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와의 첫 만남, 밀라노입니다
여기는 밀라노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잠을 깨우는 두 청년의 대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니 이탈리아어 특유의 억양을 단박에 알아차립니다. 같은 방을 쓰던 두 청년이 이탈리어어 특유의 억양으로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고, 여기가 이탈리아구나 드디어 실감하게 됩니다. 이탈리아어나 독일어나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인 건 마찬가지입니다만, 문외한인 제가 들어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억양의 차이가 확실히 크게 느껴집니다. 제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걸 눈치챈 건지, 아침부터 잠을 깨워서 미안하다고 사과합니다. 저는 예의 바른 두 친구에게 웃는 말로 괜찮다고 전하며, 좋은 여행이 되길 바란다고 작별인사를 합니다. 두 청년이 떠난 뒤에는, 저는 며칠간에 누적된 피로에 다시 잠을 청합니다.
다시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 보니 아침 시간이 조금 지났습니다.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할지 잠시 생각해봅니다만,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산책 정도나 해보기로 합니다. 구글 지도에서 추천해주는 명소들이 몇 곳이 있으니 가볍게 설설거리기로 합니다. 아무래도 스위스에서의 경험이 환상적이었던 데다가, 요 며칠 강행군을 한 여파가 몸에 크게 남아있다 보니 의욕이 크게 나질 않습니다. 게다가 이탈리아의 날씨가 너무나 후덥지근해서는 도무지 걸어 다닐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처음에 들러본 곳은 도시 북쪽에 포르타 베네치아, 포르타 누오바, 가리발디 문, 스포르체스코 성, 아르코 델라 파체를 경유하며 구경하는 워킹 투어 코스입니다. 도로 한복판에 세워져 있거나 광장이나 공원에 세워진 문들은, 거대한 개선문처럼 당당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성문 크기가 크기 때문에 멀찌감치 사진을 찍어야 한 화면에 다 들어오는데 대부분의 문들이 도로 한가운데 있어서 제대로 사진을 찍기가 쉽지 않습니다. 몇몇 개선문들을 건너다보니, 밀라노의 요새라는 스포르체스코 성은 상당히 높고 투박하게 생겼는데, 꼭 탈옥이 절대 불가능한 감옥처럼 느껴집니다. 내부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몇 개가 전시 중입니다만 크게 관심이 동하지 않아서 성 내부를 따라 한 바퀴 산책을 하고 돌아 나옵니다.
밀라노 거리를 걸으면서 느낀 건데, 확실히 패션의 도시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거리에 보이는 세련된 빌딩들에 예술적 시도가 가미되어 다양한 색감의 도시를 느낄 수 있습니다. 길거리 사람들의 패션도 눈에 확 들어옵니다. 여자들이 강렬한 색감의 드레스와 래더 부츠로 존재감을 뽐내는 것도 눈에 띄지만, 남자들의 패션은 위압감과 경외심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기장이 긴 청바지와 면바지에 빳빳한 셔츠 한 장을 걸쳐 입는데, 단순한 패션이 세련되어 보인다니 놀라울 뿐입니다. 특히 큰 키와 넓은 어깨에 셔츠를 입고, 단추 두 개 정도 풀어헤치고 소매를 말끔히 걷어올린 모습이 야성미 넘치는 이탈리아 남자의 전형입니다. 특히 얼굴이나 가슴팍에 수염을 잔뜩 기르고 드러내는 게 인상 깊습니다.
남은 산책은 꼬이는 일의 연속입니다. 산타 마리아델레 그라치에 교회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그려져 있지만, 예약이 없으면 관람을 할 수 없습니다. 오피스에 물어보니 벌써 석 달치 예약이 다 차있다고 합니다. 별 수 없이 두오모로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아파리 광장에 가운데 손가락 조각상이 인상적입니다. 원래는 손 모형만 덩그러니 있는데, 무슨 광고 이벤트가 있는지 넷플릭스 옷을 입은 사람의 동상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인상적인 표정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고 있는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깊게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두오모는 정말로 거대한 대성당입니다. 그 크기와 화려환 외관도 놀랍습니다만 무엇보다 새하얗게 백색으로 빛나는 외관이 대단합니다. 그동안 성당들의 봐온 칙칙한 색감과는 달리 순백색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모습은 세월을 가늠해볼 수조차 없이 갓 지어진 새로운 성당처럼 느껴집니다. 이 위엄 넘치는 성당 앞으로 펼쳐진 넓은 광장에는 사람들과 사람 아닌 것들로 가득 차 매우 혼잡합니다. 비둘기가 광장에 자리를 잡은 건지 동상은 비둘기로 덮여있고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비둘기가 광장 이리저리를 돌아다닙니다. 멀리서 보면 사람 반 비둘기, 반 광장을 채우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혼잡한 인파와 조파를 뚫고 성당 입구로 향하는 길에 잡상인 같은 사기꾼들이 달라붙습니다. 전에 영상으로 한 번 본 팔찌 사기꾼들인데, 주로 흑인들이 팔찌를 제게 떨어뜨리고 주워달라고 할 때 팔에 채워버려서 강매를 한다고 합니다. 제 손에 비둘기 모이를 쥐어주려고 하면서 비둘기들이 손에 달려들었을 때 팔찌를 채우는 변형된 수법을 쓰는데 이런 수법에 걸려줄 이유가 없습니다. 곳곳에서 희생자가 터져 나오는 것을 지켜보며 제게 달라붙는 사기꾼들을 무시하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모이를 무료로 준다며 비둘기랑 같이 사진 찍으라고 다가오는 사람들한테 나는 비둘기를 증오한다고 절대 주지 말라고 이야기하니까 모이 주기를 포기하며 저한테 엄지를 치켜세우는 게 좋은 변명이었다고 비꼬는 것 같아 기분이 조금 나쁩니다.
어쨌든 밀라노 두오모를 내부를 구경하고 싶어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30분쯤 기다려 표를 살 때쯤 돼서야 제가 출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대성당 입장 규정은 복장 규정부터 시작해서 소지품 검사까지 빡빡하게 진행하는데, 하필 제 가방에 기념품으로 산 스위스 아미 나이프가 있습니다. 성당 내부에 흉기로 사용될 수 있는 물건은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데 따로 짐을 보관해주는 곳이 없어 성당 내부로 들어가려면 제 소지품을 처분해야만 합니다. 성당 한 번 들어가자고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나이프를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저는 내부 관람을 포기하기로 합니다.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저녁 시간이 조금 지났습니다. 하루 종일 돌아다녔는데 중요한 전시물들은 결국 제대로 구경하지 못한 하루입니다. 처음으로 보는 사기꾼들 기억에 남는 밀라노의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