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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Apr 19. 2020

7월 24일, 52일 차, 피렌체

사기마저 예술 같은 도시, 피렌체입니다

오늘도 로마의 아침이 밝습니다. 더위에 설친 잠에서 깨어나 다음 여정을 위해 준비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캐리어를 연 순간에 중대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더 이상 캐리어에는 입을 옷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죠. 요 며칠 강렬한 더위를 헤치며 이탈리아를 돌아다닌 결과, 모든 옷이 땀에 절어서는 지퍼백에 담겨 있습니다. 다른 때보다 겉옷이 동나는 속도가 빨라서 설마 모든 옷이 빨랫감으로 바뀌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지퍼백에 넣어 놓은 옷은 며칠이 지났음에도 땀에 젖은 채였고, 그 옷을 다시 입을 엄두가 도무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옷인 잠옷을 입고, 눈 뜬 자리에서 그대로 빨래방을 찾아가기로 합니다. 포장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울퉁불퉁한 언덕길을 캐리어를 끌고 힘겹게 올라가며, 마지막 남은 잠옷마저 땀에 저는 것에 불안감이 엄습해 옵니다.

 로마 거리의 아침 풍경

지도를 따라 찾아간 세탁소는 한 중년의 남성이 운영하는 작은 세탁소입니다. 손님인 제가 들어와도 시선 하나 마주치지 않고 묵묵히 옷을 갤뿐입니다. 어쨌거나 세탁이 급했던 저는 비치된 세탁기를 돌리고자 했고, 곧 동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꺼려지는 마음을 뒤로하고 중년의 남성에게 혹시 지폐를 동전으로 바꿔줄 수 없냐고 물어봅니다만, 고개 하나 돌리지 않고 wait라고 딱 한마디를 외칠뿐입니다. 그러고는 하던 일을 마저 다 하고서야 동전을 교환해줍니다.


뭔가 화난 일이 있는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자기 할 일만 하시는 세탁소 주인을 영 껄끄러워하며, 저는 세탁기를 돌려보려고 어떻게든 애를 써봅니다. 이탈리아어로 쓰인 설명서를 이해하지 못해서 제가 끙끙거리고 있자, 세탁소 주인이 제 뒤로 와서 말없이 버튼 몇 개를 눌러주고 다시 할 일을 하러 갑니다. 어떻게든 세탁기를 돌리는 데 성공한 저는, 건조기까지 돌려야 하므로 이 오랜 시간을 작은 세탁소 구석에 앉아 기다려보기로 합니다. 그러자 주인분이 제게 다가와서 중후한 목소리로 무언가 말을 꺼냅니다. 저는 속으로 '거슬리니까 일을 방해하지 말라'라고 이야기하는 줄 알고 내심 속을 졸이고 긴장합니다.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자기가 처리할 테니 캐리어를 맡기고 근처를 구경 다녀오라고 짧은 영어로 말을 건넵니다. 내심 불안해하면서도 그 좁은 공간에 더 이상 죽치고 있을 수 없어서 말을 따르기로 합니다. 남는 시간 동안 근처에 성 마리아 성당이나 다녀와볼까 했습니다만, 가방 속에 들어있던 스위스 아미 나이프 때문에 입장을 거부당하고 할 일 없이 로마의 시내를 배회합니다.

이건 어떻게 쓰는 거지?

한 시간쯤 하릴도 없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다시 세탁소로 돌아옵니다. 세탁소에 들어오자 제가 돌렸던 세탁기 앞에 빨랫감들이 건조까지 마무리되고 바구니에 예쁘게 놓여 있는 것이 보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서비스에 'Grazie'라고 감사의 말을 전하고, 구석의 좁은 곳에서 옷을 개고 있으니 제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러곤 책상에 다른 빨랫감들을 치우고 제게 넓은 곳에서 정리를 하라는 듯이 손짓합니다. 마지막으로 세탁소를 나가는 순간까지 'good bye'란 인사말 한 마디를 전하고 묵묵히 자기 일을 하시는 모습을 보고선, 겉으로 보이는 무뚝뚝함 너머의 깊은 배려심을 느낍니다. 정말 만화 속에서나 볼법한 누구보다 마음은 따뜻한 차가운 도시 남자입니다.

하필 가방에 칼이 있어서 들어가지 못했던 성 마리아 성당

세탁을 마치니 이미 오전 시간이 끝나고 해가 쨍쨍한 정오에 들어섭니다. 늦지 않게 로마에서의 일을 마무리 지은 저는 드디어 피렌체를 향하여 출발합니다. 하지만 로마를 떠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은 불쾌한 서비스의 연속일 뿐입니다. 제 주문을 퉁명스럽게 받으며 제가 주문도 하지 않은 치킨 너겟을 끼어 판 맥도널드의 직원, 표를 검사하는지 마는지 시늉도 제대로 안 하고 대충 사람을 보내는 플랫폼 게이트 직원, 기다리는 열차가 지연이 됐는지 물어보자 귀찮은 듯이 이탈리어어로 된 전광판을 보라며 무시하는 직원까지 시원찮은 사람들만 만납니다. 무뚝뚝하지만 세심히 신경을 써주시던 츤데레 세탁소 아저씨가, 로마를 떠나기 전부터 벌써부터 그리워집니다.

드디어 피렌체로 출발
보안이 엄격해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정말로 표를 대충 검사합니다

2시간 정도를 달려 오후 2시쯤에 도착한 피렌체는 완전히 찜통입니다. 로마보다 위도가 높으니 더위가 조금 누그러들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로마보다 더 덥습니다. 스마트폰은 37도를 가리키고 저는 무엇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역에서 숙소까지 걸어가는 20분 거리의 길은, 너무 비좁고 곳곳이 부서져서 도무지 캐리어를 끌고 갈 만한 길이 아닙니다. 뜨거운 햇살에 녹초가 된 몸으로 이리저리 사람들에게 치이며 겨우 호스텔에 도착합니다. 호스텔의 에어컨만이 이 더위에 유일한 안식처입니다.

피렌체의 좁아터진 인도
날이 너무 덥습니다

잠시 숙소에서 휴식을 취한 후 피렌체의 상징, 두오모를 보러 출발합니다. 피렌체의 곧게 뻗은 좁은 도로에는 '예술의 도시'가 아니랄까 봐 온통 예술품을 늘여놓고 파는 사람들 천지입니다. 사람들 사이를 비켜 다니며 걷다 보니, 좁은 도로의 끝에는 대리석으로 번쩍이는 두오모 대성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그 위용에 넋을 잃고 고개를 들고 천천히 걸어갑니다만, 갑자기 어떤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저를 불러 세웁니다. 그 사람은 화난 표정으로 그림 두 장을 들어 올리며 신발 자국을 손으로 가리킵니다. 제가 바닥에 깔아 놓은 그림을 밟고 지나갔다며 돈을 내놓으라는 겁니다. 일단 크게 실수했구나 싶은 생각과 함께 당혹해하고 있는데, 몇 사람이 달려들어 겁박하는 모습에 순식간에 사기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사기에 어울려줄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그대로 도망가려고 뒤로 돈 순간에 일당 중 한 사람이 제 손목을 붙잡고 한 구석으로 끌고 갑니다. 그는 골목 한 구석에서 그림값이 100유로니 최소한 50유로는 물어내야 한다고 몰아붙입니다. 저는 최대한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벌벌 떠는 손으로 돈이 없다고, 내가 도와줄 방법이 없다고 울먹거립니다. 나는 가진 것이 동전밖에 없으니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냐며 한탄을 하자 그 사람이 그거라도 내놓으라고 소리칩니다. 저는 잔돈 주머니를 꺼내, 50센트, 20센트, 이렇게 동전을 하나둘씩 꺼냅니다. 그것도 벌벌 떨리는 손으로 하나하나 동전을 꺼냅니다. 한 8유로쯤 꺼내자 그 사람은 답답했는지 그거라도 됐다며 제 손에서 동전들을 쓸어갑니다.

골목길을 따라 두오모가 점점 가까워지는데
사진을 찍는데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웬 그림이?

저는 놀라서 가라앉지 않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시 돌아봅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많은 길거리에서 손목을 잡히고 끌려가 돈을 뜯길 수 있는지 머리가 도무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나마 어떻게든 연기를 해서 50유로를 뜯기지 않고 잔돈만 뜯긴 것이 다행인지 모릅니다. 무슨 이런 생양아치 깡패들이 있나, 화가 나는 마음에 조금 멀리서 지켜보기로 합니다. 그 일행들은 이곳저곳에서 그림들을 꺼내 바닥에 깔아놓고 다른 사람들이 밟자 돈을 요구하는 짓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좁은 통로를 그림으로 틀어막고 밟기를 유도하며 사기를 치고 있는데 경찰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손목을 잡혀 끌려갔던 불쾌하고 무서웠던 감각이 좀처럼 잊히지가 않습니다.

저 좁은 인도를 가득 메운 '함정' 그림들
이렇게 서서는 누가 밟고 지나가는 순간 득달같이 달려듭니다
이렇게 불러 세우는 순간 사실상 돈을 뜯긴 겁니다
낚시터를 다시 잡는 것 처럼 '그림'을 설치하는 일당
총을 든 군인들은 일당의 편입니다.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습니다.

잡친 기분에 저는 더 이상 구경 다닐 생각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냥 다음 날의 구경을 위해 두오모 통합권이나 구매하기로 합니다. 표 예매 장소도 워낙에 구석진 곳에 숨겨져 있어서 한참을 찾아다닙니다. 무슨 시장의 화장실 통로 같은 곳에 표 예매를 위한 통합권 자동판매기가 있는데, 생각과는 달리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줄이 없는 것과는 별개로 이미 예약이 가득 차서, 두오모 관광의 꽃인 쿠폴라 등반은 이틀 뒤로 예약이 잡힙니다.

두오모 성당의 방문은 다음 날로 기약합니다
동네 구석에서 겨우 찾은 통합권 발매소
두오모 통합권 티켓 자동 발매기

두오모 예매를 마치고 한 숨을 돌리니 어느덧 시계가 다섯 시를 가리킵니다. 대부분 볼 곳들이 오후 7시까지 운영하므로 저는 한 곳 정도 둘러볼 수 있습니다. 돌아다니다 보니 기분도 누그러졌고, 두오모 통합권이 제공하는 여섯 곳의 관람지를 둘러보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미리 한 곳 정도 가보기로 합니다. 반팔 반바지의 잠옷 차림이라서 두오모 성당은 들어갈 수 없고, 더운 날에 어디를 더 쏘다니기보다는 박물관에 들어가 보기로 합니다.

목표로 잡은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은, 두오모와 관련된 자료가 전시된 박물관입니다. 박물관 내부에서 통합권 티켓을 보여주니 이 일대에서 사용할 수 있는 오디오 가이드를 며칠간 빌려준다고 합니다. 통합권 18유로에 오디오 가이드 15유로 면 제법 비싼 편입니다만, 제대로 감상하려면 역사적 배경이나 문화적 이해가 필요할 것 같아서 가이드를 빌리기로 합니다. 마침 한국어도 지원해주니 마다할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오디오 가이드를 며칠간 대여하기 위해선 deposit이 필요한 데, 여권은 수시로 필요하므로 맡길 수 없다고 하자 저를 인증할 수 있는 아무 신분증이나 상관없다고 합니다. 저는 지갑에 있던 제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오디오 가이드를 빌려가기로 합니다.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
한글로 제공되는 오디오 가이드는 번역 퀄리티가 나쁘지 않습니다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에는 두오모를 건설과 관련된 전시품들이 전시 중입니다. 당시의 도면과 모형, 두오모 내부에서 옮겨온 건축물의 일부, 조각상과 보물 등을 볼 수 있습니다. 각각 방을 나누어 마치 두오모의 일부인 것처럼 재현해 놓여 있는데, 지금까지 본 고전 박물관 중에서 가장 세련되고 현대적입니다. 전시를 보면 두오모를 짓게 된 모티브부터 시대순으로 나열되어 있어, 두오모 성당 관람에 앞서서 미리 브리핑을 받는 기분입니다. 두오모를 지을 시기의 거장들의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도나텔로 막달라 마리아 목각상과 120년 동안 여러 작가들의 손을 걸쳐 완성된 순은 제단이 인상적입니다.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지랴?' 도나텔로의 막달라 마리아 목각상
시각장애인을 위해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모형상도 같이 전시 중입니다
16세기 찬송가 악보와 성가대
쿠폴라 돔의 모형
박물관 내부에 전시된 성인들의 모습을 담은 신전
수 백 kg에 달하는 순은 제단

여러 모로 불쾌한 사람들과 스치듯이 지나간 하루지만, 다행히 하루의 끝은 기분이 꺾인 채 잠기지 않습니다. 불친절한 사람들이든 사기꾼들이든, 이런 사람들로 하여금 여행 중에 기분과 마음에 생채기가 나고 모든 걸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에 몇 번을 잠겼는지 모릅니다. 여행을 다니면서 나쁜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기는데 조금은 익숙해진 모양입니다. 다만 반성의 의미로 조금은 조심해서 다니자는 생각도 듭니다. 특히 앞으로 프랑스, 스페인을 갈 걸 생각하면 단단히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성의 시간을 가지며 다 나은 내일을 기약하는 피렌체의 하루입니다.

부디 좋은 내일이 기다리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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