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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Jun 06. 2020

7월 28일, 56일 차, 밀라노

일정이 박살 나고 멘탈이 산산조각 난 밀라노입니다

오늘은 드디어, 드디어 이탈리아를 떠나는 날입니다. 지난 열흘 간의 고생을 생각하니 이탈리아를 떠난 다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다음 여정지인 프랑스 리옹에 대한 기대보다도 이탈리아를 떠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온통 한가득합니다.


피렌체에서 리옹으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어느 방법도 쉬운 여정은 아닙니다. 그중에서 저는 유레일 패스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합니다. 우선 피렌체에서 밀라노까지 이딸로를 타고 이동한 후, 밀라노에서 제네바까지 다시 이딸로를 타고 이동하고, 제네바에서 리옹으로 스위스 지역 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가기로 합니다. 얼추 8시간 정도 걸리는 기나 긴 일정입니다만, 그동안 밀린 글들을 쓰다 보면 시간이 후딱 갈 겁니다. 온라인으로 기차 예매를 하느라 벌써 27유로를 써버렸지만, 이미 가득 찬 일반 예약들을 보면서 유레일 패스 예약이 남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그나마도 기차 예매 방법을 몰라서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삽질한 것이 어제저녁의 이야기입니다.


피렌체 중앙역에서 플랫폼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통과하는데, 게이트 직원은 오늘도 역시나 표를 검사하는 둥 마는 둥입니다. 이렇게 불성실할 수가 있냐고 투덜거리며 이딸로에 탑승합니다. 이딸로 퍼스트 클래스의 장점 중 하나는 좌석과 좌석 사이에 캐리어를 밀어 넣을 공간이 있다는 겁니다. 다행히 기차에 사람이 많지 않아서 별다른 경쟁 없이 좌석 밑으로 캐리어를 넣고 의자에 머리를 편히 기댑니다. 이제 노트북을 꺼내어 편하게 글을 쓰려고 하는데, 갑자기 검표원이 제 옆에서 멈추어 섭니다.

'와 여행 편하다!' 하고 방심한 순간에


평소처럼 검표원에게 예매 티켓과 함께 유레일 패스를 보여줍니다만 검표원의 표정과 낌새가 좀 이상합니다. "Excuse me, sir"라는 인사말을 건네며 검표원이 제 표를 지적하면서 오늘은 28일인데 티켓의 날짜가 29일로 되어있다고 말을 합니다. 저는 속으로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고 놀라면서, 어젯밤에 예약할 때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제 예약할 때 다음날 티켓이 전부 매진된 걸 확인했었는데, 유레일 티켓 예약으로 해당 날짜를 선택하니까 예약이 된 걸 보고 28일 예약에 성공했다고 생각했었지만, 아마도 이미 해당 날짜는 예약이 꽉 찼으므로 다음날 예약을 자동으로 잡아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잘못된 예매 날짜


물론 최종적으로 날짜 확인을 안 한 제 잘못입니다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가며 당장에 검표원에게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기로 합니다. 검표원은 잠시만 기다리라며 자리를 뜹니다. 저는 당장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도 하기 싫어집니다. 일단 일종의 무임승차를 했으니 무임승차 비용으로 벌금만 수십만 원을 물어야 할 것이고, 무임승차 기록이 남으면 유럽 출입국 심사 때 기록이 남아 추후 재입국이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머리를 쥐어짜며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찾다 보니 어느새 승무원이 재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승무원은 짐짓 침착한 표정으로 면담을 시작합니다. 제가 누구고, 차를 타게 된 경위는 어떻고, 목적지는 어디고, 유레일 패스와 여권도 확인하고, 신원조사를 합니다. 승무원은 잠깐 생각을 하더니 저한테 큰 걱정은 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신원에 큰 하자가 없고 유레일 패스 홀더라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유레일 패스 티켓 예매 값인 10유로의 두 배만큼의 가격만 내면 지금 타는 기차는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합니다.

20 유로를 지불하고 어떻게든 지금의 상황은 해결합니다


저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만, 아직 심각한 문제가 연달아 남아있습니다. 지금 탄 기차의 예매도 29일이니, 이후에 타야 할 제네바행 기차 역시 29일로 발권되어 있다는 겁니다. 국내선이었기에 좌석에 여유가 넘쳤던 피렌체발 밀라노행 이딸로와는 달리, 국경을 넘어가는 기차라 예약이 가득 찼던 제네바행 기차는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승무원에게 이 티켓은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니, 밀라노 역에 있는 고객 센터에서 티켓 교환에 대해 문의해야 한다고 답해줍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스스로를 멍청이라고 부르는 저에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실수를 한다면서 너무 낙담하지 말라고 승무원이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그 말을 들으니 그래도 조금 진정이 되는 듯합니다.


어쨌든 당장에 다음 대책을 세워야만 합니다. 밀라노 역에서 원래 타고자 했던 다음 기차 환승까지 38분 정도 여유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이면 고객 센터에서 어떻게든 해결이 될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망할 이딸로가 기술적인 이유로 25분이나 지연된다는 안내가 나옵니다. 고속열차 주제에 허구한 날 딜레이가 되는 이딸로가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속으로 '아닐 거야, 아닐 거야'라고 되뇌며 초조하게 도착을 기다려봅니다만, 정확히 25분이 딜레이 되어 도착해버립니다. 13분 만에 모든 것을 처리해야 하는 저는 기차 칸 문에 캐리어를 들고 기다리다가 도착하자마자 문을 열고 그대로 뜀박질을 합니다.


어디가 어디인지를 몰라 이 사람 저 사람 물으며 5분 만에 도착한 고객 센터에서는, 상담원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입구에서 안내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껄렁껄렁한 청년에 의해 제지당합니다. 무슨 일로 찾아왔냐는 질문에 기차표가 잘못되어서 어떻게 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기차 티켓은 환불도 교환도 불가능하다면서 고객 센터에서 내보냅니다. 직원도 아닌 것 같은 사람한테 쫓겨나 황당해할 새도 없이 이젠 정말 될 대로 되라며 플랫폼으로 전력질주를 해봅니다. 밀라노 역 게이트 직원은 또 왜 이렇게 검표를 철저하게 하는지, 제 티켓이 29일로 되어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게이트에서 통과시켜 주지를 않습니다. 아니! 아까 피렌체 역에서 출발할 때 지적해 주었으면 차라리 피렌체에서 하루 더 있었을 텐데! 정말로 급한 일이라 어떻게든 기차를 타야 한다며 다급히 이야기하니까 게이트에서 직원이 통과시켜 주긴 합니다. 출발 직전의 기차 앞에 겨우 다다른 저는, 기차 앞에서 안내하는 승무원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기차에 태워달라고 부탁해봅니다. 엑스트라 페이를 내도 좋으니 제발 기차에 태워달라고 간절히 말해봅니다만, 만석인 기차에 무슨 수로 사람을 태우냐면서 칼같이 거절당합니다. 떠나가는 기차를 바라보며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20kg 가까운 캐리어를 끌고 장장 15분을 전력질주를 했으니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기분입니다.


그래도, 그래도 아직 마지막 기회가 남아있습니다. 지금 있는 밀라노 중앙역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위치에 밀라노 가리발디 역이 있습니다. 여기서 리옹으로 직행하는 테제베가 남아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리발디 역으로 가보기로 합니다. 온라인으로 발권하는 것은 국경을 넘는 테제베의 열차가 전혀 보이질 않아서 포기했지만, 오프라인 예매라면 (비록 비싼 돈을 치르더라도) 분명 티켓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쓸데없이 경치가 좋은 밀라노 거리
가리발디 역에 도착은 합니다만...

그러한 희망을 갖고 가리발디 역에 도착합니다만, 아무리 찾아봐도 테제베 티켓 오피스가 보이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승무원에게 물어보니 자신은 이딸로 승무원이라서 잘 모르지만 테제베 예매는 온라인으로만 할 수 있고, 가리발디 역은 프랑스가 아니라서 테제베 티켓 오피스가 없어서 테제베를 탈 수 없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오늘 안으로 리옹으로 넘어갈 모든 방법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차피 다 망한 거 점심이라도 맛있게, 맛있게 먹어보기로 합니다

몇 시간에 걸쳐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기차를 타기 위한 노력은 이제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제게 남은 유일한 방법은 처음에 예매한 티켓대로 다음날 기차를 타는 방법뿐입니다. 결국 밀라노에서 예정에도 없던 1박을 하고, 리옹에서 잡아놓은 숙소를 환불도 못하고 캔슬당해 버립니다. 여기에 추가로 지불한 기차값까지 금전적인 손해와 멘탈의 충격까지 정말 그대로 쓰러져 버릴 것만 같습니다.


어떻게든 밀라노에 새로 예약한 숙소로 돌아와 멘탈을 추스르고자 하는데, 이번에는 미리 지불한 유심 데이터가 밑바닥이 난 것을 확인합니다. 원래라면 3일 정도를 더 아껴서 30일짜리 선불 유심을 새로 충전할 계획이었습니다만, 오늘 정보를 찾아본다고 삽질을 하다 보니 예상보다 훨씬 데이터를 사용한 모양입니다. 인터넷이 없으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프므로 데이터의 top up(충전)을 시도해봅니다만 계속 카드 결제가 실패하고 충전이 되질 않습니다. 한 시간 정도 삽질을 해보지만 도무지 해결이 안 되어 애플리케이션에서 제공하는 상담원과의 챗을 진행합니다. 상담원의 친절한 지시에 따라 이것저것 해봅니다만, 제 카드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결제가 되지 않는 것만 확인됩니다. 아마 해외 결제 진행 시 (제 카드사인) 우리은행 모듈을 통해서 최종 체크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해당 결제사이트에서 이 모듈을 제공하지 않아서 결제가 불가능한 듯합니다. 순식간에 저는 와이파이를 찾아서 떠도는 와이파이 난민이 돼버린 겁니다.

망할 놈의 TOP UP - ERROR
그나마 친절한 상담사의 대화가 유일한 위안입니다

차례대로 멘탈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극심한 두통이 찾아옵니다. 저는 호스텔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잠을 청합니다. 아직 날도 밝고 주변도 시끄럽습니다만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억지로 잠을 청한 끝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정리해보기로 합니다.


우선 오늘의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 충분한 여유를 갖고 티켓 예매를 하지 않아서라는 반성을 해봅니다.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지금부터 약 2주 간의 이동 계획을 세우고 당장에 기차 티켓들을 구매합니다. 특히 프랑스의 테제베는 성수기에 예약이 금방금방 차 버리므로 빨리 해치우는 것이 안전할 것 같습니다. 또한 멘탈의 안정을 위하여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리옹에서의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스페인 일정을 이번 여행에서 과감히 포기하기로 합니다. 또한 파리에서 런던으로 넘어가는 유로스타의 예매가 이미 가득 찬 것을 확인하고 대안으로 브뤼셀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왕복 티켓을 구매합니다. (만약에 예매가 늦었다면 영국조차 못 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간담이 서늘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인터넷에 대해선, 내일 밀라노 역의 보다폰 스토어에 들러서 새로 유심칩을 구매하기로 결정합니다.

인터넷이 끊길 예정이므로, 미리 지도와 경로들을 캡쳐해둡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없을 때는 어떻게 여행을 했을까요?


저녁도 굶은 채로 박살난 멘탈을 긁어모으며 남은 일정들을 추스르는 내내 씁쓸한 속내가 진정이 되질 않습니다. 박살난 멘탈에 여행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밀라노의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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