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파크 같은 도시 브뤼헤, 중세의 성과 겐트
이틀 전에 산 바나나 한 송이가 탁자에 있습니다. 일곱 개가 달려있는 작은 바나나 송이인데 값이 1유로 밖에 하지 않아 덥석 일곱 개가 붙어 있는 작은 송이인데 값이 1 유로 정도밖에 하지 않아 덥석 샀던 기억이 납니다. 낱개 포장이라면 한국에서 살 때보다 반 이상 싼 가격이었는데, 껍질이 푸르스름한 것이 익질 않아서 살 당시만 해도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던 바나나입니다. 버리기는 아깝고 먹을 수는 없어서 방치해두고 존재를 잊고 있었는데, 이틀 만에 벌써 노르스름하게 익어 있습니다. 다행히 맛도 나쁘지 않고요. 브뤼셀 근교를 돌아볼 오늘의 고된 일정을 생각하며, 바나나 여섯 개를 그대로 배에 쑤셔 넣습니다.
브뤼셀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 네덜란드와 국경을 맞닿고 있는 브뤼헤에 도착합니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강을 따라 펼쳐진 공원이 눈에 들어옵니다. 가로수 사이로 간질거리는 햇살을 만끽하며 공원을 거닐다 보니 이윽고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들어섭니다. 작은 집들이 길을 따라서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마치 레고를 조립한 것처럼 계단처럼 각 진 지풍이 인상 진 독특한 풍경입니다.
브뤼헤는 이제 막 아침을 시작하는 분주한 활기로 가득합니다. 동네를 가로지르는 강을 따라서 걸어가며 가게 오픈을 준비하는 사람들, 마을을 구경하는 관람객 무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특히나 눈에 띄는 것은 베네치아처럼 동네 곳곳을 파고드는 뱃길과, 보트를 타는 사람들과, 다소 투박한 땅을 쉽사리 해치고 다니는 마차들입니다. 사람이 사는 동네라기엔 너무나도 아름다운 네덜란드 풍의 테마파크를 거니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더 신경 쓰이는 점은 마차 기수 대다수가 여성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다녀 본 다른 유럽 도시에서 여성 기수를 본 적이 거의 없기에, 브뤼헤에 여성 기수들만 있는 배경에 대해서 호기심이 생깁니다. 언젠간 알아볼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브뤼헤는 관광 지구에 우후죽순 만들어진 관광상품이 난립한 것처럼, 각종 볼거리들이 넘쳐납니다. 맥주 양조 체험관을 시작으로 의학 박물관, 미라 박물관, 도시 역사박물관, 초콜릿 박물관, 현대 미술관에 심지어 고문 박물관까지 무슨 이런 걸 전시하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볼거리들이 즐비합니다. 개인적으로 의학 박물관은 꼭 가보고 싶지만 오늘은 갈길이 바쁘기 때문에 그냥 지나쳐 가기로 다짐합니다. 기념품 가게를 수놓은 예쁘게 조각된 초콜릿, 사탕 등으로 눈요기하면서 동네 분위기를 만끽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합니다.
딱 한 곳, 시간을 내어 가볼 수 있기에 점심을 먹으며 어디를 가볼지 내내 고심해봅니다. 브뤼헤에 와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이 예쁘게 꾸며놓은 동네 풍경이기에, 한눈에 동네를 볼 수 있는 마을 중앙의 종탑에 가보기로 합니다.
입장료를 무려 12 유로나 받는 작은 종탑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다지 길지도 않은 줄이 왜 아무리 기다려도 줄어드는 기미가 보이질 않는가 했더니 단 50명만 동시 입장이 허용이 된다고 합니다. 차라리 돌아갈까,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닐까 고민하면서 한 시간 반 가까이를 기다린 끝에야 겨우 종탑 등반을 시작합니다. 작은 크기에 비해 높이가 제법 되는 종탑에 올라서서 내려 본 도시의 풍경에는, 붉은 지붕으로 알록달록하게 물든 한 폭의 그림이 담겨 있습니다. 종탑 내부에는 시계와 종탑을 동작시키는 기계장치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재미난 구경을 합니다. 때마침 정각 시간이라 기어가 맞물리면서 타종하는 모습도 구경하게 됩니다. 다른 곳을 다 제쳐두고 종탑에 올라온 선택은 나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브뤼헤 역에서 남쪽으로 20분 정도 기차를 타면 오늘의 두 번째 목적지인 겐트에 도착합니다. 겐트 역은 폐공장을 예술작품으로 재탄생시킨 듯한 독특한 외형을 하고 있습니다. 역 앞뒤에 펼쳐진 광장에는 자전거 수 백대가 빽빽하게 주차되어 있는데, 수명을 다한 자전거들이 폐차를 기다리면서 버려져있는 자전거 폐차장인 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자전거를 세우는 것이 다행히도(?) 평범한(?) 공용 자전거 주차장인 모양입니다. 사람들이 자전거를 얼마나 타길래 부지 전체를 내어 이런 초대형 자전거 주차장이 형성되어 있는지 마냥 신기할 따름입니다.
겐트는 브뤼헤와는 달리 특색이 뚜렷하지 않은 평범한 도시인 듯합니다. 역사에서부터 시작되는 평범한 풍경을 걷고 걷다 보면, 브뤼셀에서 봤던 특유의 묵직한 검은 칠이 된 건물들이 나오면서 도시의 풍경이 달라지는 데, 시청사 등이 있는 도시의 중심지를 고풍스럽게 꾸미는 것이 벨기에 도시의 특징인 모양입니다.
중심지에서 거대한 성당과 종루를 지나면 레이어 강을 건너는 다리가 나오는데 그 너머로 그라벤스틴이라는 낡은 성이 보입니다. 그리 크지 않은 성의 내부를 요리조리 쏘다니면서 성 내의 작은 방들을 둘러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10세기에 지어진 낡고 투박한 성은 보존이 잘 되어 있어서 구경거리가 많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안내센터에서 받은 오디오 가이드로, 단순한 오디오 가이드가 아니라 과장 섞인 연극 톤으로 동화를 읽어주듯이 이야기해 줍니다. 가이드 포인트마다 상황을 설명하는 귀여운 그림들 덕에, 영어가 다소 어려워도 설명이 친절하다는 느낌일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여행에 행운을 비는 인사말까지, 다른 오디오 가이드도 이렇게 관람객을 신경 써 줬으면 싶은 생각이 듭니다.
브뤼헤와 겐트를 구경을 마치고 브뤼셀로 돌아오니 벌써 완연한 밤입니다. 쉴 틈 없이 돌아다녔더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하루가 다시 끝나갑니다. 브뤼셀에서 3박 일정을 잡을 때는 너무 길게 잡은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벌써 도시를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이 마냥 아쉽기만 합니다. 이제 남은 여행 일자도 고작 3주뿐입니다. 여행의 끝을 실감하며 다시 내일을 준비하는 브뤼셀의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