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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Mar 18. 2020

7월 21일, 49일 차, 로마

복잡한 모습이 뒤섞인 로마입니다

드디어 베네치아를 떠나는 날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자리를 정리하고 창밖을 열어봅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골목의 풍경은 여느 때처럼 북적거립니다. 베네치아의 마지막 풍경을 눈에 담으며 조용히 숙소를 출발합니다. 캐리어를 끌고 북적이는 거리의 행렬로 스며듭니다. 


해가 막 뜬 이른 시간인데도 날이 덥습니다. 그늘을 따라 걷자니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그나마 시원합니다. 옹기종기 골목길이 정다운 도시가 떠날 때가 되니 마냥 아쉽습니다. 호스텔에서 쉬면서 보낸 시간들에 후회가 밀려옵니다. 나태함에 못 이겨 재밌는 도시를 그냥 지나치는 기분입니다. 다음을 위한 기약이라 애써 스스로를 달래 봅니다. 밀려오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남은 기차 시간까지 이 다리 저 다리 건너며 괜히 동네를 들쑤시고 다녀봅니다. 그러다가 어느덧 다가온 기차 출발시간에 화들짝 놀랍니다. 여행의 증거물인 베네치아 포스트 카드를 사랴, 기차에서 간단히 먹을걸 사랴, 마지막에서야 서두르다가 간신히 기차에 탑니다. 여행의 마음가짐으로 30분에서 1시간은 여유를 갖고 움직이는데도, 마지막엔 항상 시간에 허덕이는 것이 천성의 고질병입니다. 허둥대면서도 기차를 놓친 적이 없는 것은 천만의 다행입니다.

Ciao, 베네치아

다음 목적지는 로마입니다. 베네치아에서 500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고속열차 이딸로를 타고 4시간을 여행하는 여정입니다.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만, 1등석의 넓고 편안한 좌석에 앉아 매일의 일기를 쓰며 시간을 보냅니다. 가끔 지나다니는 승무원이 무료로 제공되는 음료수와 물, 간단한 칩 혹은 스낵 등을 즐기며 상당히 한가롭고 편한 시간입니다. 기차 여행은 이동에 고단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고속 열차의 1등석쯤 되니 안락함이 확실히 체감이 됩니다. 조금 비싼 돈을 들여서라도 유레일 패스를 1st class로 끊은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내봅니다.

간식과 마실거리는 언제나 환영이야
오늘의 여정은 베네치아에서 로마로!

한참을 달린 끝에 드디어 로마 테르미니 역에 도착합니다. 역에서 내리기 전에 다시 한번 몸가짐을 단단히 하고 소지품들의 상태를 꼼꼼히 챙깁니다. 바르셀로나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소매치기가 많고 치안이 불안하다는 로마인만큼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합니다. 경계심을 높이고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저를 맞이한 것은 의외로 불볕 같은 더위입니다. 베네치아도 물론 덥기는 했지만 습도가 높아서 후덥지근한 느낌 정도였습니다. 반면 로마의 더위는 '불타오른다'에 가깝습니다.


걱정과 달리 생각보다 역이 깔끔합니다. 붐비는 인파 속에서 출입문 게이트 너머로 사람을 찾는 가이드의 팻말도 보이고, 경찰과 총을 든 군인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세련된 중앙역은 멀티플렉스, 대형 쇼핑몰을 보는 느낌입니다. 불타는 더위 속에서도 로마의 첫인상은 기대와 달리 나쁘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깔끔하고 로마 테르미니 역

역사 밖으로 나서자 중앙역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역사를 둘러싼 차도는 차와 사람이 뒤엉켜 건널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기차역 바로 맞은편으로 다양한 아시아계 음식점들로 즐비한 것이, 인도의 시장거리에 서 있는 기분입니다. 지금까지의 유럽에서는, 심지어 같은 이탈리아 안에서조차 볼 수 없었던 무척이나 낯선 모습들입니다. 역 근처에 잡은 호스텔까지 걸어가는 단 5분 만에 많은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사람, 특히 관광객이 너무 많다.'
'전반적으로 너무 북적거려서 거리가 복잡하고 지저분하다.'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다르게 차도가 복잡하고 큼지막하며 차량들도 서행하지 않고 쌩쌩 달린다.'
'집들이 전체적으로 4~5층 높이고 1층에는 쪽방 같은 가게들이 많다.'
'특히나 중앙역 근처엔 아시안 가게가 밀집해 있다'

호스텔에 체크인을 마치고 30분 정도 수면을 청하기로 합니다. 불볕 같은 더위와 거리의 풍경에 벌써 지쳤는지 몸이 휴식을 요합니다. 호스텔 방이 침대 개수에 비해서 좁은 편이지만 더위를 잊게 해주는 빵빵한 에어컨에 덕에, 정말 오랜만에 짧고도 깊은 잠에 빠집니다.

다소 할렘가의 기색이 느껴지는 테르미니 역 근처의 골목길. 숙소로 찾아가는 길이 조금 무섭게 느껴집니다

눈을 뜨니 벌써 시간이 오후 네 시입니다. 이동만으로 벌써 하루가 사라진 기분입니다. 조급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굴리며 남은 오늘을 조금이라도 알차게 쓸 방법을 생각해봅니다.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내일이 월요일인 것이 떠오릅니다. 그동안 월요일 정기 휴관으로 놓쳤던 몇몇 박물관을 상기하며, 우선적으로 박물관을 방문하기로 합니다. 마침 대부분 박물관이 7시에서 7시 반까지 운영하므로 딱 적당합니다.


숙소를 떠나, 우선은 테르미니 역에 들러 48시간짜리 로마 패스를 28유로에 사기로 합니다. 처음 방문하는 박물관은 공짜, 그 이후 관광지는 반값 할인에 대중교통까지 공짜이므로, 경제적인 로마 여행을 위해 하나 장만하기로 합니다. 처음엔 어디서 사야 할지 몰라 헤매다가 역 근처 키오스크에서 구매합니다. 카드 포장의 인쇄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가짜 카드를 산건가 의심합니다만, 다행히 멀쩡한 카드입니다.

로마 패스는 정말 별의별 곳에서 다 팝니다. 인쇄 질이 안 좋아 보여도 사기가 아닌가 봅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목적지로 정한 곳은 카피톨리노 박물관입니다. 캄피돌리오 언덕에 위치한 역사박물관으로 잘은 모르지만 평점이 가장 높은 박물관이라서 가보기로 합니다. 박물관으로 향하는 20분 간의 도심지의 풍경은 또다시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도심지 이곳저곳에 펜스가 쳐져있고 펜스 내부로는 깨진 기둥, 조각상, 건물터, 널브러진 유적들이 계속 이어집니다. 아무리 고대 로마가 대단한 제국이었다고 해도, 이천 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이렇게 그 흔적들을 남아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마치 현대의 도시가 고대의 유물과 함께 어우러져 공생하는 인상입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유적지 투성입니다. 로마 제국은 지금까지도 숨을 쉬며 살아있는 듯합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카피톨리노 박물관이 있는 캄피톨리오 언덕에 도착

카피톨리노 박물관에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대리석 조각상들과 미술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대리석 조각상들은 나체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데, 특히 근육을 잘 드러내는 역동적인 포즈와 디테일한 성기의 묘사가 눈에 띕니다. 벽에는 이탈리아의 역사를 그려낸 벽화들이 곳곳에 그려져 있고, 지하에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했다는 계단이 보입니다. 미켈란젤로가 도대체 언제 적 사람인데 눈앞의 박물관 설계자로 이야기가 나오나 봤더니, 카피톨리노 박물관이 무려 1734년에 완공된 박물관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년도가 거의 300년이 다 된 박물관이라니, 로마에 온 이후로 시간 감각이 자꾸만 이상해지는 기분입니다.

입구부터 위압감을 풍기는 카피톨리노
분명히 어느 황제의 동상과 문장일텐데, 설명이 없어 답답하기만 합니다
미켈란젤로가 설계 했다는 박물관 내부를 잇는 지하통로

박물관 내에는 전시된 다양한 전시물들도 좋습니다만,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아직 발굴 중이거나 복원 중인 작품들을 부서진 채로 그대로 전시한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도 복원과 발굴이 현재 진행 중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여실히 보여주는 전시입니다. 역사를 발견하고 연구하는 생생한 현장에 마치 제가 함께하는 듯한 기분에 괜히 스스로 뿌듯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대부분 전시물이 부서진 채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발굴과 복원의 생생한 현장들. 다음 방문엔 저 조각들이 얼마나 채워져 있을까요?

박물관에 전시된 것 작품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작품들입니다. 박물관 한가운데 전시된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 콘스탄티노플의 두상, 따로 실을 만들어 전시하던 카피톨리노의 비너스, 가장 아름답다고 느낀 대리석 동상 빈사의 갈리아인, 갤러리 정면을 가득 채운 게르치노의 성 페트로닐라의 매장, 지하에 전시된 고대 로마어와 게임판, 전망대에서 바라본 포로 로마노의 풍경 등 인상 깊게 남은 작품들이 정말 한 둘이 아닙니다. 좀 더 많은 지식이 있었다면 더 좋은 감상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제한된 감상만 즐긴다는데 아쉬움과 분함이 한가득합니다

생생하게 묘사된 사자와 말의 근육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
콘스탄티노플의 두상
팔각 전시실에 특별히 모셔진, 그 유명한 카피톨리노의 비너스
근육 묘사의 절경, 빈사의 갈리아인
층 하나를 가득 메우는 성 페트로닐라의 매장
전망대에서 본 고대의 로마유적, 포로 로마노
박물관의 지하 공간. 마치 탐험하며 해쳐나가는 재미가 일품입니다
고대 로마의 게임입니다. 플레이 방법이 무척이나 궁금해집니다.

카피톨리노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서는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길이 너무 더워 버스를 선택합니다만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사람은 만원에 울퉁불퉁한 바닥 길을 그대로 버스가 달리니 토가 쏠리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가까스로 숙소에 도착해서는, 기절한 듯이 잠을 청하는 로마의 하루입니다.

아래서 올려본 캄피돌리오 언덕
빽빽하게 적힌 버스 정류장의 안내판
차도가 전부 비포장에 자갈길 수준이라 승차감이 죽여줍니다
내리자마자 반겨주는 한식 광고가 혹해봅니다만
이탈리아는 역시 피자입니다. 장조림을 먹는 듯한 독특한 풍미!
쓰레기장 같은 골목에 위치한 호스텔로 가는 길은 아무리 달래도 안심이 되질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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