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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Oct 21. 2020

8월 6일, 65일 차, 브뤼셀

고혹스러운 격의 도시, 브뤼셀입니다

선선한 아침 바람에 눈을 뜹니다. 얼마 전까지 불구덩이 같던 더위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날도 쾌적하고 자는 공간도 편하니 오래간만에 잠을 푹 자고 일어납니다. 가볍게 몸을 풀면서 컨디션을 확인해보니 날아갈 것만 같습니다. 당장에 어디로라도 달려가고 싶어 서둘러 움직여 보기로 합니다.


당장에 숙소를 나오자마자 검은색과 금색으로 둘러싸인 그랑플라스 눈에 들어옵니다. 각종 건물에 둘러싸인 널따란 광장에는, 아침부터 여행을 준비하는 인파로 북적북적합니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스페인, 국가를 상징하는 깃발이 달린 우산을 들고 가이드들이 사람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가이드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이 여행에 앞서 필요한 준비사항을 귀 기울여 듣고 있습니다. 여행자들의 시작에 발맞춰, 저 역시 저의 여행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여행의 시작지 그랑플라스
국기 달린 우산을 쓴 가이드들이 보입니다

여행의 처음은 브뤼셀의 상징이라는 오줌싸개 동상입니다. 기묘한 자세로 오줌을 싸고 있는 어린아이의 동상은 분수로 기능하고 있는데, 형태가 괴이하고 그렇게 유쾌한 기념물은 아닙니다. 질 나쁜 블랙유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도시의 상징이 되었는지 의아할 뿐입니다. 도시 곳곳에서 형형색색의 동상 모조품과 함께 오줌싸개 초콜릿까지 파는 걸 보면 도시의 주력 상징으로 미는 건 확실한 모양입니다. 실례되게도 브라티슬라바에서 본 '맨 앳 워크'의 품격 있는 해학미가 그리워지는 순간입니다.

브뤼셀의 상징 오줌싸개 동상
각종 기념품을 보며 아스트랄한 기분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실망스러운 기념물을 뒤로하고 골목골목을 돌아보는 동네의 풍경은 마음에 쏙 와 닿습니다. 검은색 바탕에 짙은 명암이 뚜렷한 윤곽선을 이루고 붉은 벽돌, 대리석 등으로 조화를 이루는 건물들이, 도로를 따라 곧게 이어지면서 도시 하나가 고풍스러운 회화를 만들어 내는 듯합니다. 건물 곳곳에 세워진 동상과 벽화를 찾아보는 것이 그림을 돋보기로 세세히 들여다보며 작품을 곱씹는 기분입니다.

자전거를 벽면에 붙힌 신기한 카페
코미디언 Tom Frantzen을 기념하는 동상
멋들어진 재즈 카페


고풍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비단 도시 풍경 만이 아닙니다. 법원인 팔레 드 쥐스티스 압도적인 외관과 동상, 노트르담 뒤 사블롱 성당의 가문 상징이 그려진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노블레스의 자부심을 느껴집니다. 성당을 수놓은 가문의 문장이 최근 연도까지도 이어져 오는 것이 귀족 가문이 현대의 벨기에 사회까지도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가늠케 합니다. 도시 전체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도 어쩌면 여기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브뤼셀 법원과 1차 세계대전 용사를 기린 기념비
노르트담 뒤 사블롱과 종교에 헌신한 귀족 가문의 상징물들

잡다한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벨기에 왕립미술관으로 발걸음을 향합니다. 국립도 아니고 무려 왕립미술관이라니 어떤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을지 두근거립니다.

기묘한 인물상이 반겨주는 벨기에 왕립미술관
놀랍게도 한국어 해설을 따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미술관 상층에는 고전 명작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고전 종교화, 인물화, 풍경화와 동상들을 훑으며 지나갑니다. 자세한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가볍게 스치고 지나가는 인상으로만 강한 임팩트를 주는 작품들이 몇몇 눈에 띕니다.

강한 인상을 주었던 작품들

1층은 현대 작품 전시관으로, 현대 미술이 언제나 그렇듯이 괴기하고 공포스러운 이미지들에 소름이 끼칩니다. 작가의 심층 세계를 적나라하고 강렬한 이미지로 나타낸다는 점은, 현대 예술이 좋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도댸체 왠 구더기 사진이...
각양 각색의 입 이미지와 이에 대한 해설. 괴기하기 그지없습니다
딱따구리 속에 딱따구리라...


왕립미술관 지하 통로를 따라 마그리트 박물관으로 이동합니다. 르네 마그리트가 누구이기에 왕립미술관과 나란히 하는 영광을 누리나 궁금해하며 작품 관람에 들어갑니다. 전시된 작품들이 어디선가 본 듯한 화풍에 기시감을 느끼며 매혹적인 전시물에 빨려 들어가다가, 곧 파이프 그림을 본 순간, 정말로 유명한 화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마그리트는 바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유명한 이미지의 배반작가였던 겁니다. 추상적 관념을 구체화하여 공간 속에 사물을 재구성하는 기괴한 화법은, 낯선 단어로 인위적으로 문장을 조성하는 것처럼 형언하기 어려운 위화감과 아이러니를 마주하게 합니다. 정체모를 당혹스러운 감상에서 흥미를 느끼며 작가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입니다. 작가의 대표작들이 출장을 가거나 다른 전시관에 전시 중인 것이 마냥 아쉬울 뿐입니다.

마그리트 전시관으로 향하는 길
감명 깊게 본 마그리트의 작품들

다음으로 발길을 향한 곳은 브뤼셀 왕궁입니다. 왕궁은 벨기에의 국왕과 왕비가 실제로 사무를 보는 집무실, 외국 정상들을 위한 숙소나 접견을 위한 의원실을 비롯해 왕실의 공업무를 위한 장소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1년 중에 딱 8월에만 대중에게 공개된다고 하는데 시기가 좋아 왕궁 내부를 구경하게 됩니다.

운좋게 열려있는 브뤼셀 왕궁

지금까지 구경한 다른 궁전과는 다르게 비교적 현대에 완공되고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어서인지 세련된 근현대식 인테리어가 돋보입니다. 과한 장식이나 벽화는 일체 없이 내부는 흰 대리석과 금빛 테로 깔끔하게 단정되어 있고, 여기에 간단한 그림 몇 점과 샹들리에가 화사한 느낌을 줍니다. 궁전이라기 보단 고급 호텔의 연회장을 보는 느낌입니다. 왕궁 위층에는 일반 대중들을 위해 만화와 과학 체험 등 볼거리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왕가의 노력을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꼭 결혼식장에 온 기분입니다
벨기에 왕가의 변천사
다양한 볼거리로 시민들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왕가의 노력이 엿보입니다

왕궁을 나서면 계단을 따라 넓게 펼쳐지는 예술의 언덕, Mont des Arts가 반겨줍니다. 예술의 정원 입구에서 노란색으로 도배된 폐자전거들로 이루어진 아치문이 반겨줍니다. 브뤼셀을 곳곳에서 자전거 그림과 함께 ARE YOU R`EDDY?라고 적힌 노란색 문구가 바닥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입니다. 프랑스에서 출발하여 브뤼셀에서 마무리되는 50일에 걸친 자전거 종주를 환영하는 응원비였던 겁니다. 아치 한가운데 서서 바라보는 정원의 풍경은 아름다웠던 브뤼셀의 풍경으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예술의 언닥과 자전거 종주
자전거 아치는 위대한 종주를 환영하는 기념비입니다

언덕을 따라서 내려오면 브뤼셀의 또 하나의 대성당인 성 미카엘과 성녀 구둘라 대성당이 보입니다. 성당 앞 작은 공원과 풀밭에는 누워서 쉴 수 있는 의자들이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이 누워서 책기에 저도 지친 다리를 쉬게 할 겸 잠시 의자에 누워봅니다. 하루 종일 선선하게 불어오는 산들바람과 편안한 의자.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잠이 들어 있습니다. 화들짝 놀라 무언가 없어진 게 없나 찾아봅니다만 다행히 별 일은 없는 듯합니다. 제가 이방인이 아니었다면 좀 더 한적한 오후를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곱씹어 봅니다.

성 미카엘과 성녀 구둘라 대성당으로 가는 길에
의자에 누워 스르르 잠이 듭니다


성당 구경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벨기에 만화 센터입니다. 브뤼셀을 돌아다니다 보면 만화 가게나 만화풍으로 그려진 벽화 같은 게 많이 보입니다. 벨기에 사람들의 만화 사랑이 각별한 것인지 만화 센터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벨기에 만화 센터로 입장


만화 센터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만화는 땡땡의 모험스머프입니다. 세계적인 유명세를 반영한 듯이 아예 코너 하나를 마련해서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만화들을 페이지마다 설명하듯이 전시되어 있는 데, 비록 대사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상황 설명과 그림만으로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제게 익숙한 한국 웹툰, 일본 망가와는 완전히 색다른 재미에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땡땡과 스머프
흥미로운 작품들이 여럿 눈에 들어옵니다
유려한 팬터치가 돋보이는 작품들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오줌싸개 소녀을 봅니다. '

오줌싸개 소년과 쌍을 이루게 만든 느낌입니다만, 역시 질 나쁜 블랙유머로 밖에 보이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매력적인 볼거리가 넘치는 브뤼셀을 대표하는 기념물이 왜 오줌싸개되었는가, 생각하며 마무리짓는 브뤼셀의 하루입니다.


오줌싸개 소녀상. 굳이 이랬어야 했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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