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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마: 어떻게 여행할 것인가

Recharge 14일 차: 교황 알현 > 로마 도보 여행

by Chuchu Pie
전화기가 제멋대로 공장 초기화되는 바람에 미처 백업하지 못했던 지난 5일간의 사진이 (영원히)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예쁜 사진들이 눈에 아른거려 무기력해졌다. 아내가 간간히 찍은 사진이 조금 남아 있지만, 이번 여행에서 사진을 맡은 나의 폰에 저장되었던 수 백장에 비할 바 아니다.

즐거웠던 여행에 갑자기 드리워진 상실감과 우울함을 떨쳐내기 어려워 약 한나절 동안 방황했다. 고작 그깟 멍텅구리 전화기 하나 때문에 남은 여행마저 망칠 수는 없다, 고 정신 차리기까지는 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Recharge 14일 차"는 바로 그 잃어버린 5일 중 첫째 날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5일간의 모든 사진은 조금 남아 있던 아내의 작품(?)들이다.


니 마음대로 사세요.


언젠가 유시민 작가가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 말이다. 물론 위와 같이 '츄츄파이화' 되어버린 건방진 말투가 아니라, 훨씬 더 겸손하지만 깨달음이 가득 담긴 말투였다.


작가가 직접 쓴 개인 이야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에 훨씬 더 자세히 나오지만, (내 마음대로)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인간의 삶은 크게 두 가지 성질로 만들어진다. 바로 본성개성이다. 그 자신의 본성과 개성을 마음껏 표현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별 거 없다.


그중 본성은 다시 본능, 사랑, , 그리고 연대(나눔) 네 가지로 나누어진다. 말 그대로, 놀고먹는 본능에 충실하는 것, 사랑을 주고받는 것, 열심히 무엇인가를 위해 일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고 나누는 것 이렇게 네 가지다. 누구나 이 네 가지 본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개성은 이 네 가지 본성을 어떻게 분배하느냐이다. 사랑을 더 많이 나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놀고먹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다. 일과 성공에 집착하는 것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눠주는 것도 다 개성이다. 그렇게 내 마음대로 나만의 개성을 십분 표현하며 살다가 가는 것이다.


즉, 잘 사는 것이란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다.

굳이 (엄청 촌스러운) 도표로라도 표현한 것은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볼 수 있다


복잡한 삶을 어쩜 이렇게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을까 감탄했다. 역시 매력적인 지성인임에 분명하다. 기회가 된다면 쏘주 백 잔 나누고 싶은 형님이다.




내 앞에는 한 호텔 여직원이 지도를 펼쳐 들고, 로마는 어떻게 여행하면 되는지 볼펜으로 그림까지 그려가며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이때쯤 생각난 게 바로 위 유시민 작가의 인터뷰였다. 왜 불현듯 이 인터뷰가 생각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아무리 일이라지만, 일면식 없는 관광객에게 이렇게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직원에게서 "연대/나눔"의 향기를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면, 너무 억지인가!


기왕 억지 부려버린 김에 조금 더 나아가, '여행은 인생과 닮았다'는 클리셰한 방정식에 유시민 작가의 '잘 사는 방법'을 대입해봤다. 그렇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어떻게 여행할 것인가"로 치환해 생각해보면;


본능: 재밌게 놀고, 맛있는 거 먹고, 편하게 자고,
사랑: 감탄하고, 사진으로 담고, 소중히 추억하고,
일/성취: 산 정상도 오르기도 하고, 막차에 가까스로 뛰어오르기도 하고, 새로운 액티비티에 도전도 하고,
연대/나눔: 그런 경험과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훗날 다른 여행객을 위해 기록하고 나누는 것.


... 쯤 되려나.


묘하게 잘 들어맞네, 브런치에 꼭 써야겠어! 란 생각도 잠시. 지금의 우리 가족 여행은 연대/나눔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 시작했다. 놀고먹고 자기 사진만 소중히 여기는 이기적인 여행. 그리고 그 사진 쪼가리 좀 없어졌다고 정작 소중한 시간은 투덜거리며 보내는 그런 미련한 여행. 그게 개성이라면 그 개성이 부끄러워졌다. 여행하는 법이 틀려 먹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어차피 올릴 사진도 별로 없는 김에) 연대와 나눔을 실천하고자, 그 호텔 여직원이 침을 튀겨가며 추천했던 로마 산책 코스를 소개한다. 쓰고 보니 이것도 뭔가 억지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


걷기만 하면 약 한 시간 반이 소요될 테지만 이것저것 보다 보면 하루 코스로 아주 딱이다. 사진 명소와 쇼핑, 그리고 먹거리가 조화로운 코스다.


단, 모두에게 적합한 코스는 아닐 수 있다. 매 10미터마다 장난을 일삼다가 칭얼대기도 하는 변덕쟁이 9살짜리 꼬마와 웬만한 질문에는 단 두 마디만을 사용해 답할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의 사춘기 소녀가 있고, 쇼핑의 거리만 나오면 에너지가 무한 리필되는 아내와 반대로 쇼핑의 거리에만 들어서면 방전되는 남편이 있는 4인 가족이라면, 고려해볼 만하다.




14일 차 여행 일지

교황 프란치스코는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매주 일요일에 바티칸 시국 광장에서 삼종 기도 (angelus)를 올린다. 교황님의 1년 일정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참 바쁘실 것 같아 안쓰러운 마음도 있다. 오늘이 때마침 일요일이라 교황님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줌으로 최대한 당겨도 저기 보이는 것이 교황님인지 마네킹인지 구분이 안 될 거리였지만.


나 같은 경우 종교가 없으니 크게 아쉬울 것도 없었지만, 독실한 천주교 신자여서 꼭 가까이서 보고 싶다면 최소한 한 시간 전 (오전 11시)에는 도착하시기를 추천한다.


교황님이 마침내 창문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무슨 락스타 공연처럼.


점심에는 어제저녁 식사를 먹고 감동했던 RIONE XIV에 다시 갔다. 일요일에는 저녁 영업을 안 한다고 해서 점심때 쳐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만석. 어제의 감동의 우연이 아니었다. 디저트로 먹은 티라미슈를 떠올리면 아직도 입안의 혀를 타고 침이 줄줄 흐른다. 뒷마당 놋그릇에 담긴 잡탕밥을 핥아먹는 누렁이 마냥 촵촵댔다.

가운데 사진에 얼핏 그 13일 차에 이야기했던 '남편'분이 보인다. 무릎 굽혀서 미스코리아 인사하시는. 사진 속 모습이 마침 그 찰나 인지도 모르겠다.
오른쪽에 그 '문제'의 티라미슈가 보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애들에게 밀려 두 스푼 밖에 못 먹었다.


걷다가 너무 더워서 (줄곧 35도를 넘는 찜통더위였다) 트레비 분수에 이르렀을 때쯤 맥도널드를 찾았다. 맥도널드는 정말 너무 오랜만에 가보는 거라, 자동 주문 시스템도 처음이었다. 마치 <백 투 더 퓨쳐>에 나올 법한 한 장면처럼, 미래의 맥도널드에 들어와 온갖 과거 티(?) 혼자 다 내고 왔다.


약 2,000년이나 된 고대 건축물 판테온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기진맥진해 있을 때였다. 둘째는 이때부터 계속 칭얼대기 시작했고, "오늘은 구체적인 계획이 없으니 그냥 쉬자!"라고 했던 말에 책임지지 못한다고 가족에게 엄청나게 구박을 받았다. 그 소동 속에 평온한 단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첫째. 다름이 아니라 피사의 한 책방에서 구매한 <Twilight>의 클라이맥스 부분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따로 읽어 봤는데 바지에 손을 집어넣는다는 둥 '난해한' 표현들이 나와 그냥 책을 덮어 버렸다.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했다. 무조건 눈과 귀를 막아야 할 일인지, 적극적으로 설명해야 할 일인지, 그냥 나 몰라라 할 일인지. 로마 한복판에서 뜬금없이 성교육이 걱정되어 생각이 복잡해졌다.


역시 '나 몰라라'가...

칭얼대는 둘째와 대화를 시도해보는 나. "사진 찍는다" 한 마디에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웃었지만, 둘째는 꿋꿋이 굳은 표정이다. 역시 아이들은 가식적이지 않다.


나보나 광장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왼쪽에 보면 내가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다. 4대 강을 표현한 조각들을 여러 각도에서 찍었다. 그렇게 찍은 (멋진) 사진들을 날려버린 것이다!


이탈리아라면 젤라토! 우리나라에서는 더운 여름밤 느지막이 나와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 딴다면, 이탈리아에서는 더운 여름밤 느지막이 나와 젤라토를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 밤늦게 문 연 가게들은 죄다 젤라토 가게라고 한다. (반대로 아침에 보니, 문 닫은 가게는 죄다 젤라토 가게였다)

의도치 않게 다양한 표정으로 먹게 되었다. 다양한 생각들을 하고 있었을테다.


관광 코스를 다 지나고, 숙소가 가까워져도 곳곳에 둘러볼만한 곳이 끊이질 않았다.




쓰고 보니,

사실 즐거운 여행 도중 떠올린 이야기이기 때문에, 개성 운운한 것은 현실의 진짜 삶을 힘들게 하는 복잡한 요소를 너무 쉽게 배제하고 밝고 희망적인 면에만 눈길을 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의 개성을 표현하고 싶지만, 여러 주어진 환경과 제약으로 인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너무 어둡게만 생각할 것도 아니지만, 어둡다고 보이지 않는 척해서는 안 될 일이다.


본능, 사람, 일, 그리고 연대 사이에, '인내'나 '희망'이 낄 자리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 네 개만으로는 힘들고 괴로운 삶을 표현할 수가 없어요."
"니 마음대로 하셔요."


... 하고 한 잔 쭉 들이켜는 상상을 갑자기 해봤다. 시민 형님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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