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겨울
그때만 해도 내겐 긴 겨울이었다.
진통제를 먹어도 통증수치가
가라앉지 않아서 동네 병원에 가
진통제 중에 제일 강한 주사를
놔달라고 했다.
서울대병원 교수가 너무 많이
아프면 참다가 이가 깨질 수 있으니
동네병원이라도 가 통증환자라고
말하고 모르핀 주사를 놔달라고
하시면 놔주실 거라고 하셨다.
고통이 심할수록 죽고 싶었다.
'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내가
죽어야겠구나'
하루에도 수십 번 생각했다 그렇게
나쁜 마음도 먹었었다.
수원에서 제일 큰 대학병원에서
진통제 처방외엔 특별히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이미 여러 번의 수술도 했는데
차도는 미비했다.
서울대병원 <최은주> 교수님을
만나기 전까진,, 난 진통제 없인
하루도 살 수 없었다.
하루에 세 번, 많게는 네다섯 번씩
암환자들이 먹는 서방정을 먹었다.
<부작용:
장천공, 탈모, 생리 끊김. 간기능
악화등>을 설명해 주시고
진통제를 처방받았다.. 부작용이
많은들,, 고통이 심하니 약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절망 끝에서 시를 썼다
그냥 40대 젊은 나이에 이러다
죽긴 뭔가 억울해서
나를 남길 목적으로,,
나의 흔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행복할수록 자꾸 눈물이 나는 건
긴 겨울을 통과했기에
내게도
봄이 다시 찾아오고 꽃이 피었기
때문일 것이다..
40대의 나는 고통 속에서 살았고
60대의 나의 어머니는 희생 속에서
살아오셨다.
집안에 환자가 있다는 건
혼자만의 시간이 아니다.
가족 모두의 시간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환자는 사실 모른다. 본인의 시간이
멈추어 있기에 본인이 가장 슬픈
영화 속 가련한 여주로 살기 때문이다.
내고통이 너무 커서.. 나 역시 그랬다.
그러다 뒤돌아 보니
내 가족도 나도 인해 아파하고 있었다.
힘들어하고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둘째 아들, 담임선생님께
전화가 오셨다.
"어머니,
혹시 집에 무슨 일 있나요?
아이가 밝은 아이인데 요새 좀
우울해 보여서요 어디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친구들이랑 쉬는 시간
마다 축구하던 친구가 교실에서
엎드려만 있고 해서..."
선생님이랑 통화를 하며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있다.
선생님도 내 이야기를 듣고 같이
우셨다.
"어머니, 힘내세요"
중학교 3학년 큰아들은
지방에서 컴퓨터 하다 자는 편인데,
어느 날부터,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다 거실 소파에서 잠들기
시작했다 깨워서 방에서 자라고 해도
대답만 하고 자꾸 소파에서 잠들었다.
둘째애가
"엄마, 형이 왜 소파에서 자꾸 자는지
혹시 알아?"
"그러게.. 소파 불편할 텐데 형이
사춘기가 온 건지 말도 안 들어."
"그거, 엄마 지켜주는 거래!"
순간 억장이 무너졌다.
한쪽 다리가 마비가 와 거동이
불편한 나는,, 화잘실 가기가 어려워
거실 화장실 쪽에 이불을 피고 생활
했다..
큰 아인 그게 안쓰러웠던 거였다.
그래서 엄마랑 함께 자주고 싶었던
거였다.
연타로 아이들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난 결심했다.
' 더 이상 무너지는 모습 보이지 말자.
내가 무너질수록 내가 사랑하는
가족도 무너지니,,.. 정신 차리고
수렁에서 나와야지 인영아!'
진통제에만 의지했던 무력했던 나는
조금씩 수렁에서 뭍으로 나오기
위해 노력했다.. 찡그리고 아파하는
모습이 아닌 아이들 앞에서만큼은
예전처럼 웃어주는 엄마가 되어
주려 노력했다.. 나로 인해 고생하는
부모님께도 밝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행복한 일을 찾아서 하면
마음의 그늘도 힐링이 될 거 같아
내가 제일 좋아했던 게 뭐가 있지?
난 어떤 일을 할 때 제일 행복했지?
생각했다..
14살 나는 그림 잘 그리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림 그리고 글 습작할 때마다
상도 타고 담임 선생님이 소질 있다고
칭찬해 주셨다.
내성적인 내게,, 친구들이 관심을
보이고 같이 놀자고 했다.
그때 그 시절이 내가 제일 반짝이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먼저 글을 쓰기 시작했고 애들이
고등학교 졸업한 뒤에 그림도
시작했다.
내가 행복해하는 일을 찾아 해서
일까?
진료날 병원에 가니 교수님이,
"인영 씨 많이 밝아진 거 같아요
통증 수치도 많이 줄으셨네요
약 줄이셔도 될 거 같아요!
축하드려요!!"
친정엄마는 교수님 손을 잡고
몇 번이고 "감사합니다! 선생님"
고개를 숙였다.
"인영 씨가 많이 힘들었을 텐데
잘 버티어 주셨죠. 시술도 그렇고
독한 약들도 그렇고.."
통증약이 줄어든 날
우리 가족은 다 같이 모여 파티를
할 정도로 모두 좋아했다.
두 녀석은 나를 꼭 안아 주었다.
늘 묵묵히 있던 남편도 내게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장모님도
애 많이 쓰셨어요. 감사합니다"
라고
내 병은 완치가 안된다.
신경병증인지라 통증 수치를 줄일 뿐
언제 다시 아플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지금 이 순간 오늘을
감사하며 살아 나갈 것이다..
한번 고통 속에서 헤어 나왔던 내가
아닌가! 그때처럼
죽고 싶다고 하며 '자살'이라는
끔찍한 단어를 품고 살진 않을 것이다.
자살을 반대로 거꾸로 읽으면
살 자로 읽힌다.
나는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오래오래,
나의 꿈을 업그레이드하며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다.
내 삶을 포기했다면...
내 꿈에 도전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반짝이는 인영이는
없었을 것이다.
내 건강함과 나의 꿈은
내가 이룬 것이 아닌 우리 가족이
함께 이룬 아주 달콤한 열매임을
나는 안다.
그래서 더 많이 감사하고
더 많이 사랑하며 그렇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