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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Sep 15. 2020

8월 4일, 63일 차, 파리

빈둥거리는 하루와 파리입니다

갑작스럽게 잠에서 깹니다. 사방이 어두컴컴합니다.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아 머리를 부둥켜 잡습니다. 스마트폰을 살짝 보니 새벽 세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잠시 생각을 정리해보니, 전날 루브르 박물관에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서 뻗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어제는 정말로 힘겨운 하루였나 봅니다.


자리에 누워서 스마트폰을 확인하려고 전원을 켜니, 맞은편 침대의 히피 스타일 친구가 어김없이 불 좀 끄라고 눈치를 줍니다. 더 잠도 안 오고 방에 있어봤자 불편하기만 해서 노트북이랑 스마트폰을 들고 호스텔의 공용공간으로 나갑니다. 크게 할 일도 없고 아침 식사가 나올 때까지 글이나 끄적거립니다. 새벽 시간이라 사람도 없고 공기는 고요하기만 합니다. 정적에 잠겨 요 며칠간의 파리에서의 경험을 되새김질해봅니다. 카타콤도 가보고 샹젤리제도 거닐어보고 에펠탑도 올라가 보고 디즈니랜드도 즐기고 루브르 박물관도 완주했습니다. 강렬한 경험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면서 감정의 제방에 산산이 부서지는 것만 같습니다. 욕심을 내면 파리와 근교에서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겠지만, 곱씹지도 못할 경험의 급류에 몸을 던져버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란 생각을 해봅니다.  새벽 공기에 고요함에 서서히 정적에 이른 생각은 이윽고 하루정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휴식으로 귀결됩니다.


사색과 명상으로 흐르던 시간이 떠오르는 해와 함께 분주하게 변해갑니다. 아침 일찍부터 호스텔 스태프들이 식사를 준비하느라 소란스럽습니다. 뻑뻑한 바게트 조각에 살구잼이 전부인 슬픈 아침식사와 함께 새벽의 공상도 막을 내립니다. 아침을 욱여넣고 나니 다시 피로가 몰려옵니다. 밤새 생각하다가 아침을 먹고 잠을 청하는 모양새가 그리운 대학시절을 상기시킵니다.


다시 눈을 뜨니까 오전 11시입니다. 보통 같으면 이렇게 잠을 퍼잤다는 사실에 짜증도 나고 자책감을 느꼈겠지만, 푹 자고 너무 개운하게 잠에서 깨어 마냥 기분이 좋습니다. 배를 굶주리는 소리에 씻지도 않고 자고 일어난 모습 그대로 근처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갑니다. 이렇게 지저분한 꼴로 밖을 나가면서 다른 사람들 눈치를 안 봐도 된다는 사실에 괜히 흥이 더 납니다.


점심은 근처 한식당에서 닭볶음탕을 먹습니다. 진득진득하게 달고 매콤한 것이 제대로 한국식입니다. 아니 먹다 보니까 원래 닭볶음탕이란 게 이렇게 달았나 싶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너무 배가 고파서 반찬 하나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습니다. 무엇보다 물을 공짜로 준다는 것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유럽 식당에서 공짜 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한 일이니까요. 그냥 주말에 늦게 일어나 빈둥거리다가 동네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나온 기분입니다. 정말로 제가 파리를 여행하고 있는 게 맞나요?

맛난 닭볶음탕

점심을 먹고 와선 대충 방에서 노닥거리면서 빨래를 준비합니다. 마지막으로 빨래를 한 것이 로마였으니까 열흘 치 가까이 빨래가 쌓여 있습니다. 이렇게 한가롭게 시간을 보낼 때 잡일을 하지 않으면 다음 날부턴 또 빡빡한 일정에 쫓겨 허둥지둥 댈 것이 분명합니다. 빨랫감이 많아 가득 찬 빨래 봉투 두 개를 들고 빨래방까지 갈 생각을 하니 조금 아찔합니다. 다행히도 호스텔 바로 맞은편에 빨래방이 있어, 재빨리 두 번 왕복하여 빨랫감을 옮깁니다. 빨래방 설명이 전부 프랑스어로 쓰여 있어서 대충 세탁기를 돌리다가, 세탁기에 따로 세제가 첨부되지 않아서 따로 사서 넣어야 한다는 것을 모른 채로 돌리는 해프닝을 겪습니다만,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어떻게든 해결합니다.

여행에 빨래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빨래를 마치고 대충 정리하니 벌써 저녁시간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내다 보니, 문득 잊고 있었던 목표 하나가 떠오릅니다. 바로 파리 노르트담 대성당에 가보는 겁니다. 2019년 4월 16일 화재에 의해서 소실되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도 유명하고 당연히 있어야만 할 것 같은 랜드마크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지리라곤 아마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일입니다. 아마 화재가 없었어도 가보았겠지만은 불타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랜드마크의 잔해 속에 어떤 현재가 있을지, 그 광경만큼은 파리를 떠나기 전에 두 눈에 담고 싶습니다.


숙소에서는 걸어서 왕복 두 시간 정도의 거리이긴 합니다만, 어차피 오늘은 하루 종일 쉬어서 기운도 넘치고 할 일도 없어서 걸어가 보도록 합니다. 구글맵으로 노르트담 대성당으로 가는 길을 찍어보니, 붉은 가위표와 함께 "폐쇄됨"이란 안내문이 뜹니다. 상실의 실재가 적나라하게 다가옵니다.

멀리서 보이는 노르트담

노르트담에 가까이 오니 경비를 서는 경찰과 노르트담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멀리서 본 노르트담 대성당의 정면은 멀쩡하여 크게 불탄 건 아닌가 싶었지만, 센 강을 따라 노르트담을 한 바퀴 돌아보니, 소실되어 앙상히 드러난 내부를 철제 구조물로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 생생하게 보입니다. 노르트담 주변은 철제 벽으로 봉쇄되어 있어서, 벽 너머로만 간신히 대성당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불탄 노르트담과 사람들의 다양한 군상
측면에서 보니 부서져내린 구조물이 선명히 보입니다
원래라면 멀쩡한 노르트담을 위해 설치되었을 망원경

그렇게 무너진 노르트담 주위로는 버스킹 중인 사람들이 줄지어 있고, 근처 기념품 점에서 파는 노르트담은 여전히 멀쩡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내부 구조물이 드러나 흉해진 노르트담입니다만, 사람들은 여전히 기념사진을 찍기에 바쁩니다. 노르트담을 둘러싸고 흐르는 센 강을 따라 사람들을 가득 채운 여객선이 지나가는데, 여객선에 탄 사람들은 일제히 카메라를 들고 불에 탄 노르트담을 찍습니다. 과연 불에 탄 노르트담이 여행객들에게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 사실 여행객들에게 노르트담은 멀쩡했든 아니든 상관없는 게 아니었을까, 오히려 불에 탄 대성당을 찍을 수 있는 기회에 더 흥분한 것은 아닐까,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순간입니다.

노르트담을 찍느라 여념이 없는 유람선의 사람들
노르트담에서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

돌아오는 길에는 k-mart라는 한국 식재료 전문점에 들러서 간단히 야참 거리를 사 옵니다. 신기한 것이 파리에만 k-mart가 몇 개가 들어설 정도로 제법 인기몰이를 하는 모양입니다. 규모도 확실히 커서 다른 한국 식재료 점과는 궤를 달리하는 양질의 상품과 적당한 가격에, 한국인뿐만 아니라 파리에 정착한 동아시아계 이주민들에게 확실히 큰 인기인가 봅니다. 한국에서도 본 적 없는 불닭볶음면의 만두 버전인 불닭 만두가 눈에 띄어 야참 거리로 구매하기로 합니다. 계산을 기다리는 동안 한 한국인 아주머니께서 여행하는 청년을 만나 즐겁다고 대화를 청하십니다만, 이윽고 정치적인 이야기로 화두가 넘어가 대충 흘려듣고 재빨리 마트를 빠져나옵니다.

호스텔에 도착하자마자 아까 사 온 만두를 전자레인지를 이용해 간단히 조리해 먹어봅니다. 그런데 불닭 답지 않게 쓸데없이 맵기만 하고 영 맛이 없습니다. 조리하지 않은 남은 만두를 냉장고의 프리 푸드 코너에 두고 다른 방문자에게 선심을 베풀기로 합니다. 생각해보니 오늘이 호스텔에서의 마지막 밤이고 파리도 오늘이 지나면 안녕입니다. 시원섭섭한 마음을 지울 수 없는 파리의 하루입니다.

저물어 가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
해외에서 처음 맛보는 불닭만두는 완전한 실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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