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 골목, 낭만, 모험, 여행과 베네치아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반겨준 것은 후덥지근한 날씨입니다. 햇살은 강하게 내리쬐고 습해서, 조금만 걸어도 땀범벅이 됩니다. 걷기도 힘든 날에 사람들마저 북적거리니 도무지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현기증이 가시질 않습니다. 불쾌지수가 하늘을 치솟는 날인데 사람들은 지치지도 않는 걸까요? 평소에 쓰고 다니던 모자로도 성이 차지 않아서, 네이비 색 우산을 양산처럼 쓰고 거리를 거닐어 보기로 합니다. 전날 숙소에 박혀서 푹 쉬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컨디션만은 나쁘지 않습니다.
오늘의 목표는 베네치아 본 섬을 걸어서 완주해보는 것입니다. 베네치아는 본 섬과 함께 여러 섬들로 구성된 독특한 수상도시로 그중에서 가장 중앙 섬에 해당하는 본 섬을 둘러볼 생각입니다.
베네치아는 동네 풍경부터 매우 독특한 도시입니다. 건물과 건물 사이로는 작은 운하와 골목길이 얼기설기 얽힌 미로 같은 동네입니다. 운하 사이의 골목과 골목은 수많은 다리들이 연결해 주는데, 다리를 건너다보면 수많은 배들이 다리 밑으로 지나가는 것이 보입니다. 모터로 움직이는 수상보트, 사람이 손수 모는 검정 곤돌라, 너나 할 것 없이, 그 좁은 물길을 어떻게 헤치어 나가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길가를 걸으며 수도 없이 물길을 가르는 곤돌라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옵니다. 워낙 유명한 베네치아의 명물이기도 하고, 여러 매체에서 본 낭만 같은 것도 있어서 베네치아에 오면 꼭 타봐야겠단 생각이었습니다만... 막상 베네치아에 와보니, 수로의 물이 생각보다 더러워서 시궁창 냄새가 올라오는 것이 곤돌라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집니다. 게다가 고작 20분 타는데 80유로(약 10만 원) 가량의 가격은 너무 비쌉니다. 곤돌리에레가 불러주는 세레나데의 낭만은 비싼 팁 때문인지 한참을 돌아다녀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의 분위기마저 같이 나눌 사람이 없다면, 곤돌라는 더 이상 아무래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그냥 걷는 것 자체가 너무 좋습니다. 겨우 두 사람이 걸어 다닐 만한 좁은 골목길을 사이사이로 돌아다니는 것이 꼭 미로 속을 헤매는 것만 같아 재밌습니다. 골목 하나 넘어가면 작은 다리가 나오고 또 다음 골목을 넘어가면 작은 다리가 나오고, 다음 골목 너머엔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두근거리게 합니다. 이렇게 걷다가 작은 다리 밑으로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배를 보면 괜히 신나서 다리 위에서 손을 흔들어줍니다. 구글 지도조차 제대로 찾아주지 못하는 골목길들을 따라 베네치아를 정처 없이 떠돌아봅니다.
구글 지도가 제대로 동작하지 않으므로, 베네치아 본 섬을 우수법(오른손으로 벽을 훑으며 걷는 미로 탈출 알고리즘의 일종)으로 바깥쪽부터 안으로,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봅니다. 골목을 넘어갈 때마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풍경을 눈에 새깁니다. 어느 곳에선 큰 운하가, 어느 곳에선 광장과 공원이, 어느 곳에선 성당과 교회가, 어느 곳에선 화려한 기념품 거리가, 어느 곳에선 폐허 같은 풍경이, 어느 곳에선 널따란 항구가 나옵니다. 여러 풍경이 담긴 미니어처 박스를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호기심쟁이가 된 기분입니다.
이렇게 정처 없이 골목을 누비다 보니 우연히 유엔난민기구의 전시전을 발견합니다. 골목 한구석의 집을 빌려 난민 출신 작가들의 작품과 유엔난민기구의 활동을 전시 중입니다. 원래 전시관도 아닌 작은 집 하나를 내어 전시를 하면 누가 찾아올까 싶기도 하지만 오고 가며 한 번씩 들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난민 문제에 대해서 관심도 많고, 평소에도 유엔난민기구에 기부를 하는 터라 괜히 더 반갑고 뿌듯합니다. 전시된 작품들을 보며 난민이 발생하는 현실과 난민을 지원해야 하는 이유, 시스템적 한계와 근시안적인 시선들까지 여러 생각이 교차합니다. 언젠가 그 생각들을 정리해서 글로 쓸 기회가 오기를 잠시 기도해봅니다.
골목에서 나와 잠시 거리를 거닐다 보니, 곧 Chiesa di San Barnaba라는 작은 성당과 만납니다. 신기하게도 성당 건물 전체를 내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역학 장치들을 전시 중입니다. 며칠 전까지 베네치아 비엔날레로 다 빈치 500주년을 기념하여 베네치아에 수많은 다 빈치 전시가 열렸었는데, 비엔날레가 끝나고도 전시 마감을 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운이 좋게도 성당 내에 전시 중인 다 빈치의 역학 장치들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습니다. 기어, 체인, 베어링, 펌프, 리니어 기어 등 오늘날 자주 사용되는 역학 장치들의 목재 구현본을 직접 만져볼 수 있습니다. 이런 기초 장치에 거중기와 투척 무기, 기관총, 자전거와 비행 장치까지 흥미로운 것 투성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이런 장치들을 고안한 천재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만, 15세기에 이런 장치들을 고안했다는 것은 몇 번을 확인해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이런 천재의 생각과 흔적들을 훑어볼 수 있다니 복에 겨운 여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베네치아 섬에는 또 많은 미술관들이 있습니다. 이 좁은 섬에 무슨 미술관이 이렇게 많은지 찾아보는 데만 한세월입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체 비례도 원본입니다. 아쉽게도 고전 작품보단 현대 전시물이 더 관심이 더 가기 때문에,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골목길에 골목길을 걷다고 골목길 모퉁이를 돌면 기묘한 조각상들이 반겨주는 작은 정원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구겐하임 컬렉션에는 기묘한 추상예술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추상예술의 거장인 몬드리안과 잭슨 폴록의 작품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특히 캔버스에 마구잡이로 흩뿌려 놓은 듯한 잭슨 폴록의 작품에서 강렬한 역동성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특별 전시관에서는 장 아르프의 인간을 형상화한 듯한 기묘한 조각상들이 전시 중인데 반죽덩어리 같은 작품들을 보니 속이 좀 메스껍습니다. 현대 예술의 혼돈스러운 면을 좋아하긴 하지만, 가끔 그로테스크한 부분들을 받아들이기 힘든 작품들도 종종 있습니다. 장 아르프의 작품들이 만드는 기묘한 불쾌감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나는 걸까요?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이제 산마르코 광장으로 걸어가 봅니다. 산마르코 대성당 앞으로 펼쳐진 광장은 사람과 비둘기와 갈매기들이 한 데 뒤섞여 북적북적합니다. 어느 때처럼 소매치기와 사기꾼들을 경계하는데, 의외로 잡상인이나 사기꾼들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이탈리아의 관광지와는 달리,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자경단처럼 순찰하는 모습이 눈에 뜨입니다. 단순히 사기꾼들 뿐만 아니라, 음식을 먹거나 어디 걸터앉은 사람들을 까지 제재합니다. 바닥에 걸터앉아 젤라토를 먹으며 잠시 쉬려고 했던 저도 가볍게 주의를 듣고 살짝 혼쭐이 납니다.
잠깐의 휴식을 마치고는, 오늘의 메인 코스인 산마르코 대성당에 들어가 보기로 합니다. 내리쬐는 햇빛 아래서 우산을 양산처럼 쓰고서는 대성당에 들어가고자 하는 기다란 줄에 합류합니다. 한참을 기다리 보니 한 카페 앞에 마련된 무대 앞에서 어디서 들어본 곡이 들려옵니다. 골든벨에서 듣던 곡인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나니 반가운 기분입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최후의 n인이 남을 때 틀어주던 'Time to Say Goodbye'라는 곡입니다.) 즉석에서 연주되는 클래식 음악과 함께하는 식사라니 상당히 호화로운 식사라고 속으로 감탄이 나옵니다.
열심히 줄을 서 들어간 산마르코 대성당은 호화로운 장식과 함께 황금으로 도배된 특이한 성당입니다. 꼭 이슬람 사원을 연상케 하는 내부 장식은 너무 화려한 나머지 성당이라기보단 사치스러운 궁전이란 느낌이 듭니다. 내부 박물관에 들어가 보거나 테라스에 올라 시내 경치를 구경할 수도 있겠지만, 성당도 생각보다 마음에 들지 않고 날도 덥기에 그늘진 바람을 찾아서 그냥 나오기로 합니다. 기다린 시간이 조금 아깝긴 합니다.
성당 구경을 마치고 나니 오후 다섯 시 쯤됩니다. 이미 입장시간을 넘긴 두칼레 궁전 옆의, 응달진 곳에 앉아 하염없이 풍경을 구경합니다. 이 궁전 바로 옆으로 죄수들이 수감되면서 다시는 볼 수 없는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통곡을 했다는 탄식의 다리가 있습니다. 햇빛으로 아스라이 물들어가는 다리 밑으로 곤돌라들이 오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죄수들이 통곡할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감탄합니다. 저무는 해가 더 아련하게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에 대해서 이런저런 고민을 많이 해봅니다. 슈퍼마켓인 coop에서 값싼 식재료 값에 혹해 파스타 재료인 면과 토마토소스를 사 옵니다. 내일 아침은 가볍게 해 먹는 파스타로 결정합니다. 그대로 돌아오는 길에는 골목골목마다 펼쳐진 피자집의 유혹을 지나치지 못하고는, 냉큼 들어가 피자를 주문합니다. 도우도 두툼하고 토핑도 두툼하고 크기도 커다란 피자 한 조각을, 탄산과 함께 먹는 그 맛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베네치아의 하루입니다.
PS. 베네치아의 귀여운 동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