례나 살롱전에 낙선했다. 드가나 모네 같은 화가도 번번이 살롱전에 낙선했다. 화가들의 반발이 너무 거세자 낙선작들에게 전시할 기회를 주는 낙선전이 열리기도 했다. 모네의 <풀밭 위의 식사>는 낙선전에서 오히려 주목받은 작품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지금은 당시의 낙선작이 오히려 명작이라 평가받으며 오르세의 중심자리에 걸려 있다. 시대의 걸음은 느렸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화가들의 걸음은 빨랐던 것이다


마치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농촌의 풍경을 정밀하게 묘사한 니베르네의 쟁기질(1849년작)도 인상적이었다.

니베르네의 쟁기질

여성이 화가로 인정받기 어려웠던 19세기, 바지를 입고 남성처럼 행동하면서 화가로 활동했다는 니베르네는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을 가지고 평생 동물들을 세심히 관찰해 그림으로 남겼다고 한다.


세잔의 정물화를 보고 싶었지만 다른 나라의 미술관으로 출장 전시 중이어서 보지 못했다. 가난했던 당대의 화가 대신 그들이 남긴 작품은 지금, 값을 매길 수 없는 특급 대우를 받으며 세계 여행 중이다.


평생 한 점의 그림 밖에 팔지 못했다는 불멸의 화가 고흐는 마지막 시기 자신을 돌봐준 가세박사에게 치료비를 낼 돈이 없어 '가세 박사의 초상화'와 '오베르의 성당' 등의 그림을 남긴다.

고흐, 오베르의 성당

고흐 그림 가운데서도 가장 비싼 축에 든다는 가세 박사의 초상화, 그때 고흐 그림을 받은 가세 박사는 이 그림의 가치를 알아봤을까? 그림은 훗날 가세 박사의 자녀들이 오르세에 기증하면서 오르세에 걸릴 수 있었다.


원작의 아우라가 주는 감동과 가이드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여러 층을 오르내리며 4시간여 동안 작품을 감상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원래는 오늘 하루 오르세 미술관을 보고, 모네의 수련으로 유명한 오랑주리 미술관도 볼 계획이었지만 오전에는 파리 중심을 걷고 오후에 오르세 투어를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쳐 오랑주리 미술관을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오르세 미술관의 사진 포인트


그런데 유럽에서 가장 큰 미술관이라고 하는 오르세 미술관은 4시간을 걸어 다녀도 대표적인 작품들을 겨우 둘러본 정도에 불과하다. 이 미술관이 소장한 총작품수는 250만 점, 회화만 해도 5천 점이 넘는다고 하니 몇 시간만으로 완전정복은 애당초 꿈꿀 수 없는 일이다.


오르세 미술관에 오면 빠질 수 없는 명소가 5층에 있는 시계탑이다. 시계탑은 5층으로 구성된 오르세 미술관 모든 층에서 보이지만 사진을 찍으려면 5층으로 가야 한다. 거대한 시계탑 앞에서 찍는 실루엣 사진이 오르세 미술관의 사진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게 인상적인 것은 시계탑 너머로 보이는 몽마르트 언덕이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지금은 이곳에 그림이 걸린 화가들은 대부분 몽마르뜨 언덕에 살았다. 파리 외곽의 나지막한 언덕 몽마르뜨, 집값이 쌌던 그곳에 정착에 살면서 그들은 파리의 중심, 이곳으로의 진출을 수없이 꿈꾸었을 것이다.


오르세미술관 창으로 보이는 몽마르뜨 언덕

그들의 꿈이 실현되기까지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부분은 그들이 떠난 뒤에야 비로소 그들의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그들은 그 오랜 무명의 시간들을, 좌절의 순간들을, 때론 멸시를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겨울이면 오후 4시 반 정도만 돼도 해가 지는 파리, 어느새 밖은 깜깜하다. 내일은 오르세 미술관에 그림이 걸린 화가들의 가난한 시절 보금자리 역할을 했던 몽마르뜨 언덕을 둘러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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