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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Jan 25. 2020

7월 16일, 44일 차, 융프라우

Top of Europe, 융프라우입니다

어젯밤, 오늘의 일정을 계획하다 보니 문제 하나를 깨닫게 됩니다. 오전에 체크아웃을 하고 융프라우를 올라가야 하는데, 짐짝 같은 캐리어를 어떻게 할지 대책이 필요합니다. 융프라우요흐를 향하는 일정의 출발지인 인터라켄 동역의 코인라커에 보관할 수 있습니다만, 코인라커가 현금 전용이라서 골치가 아픕니다. 이미 스위스 여행을 시작할 때 환전한 스위스 프랑은 전부 사용했고, 오늘이 스위스의 남은 마지막 일정인데, 고작 코인라커에 사용할 동전이 필요하다고 ATM에 비싼 수수료를 물고 다 쓰지도 못할 스위스 프랑을 뽑자니 도무지 수지타산에 맞질 않습니다. 계속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다가 혹시 숙소에 맡기고 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러 리셉션을 찾아가 보니, 다행히 체크아웃을 한 이후에도 당일날 저녁까지 숙소에 짐을 맡겨놓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한숨 덜고 숙소에 짐을 맡깁니다만, 융프라우를 올라갔다 온 다음에 역에서 거리가 꽤 되는 숙소까지 다시 왕복을 해야 하므로, 빠듯한 시간의 압박은 여전히 마음의 부담으로 남습니다.

숙소의 코인라커에 짐을 맡기고 출발해봅시다
숙소 로비에서 이렇게 융프라우요흐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건 진짜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 이유로, 하루를 여유 있게 활용하기 위해서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움직입니다. 전날 두 시 반까지 글을 쓰다가 잠이 들었기에 매우 피곤합니다만, 꾸물거리다가 행여나 국제선 기차를 놓치거나 짐을 못 찾는 사태가 일어나면 정말로 감당이 안되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들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부추겨봅니다.


출발 준비와 체크아웃까지 마치고 숙소 밖으로 나오는 문을 여니, 너무나 화창한 날씨가 반깁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산등성이를 따라 짙게 깔려있던 안개와 구름은 오늘은 한 조각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항상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던 융프라우의 빙산이 오늘에서야 그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일정을 미루어 화창한 날 융프라우를 보러 가기로 한 선택은 정말 탁월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저만 했던 것이 아닌 모양입니다.

구름이 잔뜩 끼어 신선이 사는 동네 같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너무나 맑은 인터라켄

인터라켄 동역에 도착하니 사람이 정말 바글바글합니다. 안내소에서 대기표를 뽑는데 제 앞에 대기 인원이 30명 정도 보입니다. 원래는 9시에 출발해서 융프라우요흐에 11시쯤 도착해 3시간 정도 여유 있게 보고 눈썰매까지 탄 다음 4시쯤에 다시 인터라켄 동역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이미 앞 시간의 예약이 다 차서 융프라우요흐 도착은 1시 반에 1시간 반 정도 구경하고 겨우 인터라켄으로 5시 20분에 돌아오는 표를 받습니다. 융프라우 관련 정보를 찾을 때에는 예약이 밀린다는 말이 없었는데, 일주일 내내 비가 오다가 딱 하루 맑은 날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너무나도 몰려있는 모양입니다. 정말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움직여서 다행이지 만약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부렸다면 코앞에서 융프라우를 올라가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릴 뻔했습니다.

한참을 기다려서 발급받은 융프라우요흐행 기차표


인터라켄에서 융프라우요흐까지는 두 번 기차를 갈아타는 여정입니다. 인터라켄 동역에서 그린델발트 역에서 한 번, 클라이네 샤이덱 역에서 한 번 기차를 갈아탑니다. 시작 역인 인터라켄 동역해발 5백 미터 정도지만, 클라이네 샤이덱 역해발 2천 미터, 도착지인 융프라우요흐해발 3천5백 미터 정도 됩니다. 산을 올라가는 산악 열차는 탄광 열차처럼 생긴 낡은 기차로 그다지 빠르지 않은 속도로, 천천히 알프스의 산맥을 등정합니다. 기차가 올라가는 동안 창밖으로 알프스 산맥의 광활한 풍경을 볼 수 있는데, 정말 영화 속에서나 보던 판타지 세상의 풍경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놓치기 아까운 풍경을 계속 사진에 담으며 오르는 산길에는, 곧 푸르던 초원에 사이로 눈 덮인 산등성이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천천히 오르는 것만 같았던 기차가 벌써 해발 2천 미터 지점인 클라이네 샤이덱 역에 도착합니다.

융프라우요흐를 향해 올라가는 지도
참고로 산악열차는 유레일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산악열차를 타고 올라가다 보면
중간 역인 클라이네 샤이덱에 도착

클라이네 샤이덱에서 융프라우요흐까지 올라가는 기차는, 예약이 밀린 관계로 두 시간 정도의 여유가 남습니다. 크게 할 일이 없으므로 클라이네 샤이덱의 알프스 등산 코스를 따라 올라가 보며 시간을 보내기로 합니다. 해발 2천 미터의 등산길은 눈 덮인 산등성이를 배경으로 어딜 봐도 한 폭의 그림에 잠긴 기분입니다. 비탈진 초목에 앉아 바람을 맞고 있자니 제가 말 그대로 하이디가 된 기분입니다. 산길을 오르다 보니 작은 연못도 하나 보이는데, 카메라 각도를 잘 맞추어 사진을 찍으니 산맥과 하늘 하나가 가득 담긴 멋있는 사진이 나옵니다. 저는 너무나 신난 나머지 예쁜 사진들을 하나라도 더 담기 위해서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아다녀 봅니다. 마침 같은 목적으로 등반하던 한국인 친구와 합심하여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로 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소품으로 어쭙잖은 연출을 하더라도 한 편의 예술품이 탄생할 만큼, 알프스 산맥의 풍경은 대단한 매력을 갖춘 곳입니다.

중간 정거장 클라이네 샤이덱
알프스 등정의 시작점이기도 하죠
마침 기차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가벼운 등정을 해볼까요
하이디에서 본 기억이 있는 들판
지나가는 사람과 친한 척을 해보기도 합니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다 보니 어느새 융프라우요흐로 떠날 시간입니다. 클라이네 샤이덱에서 융프라우요흐까지 올라가는 기차는, 완경사를 올라오던 지금까지의 기차와는 다르게 급경사를 빠른 속도로 올라갑니다. 고도 1500 미터의 높이를 거의 30분 만에 등정하는데, 올라갈수록 고도가 변하는 것을 온몸으로 체감합니다. 숨을 크게 들이쉬어도 호흡이 꽉 차지 않은 느낌에 속이 답답하고 메스껍습니다. 시야에는 잔상 같은 게 남아서 몇 번을 눈을 감고 뜨고를 반복하는 데 어느 순간부턴 어지럼증이 확 올라옵니다. 게다가 기온도 점점 내려가서는, 대비를 한답시고 여름옷들을 몇 겹을 껴입고 져지까지 입었는데도 몸이 부들부들 떨립니다. 고산병 증세와 급작스런 추위에 몸이 잘 적응을 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기차에 반려견과 같이 탄 분도 있는데 개가 낯선 환경에 놀랐는지 신음하면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휘청거리는 안쓰러운 모습도 보입니다. 과격한 움직임은 호흡곤란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평소 걸음에 반 정도 속도로 걸으라고 안내가 나오는데, 굳이 안내가 없더라도 어지럼증 때문에 평범하게 걷는 것도 쉽지가 않을 것 같습니다.

해발 3500미터에서 패닉을 일으키는 댕댕이

융프라우요흐에 도착하여 플랫폼에서 조금 걷다 보니 융프라우요흐의 로비에 도착합니다. 꼭 알프스 산맥을 정복하기 앞서 지어진 베이스캠프처럼, 환영한다는 인사말과 함께 다음 코스로 향하는 안내판들이 보입니다. 일단 관람에 앞서서 스낵바에 제가 탑승한 융프라우 기차의 티켓을 보여주니, 신라면 작은 컵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나누어 줍니다. 제가 산 티켓에 포함되어 있는 서비스인데 컵라면의 판매 가격을 보니 6프랑(대략 7천 원)이나 합니다. 아무래도 해발 4천 미터에서는 물을 끓이는 것도 쉽지 않을 테고, 운송비까지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가격입니다. 저와 같은 서비스를 이용하는 한국인들이 많은 지, 조리대에서 컵라면을 일렬로 세워 뜯어놓고 물을 붓는 모습이 보입니다. 컵라면의 맛은 평소에 먹던 그 맛입니다만 오늘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이느라 제대로 못 먹어 허기도 지고 춥기도 하고 어지럽기도 하다 보니, 따뜻한 국물과 함께 들어온 매콤한 면이 유달리 속을 편하게 달래주는 것 같습니다. 유럽의 꼭대기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는 이 상황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저 이미지는 설마?
너무나 반가운 신라면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는 서둘러서 융프라우요흐를 둘러보기로 합니다. 코스를 다 도는 권장 시간은 2시간 정도지만 오늘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인지 제게 허락된 시간은 한 시간 반 밖에 없습니다. 우선 전망대로 나가 밖을 둘러보니 사방이 완전히 눈으로 덮여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골짜기를 따라 쌓여 있는 눈을 보며 스키를 타고 산을 내려가는 시원한 상상을 해봅니다. 눈 위로는 이상한 모습의 검은 새들이 날아다니는데, 이 고도에서도 새들이 산다는 게 신기합니다.

전선 기지 같은 융프라우요흐 전망대
내리막 산골을 스키를 타고 내려가면 얼마나 재밌을까요?
고산에 사는 새는 어떤 친구일까요?

설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난 뒤에는 융프라우요흐 내부의 테마파크와 얼음 동굴을 구경합니다. 바닥부터 벽, 천장까지 온통 얼음으로 이루어진 얼음 동굴은, 각종 얼음 조각상들로 이루어진 공간입니다. 미끄러지듯이 바닥을 달리며 한 바퀴 빠르게 훑고서는, 바로 이어지는 눈산을 올라갈 수 있는 코스로 나가 눈길도 밟아봅니다. 한 여름에 눈을 밟고 만질 수 있다니 감격에 젖어 사람들에게 부탁해 사진을 몇 장 찍어봅니다만, 시간이 촉박해 서두르다 보니 폰을 눈밭에 떨어뜨리는 실수를 해버립니다. 가뜩이나 폰 배터리가 거의 떨어져서 휴대용 배터리로 충전 중이었는데, 떨어진 폰이 침수 경고를 내며 전원이 켜지지 않아 버립니다. 설상가상으로 사진을 찍다 보니 기차 시간도 몇 분 밖에 남지 않아서, 눈을 밟는 감회고 켜지지 않는 폰이고 전부 다 뒤로하고 서둘러 하행 기차를 타기 위해 전력으로 융프라우요흐를 뛰어다닙니다. 도착시간에 거의 딱 맞추어 돌아와서 간신히 기차에 타기는 했는데, 고산지대에서 대책도 없이 뛰어다닌 업보로 구토 증세와 어지럼증 증세 때문에 거의 기절할 뻔합니다. 산을 타고 내려오는 한 시간 반 동안 고산병 증세와 멀미, 켜지지 않는 스마트폰 걱정에 시름시름 앓으며 몸과 마음고생을 한참 동안을 합니다. 잠시 비관적인 기분에 잠기기도 했습니다만, 다행히 산을 내려갈수록 증상도 호전되고 다시 스마트폰도 켜지기 시작해서 한 시름을 놓습니다. 정말로 다행입니다.

융프라우요흐 내부 테마파크
융프라우요흐 건설자들의 노고를 기립니다
얼음동굴과 Top of Europe
각종 얼음 조각상들
한여름에 눈을 밟는 감동도 한순간
이 사진을 끝으로 스마트폰이 숨을 거둡니다
산에서 내려온 후에야 정신을 차립니다

긴장이 풀리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옵니다. 아침에 숙소에 맡겨둔 짐을 찾고 겨우 이탈리아로 가는 기차에 탔는데, 피로감 때문인지 기차 멀미가 심각하게 느낍니다. 제 옆에는 매우 시끄러운 가족이 타 있는데, 아이들이 소리를 지를 때마다 머릿속이 울리는 것이, 밀라노로 넘어가는 매 순간순간이 괴롭기만 합니다. 눈을 감고 어서 도착하는 순간만을 기다려봅니다.


간절히 바라던 밀라노에 도착하니 이미 해가 완전히 진 상황입니다. 플랫폼에서 내려보니 무슨 공항에라도 온 기분입니다. 플랫폼에서 대기실로 나가는 길은 봉쇄 게이트가 설치되어선 검문관들이 일일이 검사를 하고 있습니다. 높은 천장에 널따란 통로부터 시작해 면세점처럼 늘어선 가게들, 층간 이동을 위한 무빙워커까지 꼭 인천 국제공항에 다시 온 기분입니다.

밀라노에 도착하니 이미 너무 어두운 시간

중앙 역에서 숙소까지 걸어서 30분 정도의 거리로 평상시 같으면 걸어서 이동해봅니다만, 이미 시간이 너무나 늦어버린 관계로 지하철로 이동하기로 합니다. 지하철 이용비용이 2유로 밖에 되지 않는 데다가 마치 외국인에게 '2유로만 넣으면 티켓을 뽑을 수 있습니다'를 알려주는 듯한 친절한 푯말에 어렵지 않게 티켓을 뽑습니다. 그동안 봐온 독일계 국가들과는 다르게, 뽑은 티켓으로 게이트를 통과해서 플랫폼으로 이동하는 것이 우리나라 시스템과 거의 유사합니다. 특히나 지하철이 붐벼서 만원 전철인 것까지 정말로 우리나라 지하철을 만난 기분입니다. 역에 내려서는 지하철에 타는 길까지 주변에서 전혀 익숙하지 않은 이탈리아어가 들리는 데다가, 이런 사소한 시스템까지 그동안 여행한 유럽 국가들하고는 완전히 다르다 보니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서두르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데, 저는 낯선 급류 속에 휩쓸린 것처럼 거의 이리저리 치이며 다닙니다.

어서 숙소로 향해봅니다
낯설지 않은 지하철 개찰구

너무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아 한참을 헤매다가 간신히, 간신히 도착한 호스텔의 첫인상은 '차고'입니다. 잘못 찾아온 건가 몇 번을 기웃거리는 데 초인종을 누르니 문이 열립니다. 드디어 쉴 수 있나 피곤에 절은 목소리로 체크인을 부탁하는데, 도시세에 냉방비까지 추가 요금을 현금으로 요구합니다. 마침 스위스에서 막 넘어온 참이라 유로가 없는 저는, 여기서 이틀을 묵으니 내일 주면 안 되냐고 물어봅니다만, 반드시 오늘 현금으로 지불해야만 체크인을 시켜준다고 강조합니다. 하는 수없이 근처 ATM의 위치를 물어보는 데, 이건 웬걸 무서운 골목에 사제 ATM 하나만 있는 겁니다. 이런 사제 ATM은 출금 한도도 적고 수수료 문제도 있어서 가능한 이용하고 싶지 않지만, 숙소에 체크인은 해야 하니 정말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가봅니다. ATM 위치가 술집이 위치한 골목 안쪽인데, 쓰레기 악취가 나는 곳에 술 취해서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보입니다. 밤도 어두운데 이런 위험한 곳을 뚫고 돈을 뽑아와야 도무지 한숨밖에 나오질 않습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서는 각오를 다져서는, 후드를 눌러쓰고 주변에 눈길도 주지 않고는 앞만 보고 걸어가 돈을 찾아옵니다. 이런 어려운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강대강 체크인을 끝낸 불친절한 스탭은 계단으로 3층 높이를 올라가면 방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엘리베이터도 없어서 지친 몸으로 20kg이 넘는 캐리어를 끌고 죽을 둥 살 둥 계단을 오르고 있자니 갑자기 서러움이 폭발할 것만 같습니다. 너무나 환상적인 풍경을 보고는 생지옥을 맛보는, 융프라우의 하루입니다.

주인장, 돈을 찾아왔으니 제발 문 좀 열어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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