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준 Aug 26. 2020

8월 2일, 61일 차, 파리

꿈의 나라가 기다리는 도시 파리입니다

매우 기묘한 아침입니다. 개장하는 시간에 맞추어 디즈니랜드에 가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준비를 하는데, 옆 침대에서 '혹시 한국인이세요?'라고 물어보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렇다고 답하니 옆 자리의 사람은 크게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너무나 다행이라고, 혹시 도와줄 수 없냐고 이야기합니다. 일단은 소음에 매우 민감해서 신경질을 부리던 청년이 바로 아래서 자고 있으므로 다급히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을 해봅니다. 하지만 제 말은 안중에도 없는 듯이 자기 사정을 막 이야기할 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래 침대에서 자고 있던 청년은 곧 제발 조용히 해달라며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저는 도움을 청하던 사람에게 할 말이 있으면 복도로 나가서 이야기하자고 간절히 부탁합니다. 매우 다급해 보였던 그 사람은 이는 씻어야겠다며 뜸을 들입니다. 다급한 사람 치고는 챙기는 게 좀 많은 느낌입니다. 복도에 나와서 사정을 들어보니, 지갑과 여권을 잃어버려서 큰일인데 제 계좌로 한국 돈을 입금해줄 테니 당장에 유로를 현금으로 건네줄 수 없겠냐고 합니다. 당장에 시간이 없어서 가봐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도 조금만이라도 도와달라고 끈질기게 달라붙습니다. 당장 가진 돈이 20유로 정도 있는데 이거라도 괜찮으면 바꿔줄 수 있다고 하니까 그 돈으로는 호스텔 방값도 지불을 못 하니까 ATM으로 가자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제가 일정을 못 맞춘다고 이야기하는 데도 괜찮다고 재촉하면서 당연스럽게 ATM으로 끌고 갑니다.


당장 돈을 지불할 수단도 없는 사람이, 호스텔은 왜 또 예약을 했는지, 걸어서 한 시간도 안 걸리는 곳에 대사관이 있는데 찾아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다른 호스텔 락커에 잠겨있는 짐을 꺼내려면 현금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대사관에서 그 정도는 도움을 주지 않을까요?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으며 묵묵히 돈을 뽑으니, 이번엔 본인이 돈을 줄 수단이 없는지 엄마한테 부탁을 한다고 기다려달라고 합니다. 엄마 되시는 분이 톡을 제때 받지도 않고 자꾸 연락이 안 되니까 애꿎은 엄마 욕을 계속합니다. 저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일까요? 마치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듯이 면책을 하고 싶어서? 짜증 나는 일인극을 한참을 보고 나서야 연락이 닿아 교환이 되었지만, 이미 예정한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지나있고, ATM에서 돈을 뽑는 수수료도 받지 못합니다. 저한테 연신 감사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제가 잃어버린 수수료나 시간에 대해선 별다른 미안한 생각도 없는 모양입니다. 감사하다는 말속엔 스스로의 위기를 넘겼다는 안도감만 느껴집니다. 그 와중에 잠 좀 자자고 신경질을 낸 사람을 또 잘근잘근 씹으며 욕하고 자신이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욕을 하는 것이 너무 역겹게 느껴집니다.


어쨌든 이 짜증 나는 사람을 간신히 떼어놓고 겨우 디즈니랜드로 드디어 출발합니다. 지하철을 타고 30km 정도 이동하면 파리 근교에 쉐씨라는 도시가 있는데, 여기에 바로 디즈니랜드 파리점이 있습니다. 일반 지하철과는 달리 RER이라는 광역급행철도를 타야 해서 방법이 조금 복잡해 헤맵니다만 무사히 길을 찾는 데 성공합니다. 좌석에 앉아 긴장을 누그러뜨리는데, 문득 무언가 빠뜨린 것들이 생각납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미리 인쇄해 놓은 디즈니랜드 입장권 바우처가 없습니다. 그 사람한테 시달리다가 도망쳐 오느라 가방에 두고 온 걸 이제야 깨닫습니다. 게다가 태블릿을 넣어놓은 가방마저 자물쇠를 잠그지 않고 그냥 나왔습니다. 만약 태블릿을 잃어버린다면 지금까지 여행을 다니면서 한 기록들을 다 잃어버리게 되는데, 당장 기차를 돌려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당장에 돌아가더라도 족히 두 시간은 걸릴 것을 생각하니 속이 타들어갑니다. 디즈니랜드로 다가갈수록 흥분에 들뜬 아이들이 타면서 지하철이 점점 왁자지껄해지는데, 평소라면 웃으며 기분 좋게 생각할 분위기가 초조한 마음만 부채질하는 기분입니다. 어쨌든 이대로 디즈니랜드까지는 가야 하니, 저는 행운에 기대기로 하며 오늘의 일정을 즐기자고 체념합니다.

디즈니랜드행 기차. 목적지에 친절히 미키마크가 그려져 있습니다

어쨌든 쉐씨 역에 도착하니 바로 디즈니랜드가 보입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출력본이 아니라도 모바일에 저장된 pdf로도 바코드 스캔이 가능하다고 해서 별문제 없이 입장합니다. 어차피 아침에 일어난 사건은 지나간 일이고 노트북이 사라지면 운명으로 받아들이자고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테마파크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련도 걱정도 다 잊고 테마파크 분위기에 빠져들어 그 자체를 있는 힘껏 즐기는 겁니다. 말 그대로 하쿠나마타타입니다.

역에서 디즈니랜드로 곧장 연결되어 있습니다

역에서 이어지는 출입 게이트부터 동화 마을의 시청 청사처럼 꾸며져 있습니다. 이 출입 게이트를 통과하면 Main Street U.S.A.가 보입니다. 디즈니랜드 파크의 시작 지점이자, 기념품 가게가 밀집한 거리로, 광활한 거리 끝에는 디즈니 로고에서 본 적 있는 핑크빛 성이 세워져 있습니다. 성 뒤로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있는 푸른 하늘이 펼쳐지는데 동화책의 한 장면 같습니다. 메인 스트리트를 따라 천천히 마을을 구경하는데 박물관 스태프들이 도로 통제를 한다고 주변으로 비켜서라고 합니다. 곧 미키와 미니를 비롯한 디즈니 캐릭터들이 인도 풍 퍼레이드 단의 행진이 시작합니다. 발리우드 영화에서 보던 신명 나는 음악과 댄스가 사방을 메우며 퍼레이드가 펼쳐집니다. 퍼레이드 카를 모는 직원에 교통 통제 요원에 관람하던 아이들까지 모두가 신명 나서 춤을 춥니다. 가만히 구경하던 저마저 끌어 오르는 흥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음악에 맞추어 분수쇼에 폭죽쇼로 마무리되는 정말 즐거운 퍼포먼스입니다. 퍼포먼스가 대단원을 마치고, 음악과 함께 퇴장하는 퍼레이드의 행렬을 따라 저도 다시 이동을 시작합니다.

디즈니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디즈니의 상징 디즈니 성
신나는 퍼레이드

디즈니랜드 파크는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집니다. 점심을 먹기 전에 가볍게 아이들을 위한 구역인 판타지 랜드를 둘러봅니다. 메인 스트리트에서 분홍색 성을 지나면 바로 나오는 구역으로, 아기자기한 어트랙션들이 디즈니 동화의 컨셉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가장 먼저, 앨리스의 호기심 미궁으로 들어가 봅니다. 정원으로 꾸며진 미궁은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 모험을 따라가는 구성입니다. 미궁 끝에 다다르면 붉은 여왕의 성과 트럼프 병정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미로 곳곳에서 붉은 여왕이 소리치는 구성이 재미있습니다. 생각보다 미로가 복잡해서 탈출하는 데 꽤 애를 먹는 것이, 가볍게 생각했던 어트랙션의 높은 완성도에 기대가 고조됩니다. 특히 그 유명한 디즈니의 아이피를 백분 활용해서 딱 둘러봐도 알 수 있게 테마를 꾸며놓은 게 대박입니다.

이상한 나라와 앨리스의 미로


한껏 동심으로 돌아가 판타지랜드를 더 돌아봐도 좋겠지만,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스릴 있는 놀이기구를 타고 싶은 저는 다른 구역으로 이동합니다. 메인 스트리트로 돌아가 20분을 기다려 비싼 점심으로 간단히 배를 채우고, 곧장 다른 어트랙션들을 타러 갑니다. 인디아나 존스 풍의 프런티어 구역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기구를 타고 폐허가 된 집을 떠도는 귀신의 집과 작은 규모의 롤러코스터를 타봅니다만 이 정도로는 마음이 차질 않습니다. 공원 애플리케이션에서 지도를 확인해보니 스릴 있는 놀이기구는 디즈니랜드 파크 말고, 그 옆에 있는 디즈니 스튜디오 파크에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일단 디즈니랜드 파크에서 가장 인기 있는 탄광 열차에 패스트 패스 예약표를 끊어두고 옆 공원으로 옮겨갑니다.

정말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고
완전히 다른 세상인 프론티어 구역
귀신의 집도 가봅니다

동화 속 세상이라는 테마의 디즈니랜드 파크와는 달리, 디즈니 스튜디오 파크는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처럼 꾸며져 있습니다. 입구에서부터 영사기를 돌리는 미키마우스의 로고가 보이더니, 게이트를 지나 처음 나오는 공간이 제1 스튜디오 건물입니다. 철골 구조를 가진 천장에 조명들이 달려있고 내부가 실제 스튜디오인 것처럼 꾸며져 분위기와 몰입감이 장난 아닙니다.

또 하나의 공원 디즈니 스튜디오 파크
스튜디오 세트장 같은 테마파크
디즈니 아저씨가 손잡고 반겨줍니다


디즈니랜드 파크에 들어와서 처음 탄 놀이기구는 자이로드롭의 일종인 할리우드 타워입니다. 일반 자이로드롭과 달리 엘리베이터 컨셉으로 건물 내부에 설치되어서, 엘리베이터 위아래를 오르내리며 호텔에서 사라진 일가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스토리텔링을 풀어냅니다. 일단 제 높이가 어느 위치 인지도 모르고, 밀실처럼 어두운 화면에서 실루엣으로 비추는 화면이 으스스한 데다가 이야기에 몰입하다 보면 갑자기 확 떨어지거나 올라가는 것이 단순한 자이로드롭보다 훨씬 무섭습니다. 자이로드롭이 이렇게 재밌는 놀이기구인 줄은 처음 압니다.

공포의 할리우드 타워


다음은 락큰롤러코스터로, 락 테마의 실내 롤러코스터입니다. 대기 줄서부터 유명한 락 스타들의 기타와 음반이 장식되어서는, 락스타들이 스튜디오에서 라디오 방송을 하는 것처럼 롤러코스터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락 콘서트 공연을 시작하는 것처럼 시작부터 고속 발진해서 하강하여, 락 콘서트장 특유의 어두운 배경 아래 비추는 조명 사이사이로 레일이 보이는 공간이 너무너무 스릴이 넘칩니다. 제가 지금 타고 있는 레일을 간간히 실루엣만 볼 수가 있기에, 앞으로 어떤 코스가 나올지 짐작이 안돼서 더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분위기 120점, 스릴 120점에 최고의 롤러코스터입니다.

아마 평생에 제일 스릴 넘쳤던 롤러코스터로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떨리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쉽지 않아 페이스 조절을 위해 이번에는 완전히 재미없어 보이는 놀이기구를 하나 타보기로 합니다. 관광버스처럼 생긴 트램 투어할리우드의 영화 촬영 장으로 꾸며진 시내를 천천히 구경하는 쉬기 좋은 버스입니다. 처음에는 생각처럼 지루하다 싶었는데, 촬영 세트에 정차한 버스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위아래로 흔들리더니 세트장에서는 화염이 분출하고 큰 파도가 몰아칩니다. 실제 영화 촬영에 사용되는 특수기법을 체험시키는데 화염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와 폭포의 위엄을 실제로 겪으니 장난이 아닙니다. 함정으로 생각했던 어트랙션조차 이렇게 큰 즐거움과 반전을 줄 거라곤 상상도 못 한 일입니다.

시시한 투어 버스인줄 알았는데
땅이 흔들리고 물이 쏟아지고 사방에서 불뿜고

이렇게 점점 고조되는 기운으로 돌아다니니까 온 몸에 에너지가 넘치는 기분입니다. 테마파크는 텐션이 꺾이는 순간에 흥미가 급속도로 식고 집에 가고 싶어 지는데, 놀이기구를 탈 때마다 점점 더 에너지가 차오르는 것이 스스로도 신기합니다. 저는 스스로 어디까지 이 에너지가 지속될까 궁금해 놀이기구들을 타고 또 탑니다. 확실히 몇 개의 롤러코스터와 놀이기구를 타니 시간이 갈수록 감흥이 무뎌지기는 합니다. 처음에 탄 놀이기구들이 너무 대박이어서 그런 건지, 스릴에 적응돼서 그런 건지, 즐거움이 다 충족되어서 그런지 분간이 되질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테스트해보기 위해서, 가장 스릴 있게 탔던 락큰롤러코스터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타봅니다. 그리고 두 번째 타는 건데도 처음 탈 때와 같은 흥분을 느끼는 스스로를 보고, 저의 에너지가 떨어져서 흥미가 식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놀이기구를 다 타고 마무리로 디즈니 올스타 퍼레이드를 보며 꿈 한가득한 하루를 마무리 짓습니다.

락큰롤러코스터 1회차와 2회차. 표정이 편한게 없다
디즈니 올스타 퍼레이드를 따라서
천천히 천천히
집으로 돌아갑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도 여운이 조금 남았는지, 저도 모르게 'for the first time in forever''let it go'를 흥얼거립니다. 숙소로 돌아와서도 여전히 신이 나서 같이 방을 쓰는 인도인 친구에게 오늘 디즈니랜드가 얼마나 재미있었는 지를 설명합니다. 생각해보니 테마파크를 혼자 가보는 건 이번이 난생처음인 것 같은데, 30대를 바라보는 아저씨가 혼자서 디즈니랜드를 이렇게 신나게 즐길 수 있다니 갑자기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혹시나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던 노트북도 다행히 무사한 것을 확인한 정말 최고로 행복한 파리의 하루입니다.

환상같았던 디즈니랜드를 뒤로하고


작가의 이전글 8월 1일, 60일 차, 파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