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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Apr 13. 2020

7월 23일, 51일 차, 바티칸, 로마

드디어 바티칸입니다

이른 새벽 여섯 시부터 알람이 울립니다. 오늘의 목적지인 바티칸단체 투어를 신청하지 않으면 관광이 어려운 관계로 단체 관광을 신청했는데, 집합 미팅 시간이 7시 40분이라 좀 서둘러야 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간단하게 씻고 얼굴에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른 후, 양산 대용으로 우산을 챙깁니다. 어제의 끔찍한 날씨를 몸이 기억하는 건지 출발하려고 하니 발이 잘 떨어지질 않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가는 곳이 바로 그 바티칸입니다. 수녀님이신 이모님께 건네드릴 선물로 바티칸 여행기를 가져가고 싶기에, 정신을 가다듬고 출발하기로 합니다. 다행히 아직 해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생각보다 날이 뜨겁지는 않습니다. 로마 패스를 이용해서 무료 지하철을 타고 테르미니 역에서 집합 장소인 오타비아노 역으로 향합니다.

여정의 시작은 지하철과 함께

지하철에서 내려 지하도 내의 약속 장소로 향합니다. 단체로 떠나는 가이드 투어는 몇 번을 떠나도 어색한지라 제대로 합류는 할 수 있을지 항상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런 불안감을 누르며 걷다 보니 출구 쪽으로 한국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이 보입니다. 멀리서 딱 봐도 한국인 투어 사람들입니다. 대학생들부터 가족단위 여행객까지 삼삼오오 모여있는 곳으로 쭈뼛거리며 섞여 들어서 저희 팀인지부터 확인해봅니다. 다행히 가이드 분의 출석체크에서 제 이름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쓸어 담습니다. 시간이 촉박한 건지 별다른 설명 없이 무전기만 송부받고 바로 바티칸을 향해 출발합니다.


과연 가이드 분이 서두른 이유가 있습니다. 아직 아침 식사도 하기 전 시간임에도 바티칸으로 향하는 길은 사람들의 행렬로 한가득합니다. 이제 떠오르기 시작한 햇빛이 벌써부터 더워, 그늘을 따라 입장을 기다리는 줄이 만들어집니다. 언제 입장이 시작되나 기다리고 있자니, 얼음물이 든 페트병을 흔들며 억센 발음을 외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워떠 워떠 아이스 워떠, 원 유로, 일 유로" 


특유의 리듬을 타며 혀를 굴리는 소리가 아침부터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닙니다. 열댓 명이 지나가면서 계속 물을 사라고 외치는데, 개중에는 능수능란하게 한국어를 하는 사람도 있어서 물을 안사고는 못 배길 지경입니다. 결국 저희 팀 사람들을 빵빵 터뜨리는 데 성공한 장사꾼이 몇 유로를 손쉽게 벌어갑니다. 얼음물의 출처를 의심하며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저는 이내 신경을 끄기로 합니다.

아침부터 길게 늘어선 대기줄

바티칸 영토의 경계인 성벽을 따라서 개장을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문이 열리고 인파가 밀려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저희 팀도 인파에 휩쓸린 채로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국경 앞에 들어섭니다. 국경 게이트에서 가이드 분이 구매한 티켓을 제시하고는, 간단한 소지품 검사를 진행합니다. 입국 과정에서 우리 팀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일종의 이정표인 가이드 분의 깃발만 바라봅니다만, 인파 속에서 여기저기 수많은 깃발들이 보여 때때로 팀을 놓쳐버립니다. 도대체 지금 몇 팀이 바티칸으로 입국하는 건지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바티칸의 국경
혼잡한 인파 속에서 의지할 것은 깃발뿐

간신히 입국을 마감한 다음에는 박물관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앞서 정원에 앉아 40분 정도 브리핑을 듣습니다. 박물관 내부가 혼잡한 데다가 시스티나 성당에선 가이드를 할 수 없어서 미리 설명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시스티나 성당엔 흔히 '천지창조'로 알려진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이 성당 내부를 가득히 채우는데, 벽화가 그려지게 된 배경과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창세, 아담과 이브, 노아, 최후의 심판까지 르네상스 양식으로 그려진 벽화의 성경의 세세한 이야기들을 요소요소 골라 듣는 재미가 있습니다.

바티칸 특제 라떼와 함께하는 길바닥 브리핑


본격적으로 바티칸 박물관에서 관람을 시작한 후로는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충분히 감상할 새도 없어 인파에 떠말려 앞으로 앞으로 갑니다. 그래도 없는 짬을 내어 박물관의 각 방마다 뚜렷한 양식의 차이를 눈에 새겨봅니다. 그중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작품들을 열거해봅니다. 첫 번째는 라파엘로가 10대, 20대, 30대에 그린 대표작들이 전시된 라파엘로의 방입니다. 그중에서 30대의 작품이자 라파엘로의 유작인 '그리스도의 변용'은 기적을 일의는 예수님의 색채와 정신병을 앓는 아이를 둘러싼 사람들의 뚜렷한 색채 대비가 만드는 강렬한 인상이 기억에 남습니다.

라파엘로의 시대별 대표작이 전시된 라파엘로의 방
색채의 뚜렷한 대비가 인상 깊은 '그리스도의 변용'

두 번째는 바티칸 정원으로 가톨릭에서 발굴하고 보관하던 그리스-로마 신화의 대리석 석상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신화 속 인물들의 근육 하나하나 섬세하게 표현한 인상 깊은 석상들이 여럿 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라오콘 군상이 단연 압도적입니다. 그리스 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던 트로이의 신관 라오콘이 그의 아들들과 함께 포세이돈에게 저주를 받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묘사한 석상으로, 분노와 허탈함, 고통에 찬 표정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역동적인 몸짓, 그리고 세세한 잔근육과 핏줄마저 표현해 낸 석상은 그 고통이 생생히 전해져 오는 것만 같습니다.

바티칸에서 유일한 현대 예술품 '천체 속의 천체'
바티칸의 팔각 정원 '벨베데레 정원'
고통에 몸부림치는 '라오콘 군상'

세 번째는 지도의 방으로 긴 복도를 따라 천장에는 황금빛 벽화들이, 좌우 복도에는 대성당이 위치한 지역들의 지도들이 걸려있습니다. 따로 설치된 조명 없이 타반원으로 된 천장에 자연광이 들어오도록 구조로 황금빛으로 빛나는 천장이 매우 화려한 구간입니다. 프레스코화로 벽에 새겨진 이탈리아의 각 지역 지도는 지금 기준에서 봐도 훌륭할 정도로 섬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몇몇 여행했던 지역의 지도가 보여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지만 복도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행렬에 계속 떠밀려 갑니다. 그래도 지도의 방을 나가기 직전에 뒤를 돌아서 본 풍경은 가히 걸작입니다.

앞으로 앞으로 떠밀려만 가는 지도의 방
눈에 확 들어온 베네치아의 지도

네 번째는 사면에 라파엘로의 벽화가 그려진 방입니다. 각각 신학, 법, 예술, 학문 네 가지의 주제가 그려진 방에서 단연 눈에 들어오는 건 아테네 학당입니다. 정 중앙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두고 그려진 각종 수학자, 과학자, 철학자들이 토론하는 모습에서 학문에 대한 열의와 격의 없고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라파엘로가 교황에게 인간의 일 중에서 꼭 신경 써야 할 것들을 전달하기 위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벽화라고 하는데, 수학과 철학에 대해 강변했다는 것이, 비슷한 전공을 밟은 입장에서 괜히 뿌듯해집니다.

'아테네 학당'

바티칸 박물관 투어도 막바지에 다 달아 드디어 하이라이트인 시스티나 소성당에 이릅니다. 시스티나 소성당에 들어서니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천장화가 하늘을 수놓고 있습니다. 고개를 올려다보는 천장화는 단순히 벽에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하늘을 수놓고 있는 자연 그 자체입니다. 도저히 인공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천장화의 모습에 대단하거나 신기하다는 감탄조차도 나오질 않습니다. 창세의 과정에 있었던 사건과 일들을 그냥 하늘에다가 선명하게 옮겨 놓은 하나의 그림책을 보는 느낌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목이 빠지는 줄도 모르고 하나하나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저작권 문제로 사진을 찍을 수 없기에 이 풍경을 사진으로 담지 못해 아쉬울 뿐입니다. 그나마도 몰래 찍어보려는 사람들도 엄격히 제지하는 분위기에 조용히 감상만 하다가 나옵니다.

저작권을 이유로 대체한 시스티나 성당을 들어가기 전(왼쪽)과 나온 후(오른쪽)

시스티나 성당까지 투어를 마치고서는 바티칸의 중앙 성당인 성 베드로 성당으로 향합니다. 성지순례의 종착점인 이 거대한 성당은 화려하면서도 경건함이 감도는 신기한 공간입니다. 천장에는 황금으로 장식들로 한가득함에도 실내를 장식하는 인테리어의 검은 색감과 어우러져 경건한 느낌을 돋웁니다. 무척이나 큰 성당입니다만 크기에 위압되어 웅장한 느낌을 받는 게 아니라 아니라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을 받습니다. 지금껏 봐온 어느 성당보다도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친근한 성당입니다. 성지 순례의 마지막 장소에서 순례객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가능한 경건하게 디자인했다는 설명이 확 와 닿습니다. 지하에는 성 베드로의 유해와 함께 역대 교황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데, 제가 교황님들의 묘를 직접 보고 있다는 것이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으롤 들어가는 길
성 베드로 성당 내부

성 베드로 성당을 나서자 넓게 펼쳐지는 화해의 길이 펼쳐지고, 길 양 옆으로 각국의 대사관들이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 성 베드로 성당까지 관람을 마치고 화해의 길을 따라 바티칸을 나오면서 오늘 본 바티칸의 모습을 돌이켜봅니다. 눈을 감고 몇 번을 돌이켜도 마냥 꿈을 꾼 것처럼 현실감이 들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보고 싶은 마음에 좀 더 공부하고 한 번은 더 와봐야겠단 생각만이 머리를 맴돕니다.

성 베드로 성당 앞으로 펼쳐진 성 베드로 광장
광장에서 바라본 성 베드로 성당의 모습
화해의 길에서 바라본 대사관들

오전의 바티칸 투어를 마치고 오후에는 로마 시내 투어의 연속입니다. 먼저 바티칸에서 비밀 통로로 이어지는 천사의 성을 지나 테베레 강을 건너 나보나 광장으로 들어옵니다. 잠시 투어를 쉬는 시간에 가이드 분의 추천으로 근처 식당에서 해물 파스타와 찐 새우를 먹습니다. 굵은소금으로 진하게 구워진 새우는 바닷 내가 진하게 풍기는 훌륭한 맛입니다. 음료수까지 포함해서 가격도 16 유로로 적당히 만족스러운 식사입니다만, 새우 껍질을 벗기느라 손에 밴 비린내가 좀 신경 쓰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파스타도 새우도 너무 짜서 단 탄산음료를 계속 찾게 됩니다. 물론 유럽에 와서 탄산음료가 없이 한 식사가 손에 꼽긴 하지만 말이죠.

로마 교황청의 성곽 겸 요새인 '천사의 성'
바다의 향이 강렬한 점심
라보나 광장과 오벨리스크

점심을 먹고 계속되는 투어에서 이 성당 저 성당을 계속 둘러봅니다. 로마 시내에는 수백 개에 달하는  성당들이 있는데, 길거리의 작은 성당들마저 화려한 벽화와 장식으로 꾸며진 모습에 놀랍니다. 성당들 마다도 모양이 가지각색이어서, 성당을 후원하던 가문의 역량에 따라서 이 화려함의 정도가 달라지는 모양입니다. 가령, 샨티냐시오 성당은 돔을 지을 여력이 부족해 평면인 천장에 그림으로 입체적인 돔을 표현해 놓았는데 이런 발견은 항상 재미있어서 좋습니다.

마치 돔이 있는 것처럼 착각케 하는 '샨티냐시오 성당'의 '가짜 돔'
천장화를 찍기 쉽도록 배치된 거대한 거울

그 유명한 판테온의 경우, 돔 중앙이 뚫려 있는 신기한 구조로 돔 천장의 구멍을 따라 태양 빛이 직사 하여 돔 벽면에 동전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시간의 변화에 따라 이 빛의 궤적을 따라가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이드 분이 판테온이 천장 돔으로는 기압 차이 때문에 빗물이 새어 들어오지 않는다고 설명하는데 과연 가능한 일인지 곰곰이 생각을 해봅니다.

멀리서 본 판테온
판테온 천장의 홀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빛

남은 시간은 이미 어제 한 번 둘러보았던 베네치아 광장, 조국의 제단, 캄피돌리오 언덕, 포로 로마노, 콜로세움을 훑으며 지나갑니다. 가이드 분의 역사적 유래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그동안 궁금했거나 알고 있는 지식에 비어있는 부분들에 대해 질문해봅니다. 역사와 유적의 도시 로마에 와서 아무래도 로마의 역사도 모르고 유적지들을 돌아다니는 건 손해 보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같은 곳을 몇 번을 돌아다니더라도 제가 만족할만한 이해를 얻을 수 있어서 정말 좋은 하루입니다.

조국의 제단 앞에서
다시 만나는 포로 로마노
로마의 건국 설화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형상화한 조각상

콜로세움에서 투어를 마친 다음에 해가지는 것을 기다려 콜로세움의 야경을 잠시 봅니다.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이 조명 빛에 빛나는 콜로세움의 아치 사이로 보이는 것이 운치가 있습니다. 마침 시간에 맞추어 웨딩 사진을 촬영하는 신혼부부에게, 다들 박수와 함성을 보냅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제 도시는 완전히 컴컴해져 가고 제가 로마에서 보낼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놓친 것도 많고 아쉬운 점들도 있지만 다음에 다시 로마를 왔을 때의 즐거움으로 남겨야 할 것 같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언젠가 다시 찾아올 기회가 분명 있으리라 믿어봅니다. 이제 어둠 속에서 숙소를 찾아가는 바티칸과 로마의 하루입니다.

다시 돌아온 콜로세움
조금씩 어둠이 찾아오고
시간에 맞추어 웨딩사진을 촬영하는 커플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콜로세움
이제 완연한 어둠
밤에 물든 도시
은은한 조명과 성 마리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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