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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Mar 07. 2020

7월 20일, 48일 차, 베네치아

밤에 잠긴 도시, 베네치아입니다

오늘은 수상버스를 타고 베네치아 본섬을 벗어나 주변 섬들을 돌아다녀볼 계획이었습니다만, 아침에 눈을 뜨니 모든 것이 귀찮기만 합니다. 마침 오늘 롤챔스에서 너무나 중요한 경기들이 있기도 했고, 날도 후덥지근하고 그냥 쉬고 싶기도 하고, 한 번 떠오르기 시작한 핑계들이 멈추지를 않습니다. 잠깐의 내적 갈등 끝에 해가 지기 전까지는 호텔방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합니다. 그나마 더위가 수그러드는 저녁에 야경을 보는 것도 훌륭한 하루가 되리라고 스스로에게 위안을 삼으면서 말이죠.


오늘 오전은 방에서 죽치고 있기로 했으니 먹을걸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제저녁에 장을 봐온 스파게티 면과 토마토소스를 준비해봅니다. 명색이 유럽여행인데 라면 같은 거 말고, 파스타 정도는 해서 먹어야 구색이 좀 갖추어지지 않을까요? 파스타를 한 번도 해 먹어 본 적은 없습니다만, 조리법대로만 따라가면 분명 어렵지 않을 겁니다. 


파스타 뒷면의 설명을 보니 면을 6분 정도 삶고 가볍게 토마토소스만 두르면 될 것 같습니다. 게스트 키친으로 내려가 기구들을 찾아보니, 누가 정리하지 않고 방치한 프라이팬이 보입니다. 비계랑 면이 잔뜩 들러붙은 채 꽤 오래 방치된 모양입니다. 요리를 시작하기도 전에 기본 매너도 지키지 않은 누군가를 욕하며 요리 준비를 시작합니다. 펄펄 끓는 냄비에 면을 삶으면서,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크러쉬드 레드페퍼를 적당히 뿌리고 약불로 달구어 오일에 매운맛을 입힙니다. 적당히 삶아진 파스타 면을 꺼내서 체에 거르고 준비하는데, 웁스, 면을 너무 많이 삷아 2인분은 되는 것 같습니다. 조금 많이 먹으면 된다고 애써 달래며 요리를 계속해나갑니다. 미리 기름을 데워 둔 프라이팬에 면을 두르고 토마토소스를 들이 부운 후 강불에 충분히 볶아줍니다. 마무리로 접시에 옮겨 담아 통후추를 뿌려줍니다. 이걸로 제 나름의 특제 토마토 베이스드 레드 페퍼 스파게티가 완성입니다.


사실 볶음 우동 레시피 느낌으로 즉석에서 손 가는 대로 만들어본 건데, 원래 스파게티를 이렇게 만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비주얼만 봐선 고추장을 버무린 검은 고무줄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애초에 산 면이 흑색 면이라서 비주얼이 엉망이라고 애써 마음을 달래면서, 첫 입을 떠서 입에 집어넣어봅니다. 다행히도 역겹지만 참으며 입에 욱여넣을 정도는 됩니다. 면이 원래 그런 건지 덜 삶아진 건지 푸석푸석한 식감에 면 자체가 갖고 있는 콩 맛과 너무 많이 뿌려진 토마토소스의 신 맛이 이상하게 섞여서 먹는데 매우나 거슬립니다. 여기에 은은하게 베인 레드페퍼 향이 매운맛을 돋아주어 괜히 더 기분이 나쁩니다. 통후추를 더, 더, 더 투하해서 어떻게든 모든 향과 맛을 후추 맛으로 덮어버리는데 기분 나쁜 식감만은 도무지 처리가 안됩니다. 자판기에서 비싼 돈을 주고 콜라 두 병을 뽑아서 어떻게든 쑤셔 넣어 봅니다만, 이대로 더 먹었다간 진짜로 토해버릴 것 같아서 4분의 1 정도는 남기고 그대로 버립니다. 아무리 낯선 식재료들로 도전했다고 해도 이런 음식물 쓰레기가 만들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입니다. 어거지로 입에 쑤셔 넣은 것들이 금방이라도 올라올 것 같아 점심도 먹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계속 삼켜봅니다.

다양한 향신료를 무료로 사용할 수 이는 게스트 키친, 이제 각종 조미료를 이용해서 실력 발휘를 해볼까요?
어.. 음... 정성을 들여서 더 기분 나쁜 맛으로 탄생한 걸작품
차라리 먹는 걸 빨리 포기했더라면.....

메스꺼운 속을 달래며 해가 지기 시작할 때까지 호텔 방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냅니다. 틀어박혀서 하루 종일 롤을 본 보람이 있게 응원하는 팀(담원)이 모두 중요한 경기들을 이겨냅니다. 기분 좋게 시간을 낭비하면서 허기가 진 배를 KFC에서 포식을 해봅니다. 베네치아의 한가운데서 주말에 집에서 뒹굴거리는 나태함이라니, 이렇게 시간과 돈을 흥청망청 낭비하는 즐거움은 세상에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나른한 행복감 뒤에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이기질 못하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베네치아의 밤거리를 걸어봅니다. 

오늘의 여정을 떠나봅니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노을빛이 바닷물과 건물에 스며드는 풍경은 여운이 한가득 합니다. 등 뒤로 노을빛을 품고 작은 다리를 건너가는 곤돌라가 보입니다. 한 승객이 반주도 없이 세레나데를 부르기 시작하자, 주변 사람들이 떼창을 합니다. 노을빛 속으로 사라져 가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멍하니 바라볼 뿐입니다. 시간은 흐르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풍경은 어느 틈에 벌써 어둠이 짙게 깔립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베네치아
어스름한 어둠과 조명불과 기념품 가게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대부분의 통행길이 골목길이라 어둠에 잠기면 큰일 날까 걱정도 듭니다만 다행히 가로등 불도 밝고 다니는 사람도 많아 안심이 됩니다. 오히려 곳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댄스를 추고, 락을 연주하는 밴드와 열광하는 사람들까지 시끌벅적한 베네치아의 밤이 시작됩니다. 

어스레한 골목길을 지나
동네 작은 락 콘서트
리알토 다리에 모여있는 사람들
조명불과 상점가
물 표면에 아른거리는 조명 불과 수상의 곤돌라
이제 완연한 어둠입니다

흥에 이끌려 좀 더 어두운 곳으로, 구석지고 허름한 곳까지 발을 옮기다 보니 빛도 없는 막다른 곳까지 오게 된 사실을 깨닫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을 깨닫고 뒷걸음을 치다 보니 아이들 몇이 제게 플라스틱 쓰레기를 들고 오는 것이 보입니다. 저한테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며 자기들끼리 마구 웃는 것이 놀려먹는 건지 위협하는 건지 당황스럽게 느껴집니다. 빛이 없어서 아이들의 모습이 정확하게 눈에 들어오진 않습니다만, 지저분한 모습이 형편이 좋지 않은 아이들인 건 분명합니다. 불안한 마음을 쳐내듯이 손을 흔드는 제스처를 몇 번 취하자 다행히 아이들은 챠오를 외치며 순순히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멀어져 갈수록 더욱 크게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꺼림칙한 기분이 가라앉지 않습니다. 그대로 온 길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오니 다행히 사람들의 행렬이 보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골목길을 향하다보니
점점 늘어나는 쓰레기 더미와 수상한 골목. 왜 이런 곳으로 들어왔을까요?
정신을 차리고 달리다 보니 다시 상점가가 보입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길을 갑시다

이제 완연한 어둠이 깔린 베네치아의 밤거리는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기념품 가게는 화려한 조명에 아련하게 물들고, 리알토 다리는 어둠 속에서 낭만을 찾는 사람들로 한가득합니다. 화려한 조명 속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인파에서 멀어지고 다시 골목길로 향하는 저는 순식간에 외딴곳에 홀로 남은 이방인으로 돌아갑니다. 이제 완전히 검게 물든 수면 위로, 배들이 지나가면서 만들어진 파형에 반사된 조명 불들이, 흔들리는 모습을 혼자 넋 놓고 바라보는 한밤의 베네치아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수상버스
한 밤 중에도 곤돌라는 열일합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어두운 골목길의 연속
너무나 맛나 보이는 캔디!
로망의 수상 호텔
이 시간에도 열일하는 응급선
베네치아 여행의 첫 시작지, 산타루치아 역에서 본 야경입니다

그건 그렇고 한밤중마저 이렇게 시끄럽다니 동네 주민들이 불편해할 만도 합니다. 동네 곳곳에 내걸린 ‘No Grandi Navi’라는 깃발이 신경 쓰여 찾아보니 동네 주민들의 반 여행객 운동이라고 합니다. 관련 홈페이지에 따르면 대형 크루즈와 함께 너무 많은 관광객들이 베네치아로 몰려들면서 주민들의 생활이 점점 더 힘들어진다고 합니다. 관광도시로 베네치아에 사람들이 몰려들수록 땅값과 임대료가 올라가고 물가가 상승하여 주민들의 삶을 위한 시설들은 철수하고 관광객들을 위한 시설들만 남게 되는 거죠. 또한, 원래라면 지역 주민들에게 임대되었을 집이, 더 많은 수익을 남길 수 있는 에어비앤비로 전환됩니다.  그 결과 동네 주민들은 베네치아에서 살기 점점 힘들어지고 섬을 떠날 수밖에 없어 점점 베네치아 섬의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소음, 생활공간 침범부터 주민들에게 관광수익이 순환하지 않는 총체적 난국인 상황이죠. 관광업이 호재가 될수록 지역 주민들의 경제와 삶이 망가져가는 아이러니한 구조적 문제입니다. 이런 현상을 오버 투어리즘(over tourism)이라 부르는데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제가 별생각 없이 다니는 관광이 이런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일입니다. 베네치아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최종적으로는 지속 가능한 관광을 추구하기 위해 EnjoyRespectVenezia 캠페인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관광객들에게 주민들에게 피해가 갈 행동을 삼가게 하고 관광객들이 가능한 지역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캠페인입니다. 한 사람의 여행자로서 ‘지속 가능한 관광’이라는 키워드를 고민해보는 베네치아의 하루입니다.

대형 크루즈 선은 NO
여행지를 존중하는 여행, 생각할 거리가 한가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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