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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Feb 17. 2020

7월 18일, 46일 차, 베네치아

잠시 멈추어 여행을 되새겨보는 베네치아입니다

아침이 다가오는 소리에 누운 자리에서 눈이 저절로 떠집니다.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할까?' 다소 맥 빠지는 질문이 마음속에서 들려옵니다.


스위스에서 멋진 날들을 보내고 난 이후로 아무래도 여행이 시큰둥해진 기분입니다. 쉽지 않은 여행길을 계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모든 것이 다 신기하고 새롭게 느껴져서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었지만, 점점 그 감동에 무감각해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듭니다. 아무 생각 없이 걷기만 했던 밀라노의 어제는 별다른 감흥을 찾을 수 없었던 하루입니다. 분명히 새롭고 낯선 환경이었지만 호기심보다는 돌아다녀야 한다는 의무감이 겨우 몸을 이끌었던 하루입니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독려하던 감상과 생각들마저 '그래서 그게 뭐가 중요한가?'하고 흘려버립니다.


아무래도 비슷한 자극과 경험이 반복되면서 여행에 매너리즘이 온 듯합니다. 여행 45일 차에 더 이상 여행에 자극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에 잠깁니다. 물론 단순히 컨디션이 떨어진 것일 수도 있지만, 이 권태감이 계속된다면 여행은 정말로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행 자체가 만약 의무감만이 남아버린다면, 앞으로 남은 40일가량의 일정을 의무감으로 가득 채워버릴 것만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당장에 '여행이 더 의미가 없다면 매일 돈 십만 원가량이 사라지는 사치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같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이런 생각에 잠긴 채 자리에 누워서 꼼짝달싹을 안 합니다만, 여행 시계는 매정하게도 흘러만 갑니다. 일단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몸부터 움직여보도록 합니다. 


오늘의 일정은 밀라노에서 기차를 타고 베네치아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반쯤 떠밀리듯이 도착한 밀라노 역은 첫인상처럼 인천공항을 떠오르게 합니다. 플랫폼에서 출입 게이트를 통과하여, 미리 예약된 좌석에 앉아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승무원이 트롤리를 끌고 다니며 마치 기내 서비스처럼 간단한 간식을 제공합니다. 처음에는 돈을 지불하는 건가 싶어 받은 따로 받지 않고 거절합니다만, 다른 사람들을 관찰해보니 무료로 제공되는 서비스인걸 깨닫습니다. 저도 간단하게 콜라와 쿠키 정도를 부탁합니다.

공항을 방불케하는 밀라노 첸트랄레 역사의 풍경
기내식만 안 나올 뿐, 거의 비행기 급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탈리아의 고속열차 이딸로입니다

밀라노에서 기차를 타고 세 시간가량을 달리자 드디어 목적지인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역에 도착합니다. 세련된 공항을 떠오르게 했던 밀라노 첸트랄레와는 달리, 플랫폼에 내리자마자 올라오는 바다내음과 습기가 조금 정겨운 바닷가 동네의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인천 출신이라서 그런지, 인천역에서 월미도로 이어지는 바닷가의 향수가 떠오릅니다.) 

베네치아가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촬영 장소여서 그런지, 마침 스파이더맨 광고가 나옵니다 
기차가 바다를 건너고, 곧 수상도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항구 느낌이 물씬 넘치는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역사

플랫폼에서 내려서 캐리어를 끌고 역사 밖으로 나서니, 그 앞에 펼쳐진 풍경에 시선을 압도당합니다. 너비가 좁은 물길을 따라서 크고 작은 배들이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세상에서 처음 보는 수상도시를 만난 겁니다. 이 아기자기한 도시에 땅 위고 물 위고 사람으로 가득 차 바글거리는 것이 정말로 유명한 관광지라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사람과 배로 북적거리는 이색적인 풍경

베네치아의 지도를 보면, 바다 위에 작은 육지 조각들이 떠있고 중간중간에 수많은 작은 다리들이 놓여 있는 특이한 구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크고 작은 다리들이 배를 통과시키기 위해 아치형에 중앙이 높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런 까닭에 다리가 계단을 오르내리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미리 확인한 숙소 위치가 베네치아 본섬의 중앙부로 다리 몇 개를 건너야 하는데, 20kg나 되는 캐리어를 들고 다리를 계속 오르내르려니 죽을 맛입니다. 역사 앞에서 무거운 짐을 대신 옮겨주는 포터들이 고생하는 저에게 보내는 눈빛을 애써 무시하고 계속 목적지로 향해봅니다.

짐을 운반하는 포터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수상택시 정류소와 다리를 통과하는 유람선
다리에서 바라보니 훨씬 더 많은 배들이 보입니다
베네치아의 모든 길은 좁은 골목과, 좁은 물길, 그리고 작은 다리의 연속입니다. 캐리어를 끌고 다니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ㅋㅋ) 환경입니다

약간의 고생 끝에 도착한 호스텔에선 고즈넉한 건물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습기로 가득한 동네에 목재로 지은 지 족히 몇십 년은 되어서 디자인도 예스럽고 낡은 티가 많이 나지만,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인지 지내기에 불편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숙소 값이 비싼 편인 베네치아에서 일박 5만 원 내외에 이 정도 퀄리티의 일인실을 쓸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운이 좋은 편입니다. 습하고 더운 것이 걱정이긴 한데 한여름의 베네치아에서 지내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요?

제법 고즈넉한 분위기의 호스텔. 기회가 되면 저 피아노는 꼭 쳐보고 말겁니다

여행의 의욕을 다소간 상실한 오늘은, 먼 거리를 이동했다는 것에 만족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기로 합니다. 골목길 몇 개를 건너면 나오는 근처 피자 가게에서 간단히 저녁으로 먹을 피자를 사 와서는 침대에 누워 태블릿으로 유튜브를 켜봅니다. 한참을 보지 않았더니, 구독하는 채널에 봐야 할 영상들이 쌓여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가는 영상을 보고 있자니 몸이 들러붙는 것처럼 나른해집니다.

맛난 피자와 콜라로 오늘 하루를 보냅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잠깐 잠에 들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을 잔 것은 아니지만 꿈속의 선명한 이미지가 아직도 생생하기만 합니다.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여행에 대한 강한 열망이 담긴 메시지들을 보게 되는 그런 꿈입니다. "너는 여행을 떠나야 해" "너는 여행을 떠나야만 해", 그렇게 강렬하게 외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잠에서 깹니다. 도무지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아서, 일어나자마자 여기가 어딘지부터 확인해봅니다. 그리고 아직 여행이 40일이나 남아있다는 사실을 실감해버립니다.


아직까지도 생생한 꿈을 곱씹으면서 여행이 제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스스로에게 '여행은 일상의 도피처 정도면 적당하다'라고 다독인 말을 떠올려봅니다. 40일이 넘는 여행 동안 저는 매일같이 돌아다니고 글 쓰고 내일의 일정을 세우기를 반복하면서, 여행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일상을 만들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루틴에 슬슬 지겨움을 느끼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듭니다.


일상의 도피처로써의 여행이 또 다른 일상이 된다면 저는 여행으로부터도 다시 도망쳐야 하는 걸까요? 생각을 거듭할수록 이상할 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여행을 어떻게 지속해왔을까요? 매일같이 여행하고 글을 쓰는 일들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고 항상 즐거운 일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죠. 힘들거나 지칠 때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더 해보자. 마무리는 지어야지'라고 다독이면서, 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몸이 가는 대로 여행을 계속해나간 게 아닐까요?


어느 길에든 고되고 지치게 만드는 루틴이 존재한다면 결국 중요한 것은, 이루고 싶은 것, 달성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을, 목표를, 제가 향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설사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바랐던 일이고 계획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과정이 즐거울 수는 없을 겁니다. 힘들 순간도 지겨운 순간도 언젠가는 마주해야 합니다. 어쩌면 과정의 태반이 그런 순간으로 채워져 있을지도 모르죠. 그것을 이겨내는 것은 습관, 성실함과 노력, 인내, 그리고 약간의 다독임과 희망찬 미래에 대한 기대가 아닐까요? 그동안 제가 도망치고 싶었던 일상은, 되고자 하는 미래의 이미지가 뚜렷하게 없었던 것과 지겨운 과정을 이겨내기 위한 요령이 부족했기 때문일 겁니다. 어쩌면 너무 거대한 목표를 삼고 완벽한 성취만을 추구했기에, 시작도 전에 포기하거나 막상 시작하니 너무나 많이 필요한 노력에 질려 금세 포기해버렸던 걸지도 모르죠. 그러한 일이 반복되면서 제 일상은 해야만 하는 일과 빈 시간으로 채워져 갔고 결국 의무만으로 점철된 벅찬 삶이 된 걸지도 모릅니다. 의미도 목적도 잃어버린 채 그냥 그 자리에서 고통을 감내하기만 하고 있었던 거죠.


다시 스스로와 여행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여행을 다니면서 깨닫게 된 것은, 새로운 것을 만나는 호기심이 주는 무한한 즐거움과 설렘, 그리고 갖은 고생 속에도 계속 나아가고자 하는 스스로의 동력입니다. 그 동력이 오기 내지는 발버둥일지라도,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있었던 잠재된 스스로를 찾은 것만 같아 가슴을 벅차게 하는 기분 좋은 발견입니다. 


그리고 그 동력을 꺼뜨리지 않은 채 꾸준히 걸어 나갈 수 있는 것은, 결국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낙관, 그리고 잠깐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 덕분일 겁니다. 살면서 제가 하는 일, 겪는 일들이 전부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닐 겁니다. 제가 선택한 일들이라고 할지라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난관에 부딪힐 겁니다. 그럴 때면 '나는 왜 이런 일들을 겪어야 하는가?', '나는 왜 이런 선택을 했는가?' 한탄하기보다는 '이다음에는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라고 스스로를 추스르는 낙관이 제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구구절절이 느낍니다. 만약 스스로를 다독일 기력이 없다면 잠시 생각하기를 멈출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할 겁니다. 일상의 도피로 시작한 여행은, 분명히 무섭고 힘든 것들로부터의 도망으로 시작된 것이지만, 그 길에서 지친 몸을 쉬며 다음을 바라보기 위한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으니 제가 무엇 때문에 여행에 지쳐있었는지도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크게 고민할 것도 없는 일상에 제 마음이 쫓겨다닐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너무나 아름다운 도시 베네치아에서의 남은 날들을 생각하니 다시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행복한 내일의 여정을 꿈꾸는 베네치아의 하루입니다.

문득 오늘 역에서 봤던 커플이 생각납니다.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었던 저 커플에게 여행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베네치아의 골목길에서 정처 없이 헤맬 뿐인 제게 여행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갈매기 씨는 여행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어떤 답을 해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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