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의 도시, 파리입니다
요 며칠, 너무 많이 걷고 잠이 충분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도 전혀 개운치 않습니다. 얼굴을 씻으며 거울을 보니 눈이 충혈되어 있는 게 완전히 수면부족입니다. 고난의 행군이 예상되는 오늘을, 몸이 무사히 견뎌주길 바랄 뿐입니다.
아침부터 엄살(?)을 부리는 이유는, 오늘의 목표가 바로 루브르 완주입니다. 원래는 이틀 전에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오프라인 티켓을 팔지 않는 날이었기에 입구에서 발을 돌려야 했던 뼈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은 미리 예매해 둔 티켓이 있기에 자신만만입니다.
아침 일찍 도착하니 오늘도 유리 피라미드 앞으로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행렬이 보입니다. 저는 준비해 놓은 타임 슬랏 패스를 이용하여 대기를 하지 않고 바로 박물관으로 입장합니다. 허허벌판 한가운데 유리 피라미드 밖에 없어서 박물관에 어떻게 들어가나 싶었는데, 입구에서 이어지는 지하엔 거대한 공간이 펼쳐집니다. 박물관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설이 들어서 있어 대형 쇼핑몰에 들어온 기분입니다.
관람에 앞서 우선 인포메이션 센터에 들러 가이드 맵과 오디오 가이드를 챙겨봅니다. 오디오 가이드로는 신기하게 닌텐도 3ds를 줍니다. 케이스에 Audioguide Louvre라고 인쇄되어 있는 것이, 닌텐도에서 루브르에 스폰서한 스페셜 에디션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위치도 아니고 3ds라니 조금 반가운 물건입니다만, 사람들이 닌텐도를 들고 박물관을 돌아다니는 모습은 이질감이 듭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같은 유명한 그림 앞에서, 닌텐도를 들고 진지하게 작품을 감상하시는 백발의 노인의 모습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3ds에 내장된 박물관 가이드 소프트웨어는 현재 위치를 가리키는 맵에 제가 원하는 오브젝트를 클릭하면 설명이 나오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인 느낌이 '역전재판' 같은 추리 게임을 하는 느낌입니다. 관람코스는 몇 가지의 테마 투어, 하이라이트 투어, 자유 투어 등이 있는데, 완주가 목표인 저는 자유 투어를 선택합니다. 나긋나긋한 한국어 설명이 듣기에 편합니다.
박물관의 각 관은 전시 테마마다 색으로 구분이 되어있습니다. 박물관에 들어서 처음 만나는 방은 루브르의 역사를 소개하는 회색 방입니다. 방 전체가 성벽으로 구성되어 있는 회색 방은, 루브르가 처음에는 파리를 방어하기 위한 성이 었음을 강하게 어필하는 듯합니다. 성벽의 방을 지나 본격적인 관람이 시작되는 계단 정중앙에는 거대한 스핑크스가 놓여 있습니다. 스핑크스가 굉장히 친숙함에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고 생각하니 이집트 문화재를 볼 기회가 생각보다 더 드물구나 싶습니다. 다른 곳들을 제쳐두고 이집트 전시관부터 가보기로 합니다.
당장에 이집트에 온 것처럼 꾸며진 이집트 전시관은 세 층이 걸쳐 장대하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나일강으로부터 시작한 문명의 역사와 언어, 문화와 관습, 사후 세계에 대한 열망과 신앙, 무덤과 석관, 신전과 석판, 각종 유물들까지 어머어머 한 전시물들을 만납니다. 시대별 전시관에서는 이집트의 통일과 파라오의 등장 등 고대 이집트 역사 전반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는데, 기원전 몇 백 년 전에 이런 역사와 문명을 펼쳤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이 안됩니다. 특히 사후세계에 가져가기 위해 같이 묻어놓았던 고대의 액세서리, 가구와 빈틈없이 빡빡하게 그려진 벽화는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신앙에 열망을 했는지, 그 열망을 표현하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리고 열망에 심혈을 기울일 정도로 농경이 발달하여 생활에 여유가 있었는지 지레짐작을 해봅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관람에 집중하다 보니, 이집트 관에서만 벌써 세 시간이나 죽치고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아직 루브르의 20퍼센트도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이대로 가다간 하루 종일 봐도 반도 못 볼 것 같습니다. 앞으로 남은 곳은 가이드를 따라서 하나하나 정독하기보다는 중요한 문화재와 머리를 번쩍하고 스쳐가는 문화재만 가이드를 들으면서 관람하기로 합니다.
이집트관을 나와 중앙에 거대한 계단에 도착하니, 사모트라케의 니케 상이 보입니다. 계단을 따라 시선이 모이는 정중앙에는 뱃머리에 서서 날개를 펼치고 있는 승리의 여신상 집중을 모읍니다. 팔도 얼굴도 없지만 뱃머리에 서서 날개를 펴고 앞으로 향하고 있는 역동적인 모습이 전장의 선두에서 지휘하며 아군 병사에게 승리를 약속하는 것만 같습니다. 니케를 시작으로 이어지는 그리스, 로마 관은 이탈리아에서 봤던 그 모습들이라 반갑게 느껴집니다. 그리스, 로마 관에선 익숙한 신화 속 신들의 그리스, 로마 특유의 역동적이고 근육미가 넘치는 석상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유명한 밀로의 비너스 상을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여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르테미스와 사슴상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스, 로마 관을 지나선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근동관으로 향합니다. 고대의 중동 지방의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유럽이나 이집트와는 또 다른 유물들의 양식이 재미있습니다. 분명히 근동 유적에서도 벽화도 석판도 석상도 발견되고, 서로 영향을 받은 흔적도 있는데 양식이 분화되어서 확연히 분간할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근동의 유물들이 어떻게 루브르에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 찾아보니 유물 발굴대가 원정을 가서 가져왔거나 정복 과정에서 가져왔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말이 좋아서 원정, 정복이지 약탈을 해온 전리품이라는 건데, 이렇게 잘 전시해 놓은 걸 보면 아이러니한 생각들이 듭니다. 만약에 제가 시리아나 이란에 가서도 루브르에서 본 전시품들을 볼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저층에 전시된 다른 국가의 역사관을 다 보고서는 상층의 유럽, 프랑스 유물관으로 이동합니다. 특히 루브르 박물관에 큰 기여를 했던 프랑스 왕실의 전시품들이 많이 보입니다. 프랑스혁명 이후로 시민군이 왕실을 털어 박물관에 전시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조금 흥미롭습니다. 전시실 끄트머리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혁명 직전에 구매했다고 하는 여행 필수품 상자가 전시되어 있는데, 생각보다 소박한 내용물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실제로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잠시 생각해봅니다. 흔히 알려진 대로 사치와 허영 속에서 살았던 왕비였을지, 프랑스혁명의 당위성을 위해 역사 속에서 희생된 사람이었을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문화관들을 전부 돌아보고서는 드디어 회화관에 돌입합니다. 회화관의 중심인 이탈리아 회화관을 비롯하여 프랑스 회화관, 스페인 회화관 등 다양한 회화관들을 돌아다녀봅니다. 이탈리아에서 봤던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각종 작품들, 프랑스 회화에서 가장 유명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명한 작품들까지 유명한 명작들이 너무 많아 오히려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작품 하나가 보이질 않습니다. 모나리자는 어디로 갔죠? 아무리 찾아봐도 원래 있어야 할 곳에 보이지 않습니다.
문득 루브르를 돌아다니면서 일부 통로가 폐쇄된 것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전시실의 1/4 정도는 관람할 수가 없었는데, 폐쇄된 통로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본 기억이 납니다. 이상하다 싶어서 박물관 입구로 돌아가 보니 모나리자의 전시 장소를 옮겼다는 공고가 보입니다. 모나리자를 박물관 한쪽 구석으로 옮기고 박물관 구역 일부를 모나리자 관람을 위한 대기 구역으로 봉쇄를 한 모양입니다. 아무리 모나리자가 유명하고 사람들이 많이 몰려서 관람하기 쉽지 않다고 해도 그렇지, 테마를 따라 전시된 전시실의 일부를 따로 구역을 내어 봉쇄할 정도인지 의문이 듭니다. 잘 구성된 다른 전시실의 큐레이션을 망쳐버릴 정도로 모나리자가 대단한 작품을까요?
어쨌든 루브르에 왔으니 모나리자는 보고 가야겠습니다. 대기줄에 서니 모나리자를 보려면 45분은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모나리자를 보러 가는 길에만 관리 직원 스무 명 정도는 본 것 같습니다. 한참을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801 호실에 레오나르도 작품으로 가득 찬 방에 들어섭니다. 방에서도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정중앙에 작은 액자에 전시된 모나리자를 드디어 보게 됩니다. 모나리자를 본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생각보다 그림도 작고 명성에 달하는 작품인지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만, 저는 그조차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도 직원들이 밀어대고 'one picture for one person please'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말 그대로 카메라 셔터 한 번만 누르고 그대로 줄에 쓸려나가 버립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이 몰린다지만 그렇게 기다려서 10초도 구경하지 못한 바람에 제가 진짜로 모나리자를 본 건지조차 가물가물합니다. 정말로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는 작품인지 언제 한 번 마음 놓고 볼 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렇게 꼬박 여덟 시간을 돌아다닌 끝에 어쨌든 루브르를 완주하는 데 성공합니다. 점심도 걸러서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픕니다. 뿌듯하기는 한데, 어느 시점부턴 몸에 한계가 와서 고통스러웠던 하루입니다. 오디오 가이드로 받은 3ds가 다섯 시간 만에 배터리가 다 돼서 먼저 나가떨어진, 루브르를 본격적으로 관람한 파리의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