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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May 30. 2020

7월 27일, 55일 차, 피사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피사입니다

아침부터 오돌돌하게 닭살이 돋아 있습니다. 간밤에 에어컨을 너무 강하게 틀고 잤는 지 살짝 감기 기운까지 느껴집니다. 간만에 호텔 개인실에서 정말 마음 놓고 에어컨을 켰던 게 오버였나 봅니다.


피렌체의 오전은 간만에 선선합니다. 비가 온다는 예보를 봤는데 그 간의 더위가 싹 날아간 느낌이라 기분이 매우 좋습니다. 항상 날씨가 오늘만 같으면 참 좋을 겁니다. 이 좋은 날을 조금이라도 만끽하고자 아침부터 가벼운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오늘 여정의 시작지는 숙소 바로 옆에 있는 두오모 박물관입니다. 사흘 전, 피렌체에 처음 도착하자마자 방문한 이곳에서 이제 피렌체에서의 여행을 마무리 지을 때가 온 것입니다. 처음 빌렸던 오디오 가이드를 다시 반납하기 위해 박물관 카운터로 찾아가자, 첫날에 친절하게 인사해주셨던 직원 분이 즐거운 여행이었냐고 물어보십니다. 힘들기도 했고 기분 나쁜 일들도 있었지만, 직원 분의 친절한 질문엔 웃음으로 답해봅니다.

오디오 가이드를 빌렸던 두오모 박물관의 카운터

이제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일정이 마무리됩니다. 선선한 날씨, 친절한 웃음과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피렌체 중앙역에 도착합니다. 피렌체를 떠나 오늘 여행할 곳은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피사입니다. 피렌체에서 그다지 멀지도 않고, 작은 도시라 사람도 많지 않을 것 같고, 날씨도 좋아서 오래간만에 여행의 설렘이 느껴집니다. 고통의 연속이었던 이탈리아 여행에서 그 동안 지쳤던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기분입니다.


피렌체에서 피사 행 기차를 타는데 한 가지 문제에 봉착합니다. 피사로 가는 기차가 고속 열차가 아니라 지역 열차이기 때문에, 유레일 패스를 사용하면 따로 티켓 예약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플랫폼으로 가려면 어떤 기차를 타든 게이트에서 검문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예약 티켓이 없는 저를 들여보내 줄 지가 걱정입니다. 일단은 검문 게이트 앞에 줄을 서서 유레일 패스를 보여주며 피사로 간다고 이야기를 하니깐, 제 유레일 패스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별다른 확인도 없이 게이트를 통과시켜 줍니다. 총을 든 군인들이 게이트를 지키고 있어서 보안이 빡빡할 것 같은데 이렇게 허술하게 통과되는 걸 보면 그냥 보여주기 식 보안절차는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지역 열차를 타고 피사로 출발

피사로 가는 기차는 지역 열차라서 그런 지 앞 사람하고 다리가 맞닿을 정도로 좌석이 좁습니다. 하는 수 없이 맞은편 사람과 다리를 교차하여 불편하게 앉습니다. 그나마 후덥지근하지는 않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피사로 가는 길을 견디어 보기로 합니다. 눈을 감고 이탈리아의 여행을 정리하고 있으니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갑니다. 눈을 떠 보니 피사 역입니다.

피사 역에서의 풍경

피사 역의 풍경에서 익숙한 고향의 모습이 보입니다. 집 근처의 인천항을 거닐 때 느끼던 동네의 정취가 떠오르는 풍경입니다. 정비가 잘 되지 않아서 깨진 차도의 아스팔트, 살짝 습기를 머금은 콘크리트 건물들, 70~80년 대 옛날 느낌의 가게들까지. 각양각색의 독특한 개성들이 넘치던 이탈리아의 여행지에서 가장 친숙하고 편안한 동네의 모습입니다. 동네 자체도 다른 관광지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적어서 돌아다니기가 편합니다. 그 동안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습니다.

익숙한 정취의 피사
길 한가운데 있는 작은 세례당

피사 자체는 도시에 크게 볼만한 것들이 없습니다. 역에서 20분 정도 걸어가면 피사의 사탑과 주변에 대성당, 세례당, 박물관이 있는 벌판이 볼거리의 전부입니다. 잔디밭이 깔려있는 공원에 몇몇 건물들만 세워져 있는 것이 경주의 넓은 벌판에 왕릉이나 첨성대 등이 세워져 있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피사의 사탑 앞에서 똑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

피사의 사탑 앞으로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자리를 잡고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사탑의 각도와 손의 각도를 맞추어 손바닥으로 피사의 사탑을 미는 포즈는 피사를 방문하는 누구라도 시도해보는 스테디셀러 포즈입니다. 사탑 앞 잔디밭에는 울타리와 기둥들이 놓여 있는데, 기둥마다 사람들이 자리 하나씩 차지하고 저마다 포즈를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은 제법 장관입니다. 저도 기둥 앞에 줄을 서서 포즈를 취하는 대열에 합류해봅니다. 손으로 미는 식상한 포즈 대신 발로 사탑을 미는 포즈를 취해봅니다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나가던 사람을 사진을 붙잡고 부탁을 했는데, 정확하게 각도가 맞을 때까지 몇 번이고 사진을 찍다보니 복근이 남아나지를 않습니다. 사진 찍어주시는 분의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포즈를 취해 겨우 사진 한 장 건진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사진 하나만으로 피사에 온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기분입니다.

피사의 사탑은 사진 찍는 사람의 실력도 중요합니다

근처의 티켓 오피스에선 피사의 사탑에 올라갈 수 있는 티켓과 함께 주변 성당이나 박물관 등을 들어갈 수 있는 티켓도 같이 팝니다. 사탑에는 올라갈 수 있는 인원수가 시간대별로 정해져있다보니, 이미 제법 늦은 시간이 되서야 사탑을 올라갈 수 있는 티켓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굳이 사탑을 올라가볼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에 근처 세례당과 성당만 둘러봅니다. 성당은 작은 돔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직원이 자리를 잡고 샤우팅을 해서 소리가 울려퍼지는 모양을 재현하는 것이 보입니다. 미사를 드릴 때 신부님의 말씀이 이런식으로 울린다면 제법 웅장한 효과를 수 있을 겁니다.

피사의 사탑 등반은 미래를 기약하며
성당과 세례당, 뒤로 빼꼼 보이는 피사의 사탑
피사 성당
서늘한 날씨에 잔디밭에 누운 사람들

돌아오는 길에는 잠시 피사 대학을 들러 구경합니다. 피사 대학은 갈릴레오가 재학하고 나중에 대학 교수로 부임했던 곳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큰 대학은 아닌 모양입니다. 문이 굳게 닫혀서 들어가보지는 못하고 건물 사진만 찍어봅니다. 건물 외관을 둘러보다보니 15세기의 대학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문득 의문이 생깁니다. 지금하고는 커리큘럼도 다르고 교수와 학생의 관계도 다르고 대학을 다닐 수 있는 신분이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의외로 강의 내용이나 방식 자체에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갈릴레오에 대해서 좀 더 찾아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피사의 사탑에서 갈릴레오가 자유낙하 실험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겸해서 말이죠.

집으로 돌아가는 길
CIAO 피사!

피사에서 다시 피렌체 숙소로 돌아오니 비가 우수수 쏟아집니다. 비가 오니 날도 선선하고 그림 밟기 사기꾼들도 보이지 않아 좋습니다. 흰색, 옅은 다홍색, 옅은 녹색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두오모가 비가오니 칙칙한 채색으로 변해갑니다. 이탈리아를 넘어서 다음 여행을 계획하고 마무리 짓는 피사의 하루입니다.

비가 한참 쏟아지는 피렌체의 거리
이틀 간의 휴식도 이제 끝입니다. 이제 이탈리아를 떠나 새로운 여행이 다시 시작됩니다.


PS.

길거리에 놓인 체중계가 있어서 오랜만에 체중을 제봅니다. 놀랍게도 두 달 만에 7kg 이 넘게 빠진 것을 확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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