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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Mar 30. 2020

7월 22일, 50일 차, 로마

무더위 속의 말로만 듣던 바로 그 로마입니다.

"지지직"


스마트폰의 알람 진동과 함께 눈을 뜹니다. 부스스한 눈으로 알람을 확인하니, 오늘의 최고 온도가 36도까지 올라간다고 합니다. 어제보다 무려 3도나 더 올라간 온도입니다. 이 미친 날씨에 밖을 쏘다닐 것을 생각하니 머릿속이 아찔하기만 합니다. 우선 크게 심호흡을 하고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 봅니다. 그리고 로마까지 온 이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상기해봅니다. 비싼 여행비, 사서 하는 몸 고생, 인생에 몇 없는 기회...... 마음을 다 잡은 저는 만반의 준비를 다하기로 합니다. 선스틱을 꺼내 피부가 노출되는 모든 곳에 덕지덕지 바릅니다. 그리고 곤색 우산을 양산 대용으로 준비해봅니다. 이런 어두운 색 우산이 양산 대용이 되지 못한다는 글을 얼핏 봤지만, 검은색 계열 폴리에스테르가 자외선을 차단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오늘의 여정을 떠나보기로 합니다.

로마의 아침

아침에 향한 첫 행선지는 콜로세움입니다. 다행히도 숙소에서 15분만 걸으면 도착하는 가까운 일정입니다. 아직 해가 덜 뜬 시간이라 그런지, 응달을 따라서 걸으면 그래도 조금 덜 더운 기분입니다. 거리에 널린 유적지들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사진으로 너무 많이 봐 익숙한 건물인 콜로세움에 도착합니다. 매표소 앞에 벌써부터 길게 늘어선 줄을 기다려 구매한 티켓에는 10시 45분이 찍혀 있습니다. 지금 시간이 9시 30분으로 콜로세움 입장까지 시간이 한참 남아서 고민을 해봅니다. 콜로세움 입장권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팔라티노 언덕을 먼저 둘러볼까 싶어 안내원에게 물어봅니다만, 팔라티노 언덕도 구경하는데만 족히 두 시간은 걸리므로, 콜로세움을 먼저 둘러보라고 추천해줍니다.

걷다보니 어느새 콜로세움
콜로세움에 도착하자마자 한 컷
아침부터 티켓을 사려는 행렬이 분주합니다
제 지정된 시간은 2019년 7월 22일 오전 10시 45분

붕 뜨는 시간을 어떻게 때우면 좋을까 고민을 하다가, 차라리 남는 시간 동안에 조금 이른 점심을 먹어버리기로 합니다. 아직 10시 남짓한 시간이지만, 미리 브런치를 배부르게 먹어서 점심을 스킵하고 더 많은 시간을 구경에 쏟아 붓기로 말이죠. 콜로세움 주변 거리를 돌아다니며 밥집을 찾아다닙니다만 대부분의 식당이 오픈 준비 중입니다. 30분 가까이를 떠돌다가 겨우 문을 연 카페를 발견합니다. 서두르는 마음에 샌드위치 하나를 욱여넣고서는 서둘러 콜로세움 입구로 다시 돌아옵니다.

오늘의 아침과 점심을 한 큐에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왔는데, 그새 입구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해졌습니다. 콜로세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기다리는 줄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서 있는 게 보입니다. 저도 티켓을 끊기는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몰라서 일단 대열에 합류해봅니다. 아직 티켓에 적힌 시간까진 30분이나 남았습니다만 이 행렬이 줄어드는 속도로 보아선 족히 한 시간은 넘게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에 안내원한테 표를 보여주니, 이미 티켓을 산 사람은 이 줄이 아니라 다른 줄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저를 안내해 줍니다. 안내해준 줄이 짧아 보이길래 금방 들어가는 줄 알고 좋아했더니, 건물 안으로 이어지는 줄이 또 한참이어서 결국 30분 만에야 겨우 입장을 하게 됩니다. 티켓을 미리 구매하지 않은 사람들의 줄을 보니, 어림잡아 두 시간 반은 기다려야 입장을 했을 길이입니다. 서늘해지는 간담을 달래며, 게으름을 부리지 않은 아침의 스스로를 칭찬해봅니다.

겨우 입장해서 한숨 돌리는 시간

콜로세움에 들어서면서 느낀 첫 감정은 "너무나 덥다"입니다. 11시가 넘어서 본격적으로 한 낮이 시작되자 내리쬐는 햇살을 도무지 견디기가 쉽지 않습니다. 금속으로 된 난관은 뜨겁게 달아올라서 실수로라도 손을 댔다가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지를 것만 같습니다. 그늘 하나 없는 콜로세움 내부를 둘러보기 위해, 우산을 펼쳐 들고 둘러봅니다.

햇볕이 쨍한 콜로세움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콜로세움 외부와는 다르게, 내부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쾌적한 관람을 위해서 인원 제한을 철저히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경기장 규모는 생각보다 커서 오늘날의 웬만한 스타디움과 규모가 비슷한 정도입니다. 객석은 실내 쪽과 실외 쪽의 이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층까지 구성되어 있습니다. 경기장 곳곳에 작은 방들, 객석의 복도, 통로와 계단, 입장 게이트까지 그냥 현대의 스타디움이라고 이야기해도 무리가 없는 디자인입니다. 이미 2천 년 전에 이런 설계를 생각하고 실제로 건설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 광경입니다. 그 옛날에 지은 건물이 지금까지도 원형에 가깝게 남아 경기장으로서의 기능이 가능토록 남아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분명 많을 것입니다.

콜로세움 내부

어떻게든 눈에 콜로세움을 새기기 위해서 구석구석 돌아다녀 봅니다. 곳곳에 놓인 기둥의 흔적에는 "올라가지 마세요"라는 팻말이 보입니다. 허물어진 그대로 남아있어 위험해 보이는 건물의 잔해에 올라타는 사람들이 많은가 봅니다. 경기장 중앙에는 한창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인데, 이 더운 날 웃통을 벗고 일하는 인부들을 보고 있자니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를 않습니다. 경기장을 한 바퀴 돌면서 셀카를 몇 번 찍어봅니다만, 더운 햇살에 찡그려지는 얼굴이 도무지 펴질 생각을 하질 않습니다. 결국 더위에 지쳐서 콜로세움 복도의 그늘로 대피합니다.

절대 올라가지 마시오
기둥으로 더위를 피하기 위하는 사람들

복도 쪽으로는 콜로세움의 역사에 대해서 소개하는 전시가 보입니다. 콜로세움에 이미 그 당시부터 도자기 파편 등에 좌석을 지정한 티켓이 있었다는 것, 층별로 신분 구분을 두어 입장했다는 것, 노예와 죄수들이 검투사로서 피를 흘렸고, 관람객들이 그 장면을 즐겼다는 것, 경기장에 물을 채워서 모의 해전을 했다는 기록까지. 지금의 가치관을 과거에 곧이곧대로 적용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만, 여전히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역사입니다. 다시 경기장 내부를 들여보고는, 아까의 경이로움과 교차되는 섬뜩함 속에서 아직까지도 건재한 콜로세움은 무엇을 시사하는지 다시 반복해서 생각해봅니다. 역사 건축물의 '위대함'과 그 위용에 놀란 '경이로움'과 그 밑에 잠긴 '고통'과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켜 현기증을 느낍니다.

복도에 전시된 콜로세움의 모형
벌써 오후 시간인데도 끊이질 않는 대기 행렬

조금 무거운 걸음으로 콜로세움에서 나오고서는, 콜로세움 바로 앞에 세워진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에서 가볍게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그 후에 곧바로 팔라티노 언덕에 들어갈 준비를 합니다. 콜로세움만큼은 아니지만 팔라티노 언덕 역시 들어가기 위해서 꽤 긴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겨우 입장합니다. 우산을 펼치고 햇볕을 막아봅니다만, 이미 오후 두 시에 가까운 시간, 뜨거운 공기 자체가 주는 열만을 어떻게 이겨낼 방법이 없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등줄기에 땀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지는 것이 정말 끔찍한 날입니다. 팔라티노 언덕은 유적지 지대를 이곳저곳 돌아다녀야 하는데 날도 더운 데다가 언덕을 계속 오르내리다 보니 정말 악소리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라도 놓치기 싫은 욕심 때문에 오기로 돌아다니는 기분입니다. 어떻게든 사진이라도 찍으려고 악을 쓰다가 스마트폰이 열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진귀한 광경까지 목격합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에서 한 컷
팔라티노 언덕 대기줄
팔라티노 언덕의 지도

힘겹게 올라간 팔라티노 언덕 위에는 발굴 중인 유적지 천지가 보입니다. 옛 건물의 터와 부서진 흔적들이 걸어도 걸어도 계속 보입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지은 궁전과 각종 종교 시설들의 흔적들을 찾을 수 있는데, 언덕 위에 어떻게 이런 시설들을 지을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특히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애나 리비아의 집들은 생각보다 보존이 잘 되어 있어서 건물 내부도 구경할 수 있는데, 제가 끊은 티켓으로는 권한이 부족해서 내부를 구경하지는 못합니다. 대신 옛 건물들이 반쯤 무너진 상태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허물어진 벽 사이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어떻게든 안을 들여다보려고 애씁니다. 그렇게 카메라로 찍고 또 찍고, 계속 찍으며 나아갑니다.

Teareo del Fontanone에서
고열로 휴대폰 잠시 사망
언덕 위에 황가가 살던 흔적들

팔라티노 언덕 아래쪽에 위치한 포로 로마노는 의사당, 신전, 광장을 비롯해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포럼 공간의 일종으로, 로마 제국에서 정치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전쟁을 몇 차례 겪고 그 터와 잔해들이 남아 있는데, 생동감과 현실감 넘치게 재연한 체험형 테마파크에 온 기분입니다. 잔해 속을 거니는 것이 전시된 표본을 보는 게 아니라 그냥 발굴의 현장을 거니는 것만 같습니다. 무너져 있는 유적지의 건물들이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고 있어서, 멀쩡하던 시절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지 상상하게끔 합니다. 신전과 의회에서 분주하게 이야기를 나눴을 사람들의 모습을 유적지에 겹쳐보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팔라티노 언덕을 내려오면
포럼인 포로 로마노
아직 멀쩡한 사원 내부를 들어가보거나
점자 설명이 함께합니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포로 로마노

이런 유적지는 포로 로마노 한 곳만 있는 게 아닙니다. 유적지 밖으로 가까운 곳에 또 다른 포럼인 아우구스투스 포럼이, 그 위로는 상업시설이던 트라야누스 시장의 유적지가 보존되어 여전히 발굴과 연구가 진행 중입니다. 이렇게 도심지 한가운데 고대의 유적들이 공존하며 연구를 통해 아직도 생생하게 현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마냥 신기하기만 합니다.

어딜가도 유적이 일상에 자리잡은 로마의 흔한 거리 풍경
유적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지하철 공사 계획
아우구스투스 포럼과 트리야누스 시장 터

포로 로마노에서 걸어서 이동하면, 이탈리아 국기 두 개가 양쪽에서 펄럭이고 있는 조국의 제단이 보입니다. 이탈리아 통일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제단으로, 중앙에 거대한 계단을 따라 웅장하게 솟아있는 대리석 건물은 웅대한 기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단 정 중앙에는 이탈리아 왕국을 통일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청동상이 보입니다. 그 옆으로는 화로에 건국의 불꽃이 불타고 있습니다.

멀리서 본 조국의 제단
불이 꺼지지 않게 상시 호위 중인 건국의 불꽃


이 장엄한 공간의 내부에는 통일에 기여한 무명용사의 묘와 함께 육군 박물관이 있습니다. 육군 박물관에는 이탈리아 군의 역사와 군대의 존재 의의, 개인과 커뮤니티의 공존 등 생각보다 깊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프로파간다에 치우치기 쉬운 군 관련 박물관의 내용물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운 주제들입니다만, 시간이 없어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합니다. 로마 체류 기간 중에 시간이 허락한다면 다시 와서 제대로 감상해보기로 합니다.

조국의 제단 내부에 육군 박물관으로 가는 길
생각보다 심도한 주제를 다루는 박물관입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더위를 해쳐 나가 이제 진실의 입에 도달합니다. 쇠창살로 둘러싸인 건물 내부로는, 괴상한 얼굴을 한 원형 조각상의 입에 어떻게든 손을 넣어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영화 로마의 휴일의 장면을 어떻게든 재현해보려고 말이죠. 사실 본 적도 없는 영화의 장면을 재현해본다고 땡볕 더위에 30분 가까이 줄을 서서는, 사진 찍어줄 사람도 없어서 다른 가족에게 부탁해 어설픈 연기를 해가며 사진을 찍는 스스로를 생각해보니, 조금 우습고 서글픈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사진 찍기를 기다리는 것은 정말 한세월입니다
울고 싶은 마음을 접고, 이 순간만은 혼신을 다해서 연기를

마지막으로 트레비 분수를 보러 가기로 합니다. 기다리는 버스는 오지도 않고 지하철은 운행하지 않고 어쩔 수없이 언덕길을 비틀비틀 걸어 올라가 봅니다. 가는 도중에도 몇 번이고 버스가 오지 않을까 멈추어 서서 돌아보기를 반복해봅니다만 헛된 희망입니다. 쳐진 마음으로 투덜대며 걷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가는 길마다 친절하게 트레비 분수 가는 길이라고 안내하는 이정표가 보입니다. 혹여라도 생고생 끝에 도착한 마지막 여정지가 별로이면 마음이 더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 머릿속을 비워두었습니다만, 이러한 기대(?)가 무색하게도 트래비 분수의 실물은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분수에, 대리석으로 조각된 조각상들이 예뻐서 기대치 않은 성취감을 느낍니다. 다만 사람이 너무나도 많아서 분수 가까이 가지 못하고, 그나마도 관리요원들이 계속 주의를 주기 때문에 관람하기가 힘든 것이, 역시 마음의 준비를 해둔 보람(?)을 느껴봅니다. 도대체 여기 어디에서 연인들이 알콩달콩하게 동전을 던지며 다시 로마로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낭만이 찾을 수 있을까요?

드디어 도착한 트레비 분수
대리석상의 실물은 생각보다 아름답습니다
바글거리는 인파에 분수 멀찍이서 한 컷

트레비 분수까지 보고 나니 이제는 정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입니다. 목표는 전부 이루었고 숙소로 돌아갈 일만 남았지만, 불지옥 같은 날에 몇 번이나 억지로 움직였던 몸이 보상을 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마침 이탈리아에 와서 피자는 진짜 많이 먹었는데 파스타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게 떠오릅니다. 본고장의 파스타는 다를 거라고 기대하며 파스타 집을 찾아봅니다. 근처에 평점이 높은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로만 파스타라는 특별 메뉴를 주문해봅니다. 토마토 베이스에 치즈와 곱창 튀김 같은 고기가 얹어진 독특한 메뉴인데 여기에 무알콜 맥주까지 얹어서 먹으니 하루를 보상받는 기분입니다. 별로 먹은 것 같지도 않은데 3만 원 가까이 나온 영수증을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만, 가끔씩 하는 비싼 식사가 정말로 절실한 하루입니다. 다음 날은 오늘보다 더 빡센 일정이 기다릴 텐데 먹는 거라도 여유를 가지며 즐겨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합리화하면서 마무리 짓는 로마의 하루입니다.

논알콜이어도 훌륭한 맥주와 독특한 풍미의 파스타
숙소로 가는 지하철조차 폐쇄된 서글픈 하루
I... Love... Ro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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