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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Nov 24. 2020

8월 9일, 68일 차, 런던

지구촌이 담긴 영국박물관과 런던입니다

전날 크게 앓은 복통에 큰일을 치른지라 오늘도 상태가 안 좋으면 어쩌나 걱정부터 듭니다. 다행히도 아침에 속이 편한 것이, 한국에서 챙겨 온 지사제가 꽤 효과가 있나 봅니다. 


제가 묵는 숙소는 0층과 1층이 펍이고 그 위로 도미토리 룸이 있는 재미있는 구조입니다. 아침에 빠르게 준비를 하고 0층으로 내려가니 펍에서 아침 식사를 제공해줍니다. 식빵에 각종 쨈, 버터, 살라미, 토마토, 오이에 잡곡 후레이크, 우유, 요플레, 과일들, 주스까지 단 4유로만 내면 마음껏 먹을 수 있는 화려한 식단입니다. 프랑스, 이탈리아의 호스텔에서 제공해주던 빵쪼가리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올 지경입니다. 혹시나 또 장이 난리를 치지 않을까 조심스러워지면서도 호화로운 아침에 손이 멈추질 않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아침 식사입니다.


오늘의 목표는 영국박물관 완주입니다. 박물관은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는데, 개관 시간까지 시간도 남았고 아침도 이르기에 가볍게 걸어가 보기로 합니다. 

출근이 한창인 런던 사람들


낯선 모르는 도시를 마냥 걷는 것은 생각보다 더 재미있는 일입니다. 분주하게 아침을 준비하는 사람들 사이로 활보하는 도시는 생동감이 넘쳐납니다. 부부젤라 같은 전통 악기를 불며 시위를 하는 형광색 조끼를 입은 사람들도 보입니다. Protest라고 적힌 종이를 나누어주는데 아마 데모하는 사람들인 모양입니다. 자세한 내막은 모릅니다만 지나가는 아시아 여행객에게 역설을 할 정도로 다급함과 절실함은 느낄 수 있습니다. 잘은 몰라도 좋은 방향으로 해결되기를 빌어봅니다.

데모에 한창인 사람들


상쾌한 오전 산책의 끝에 영국박물관에 도착합니다. 정면에서 바라본 영국박물관의 모습은, 직사각형 구조에 기둥들이 곧게 서 있는 그리스 신전을 닮았습니다. 박물관 입구에 소지품 검사 줄이 그렇게 길지 않아 사람이 별로 없는 줄 알았는데, 박물과 내부에 들어가니 사람이 바글바글 합니다. 박물관을 그냥 돌아볼 수는 없어서 오디오 가이드를 빌리는데 대충 한 시간이나 소모해버립니다.

영국박물관 도착

기다리는 동안 영국박물관의 로비인 great court를 둘러보는데 재미있는 풍경이 보입니다. 오디오 가이드를 안내하는 현수막에 다양한 언어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영어 다음에 무려 한국어가 있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 대한항공이 가이드 스폰서를 하느라 가이드 언어 순서에 한국어가 우선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반면 반대편에 걸려있는 현수막에서는 일본관을 홍보하는 (우리나라에선 전범기업으로 알려진) 미쓰비시의 스폰서가 보입니다. 영국박물관에서 로비에서부터 스폰서십을 통해 로비 전쟁 한일전이 펼쳐지는 모습이 참 흥미롭습니다. 영국박물관에 너도나도 스폰하겠다고 달려드는 것이, 문화와 브랜드 파워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생각해봅니다.

자세히 보면 스폰서로 대한항공과 미쓰비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디오 가이드를 수령받고는 0층에 위치한 제1번 방부터 관람을 시작합니다. 처음 만나는 관은 무려 계몽주의관으로, 영국박물관이 설립되게 된 사상적 배경과 목적, 계몽주의 시기의 전시물과 수집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영국박물관의 철학에 대한 상징적인 관으로 주로 다른 지역의 전시물들이 영국박물관으로 어떤 경위로 수집되었는 지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영국 청년들이 한 사람의 어른으로 인정받는 과정이 다른 지역에서 유물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이야기는, 영국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유물에 집착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물론론 약탈과 도굴이 수집의 상당수였음을 생각해보면 유쾌한 일은 아닐 겁니다. 한 가지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점은 수집품들이 온전히 전시되어, 도리어 본토에선 볼 수 없는 유물들이 남아있다는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영국박물관의 '수집'의 역사

이후로 정말 다양한 국가의 전시관들을 둘러봅니다. 중미의 아즈텍, 마야 문명, 북미, 이집트, 이란, 페르시아, 그리스, 메소포타미아, 바빌론, 로마, 아시리아, 아프리카 대륙, 오스트레일리아, 태평양, 중국, 한국, 일본 등 전 세계의 다양한 문명의 수집품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루브르가 여러 문화권을 두루두루 다룬다면, 영국박물관은 각 국가에 대한 전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물론 국가와 문명의 인지도에 따라 소장품의 양적 질적 차이가 많이 납니다만, 가히 세계 박물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이쯤 되니 왜 이름이 영국박물관인지 궁금해집니다. 정작 영국에 관한 전시가 거의 보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왼쪽부터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중국 유물
영국박물관에서 재조립당한 그리스의 파르테논

전시관 최상층에는 한국관과 일본관을 찾을 수 있는데, 아직 전시물이 많이 부족하지만 경쟁적으로 전시물을 채우려는 흔적들이 보입니다. 여기서까지 기를 쓰고 한일전을 펼치는 모습은 조금 안쓰러운 생각이 듭니다. 국가 문명관 이외에도 화폐나 시계 등, 하나의 테마를 두고 여러 문명권을 비교하는 전시관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테마가 뚜렷한 전시관이 훨씬 흥미가 갑니다.

한국관과 사랑채, 백남준의 작품
게임과 화폐관, 매직더 게더링,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짐바브웨 달러

여섯 시간 만에 영국박물관 상설 전시 관람을 완주합니다. 뿌듯한 마음으로 로비로 내려오니 특별 전시 안내가 보입니다. 특별 전시의 주제는 MANGA로 일본 만화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골든 카무이 주인공이 걸려있는 현수막을 보니 전시를 준비한 사람들이 일본 망가를 좀 아는 사람들인 모양입니다. 20파운드에 달하는 비싼 관람료가 아깝긴 합니다만, 영국박물관도 무료로 봤겠다 전시 내용도 흥미롭겠다 특별 전시를 보고 가기로 합니다.

무수한 망가 작품들을 제치고 표지로 선정된 골든 카무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로 테마로 시작하여 일본 만화의 기원과 발달, 특징 및 주요 작품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전시실 중앙에는 만화책방을 꾸며 사람들이 만화책들을 볼 수 있게 전시해놓은 것이 인상적입니다. 전시 작품 대부분을 아는 것을 보고 스스로의 덕력에 조금 놀라버립니다. 지나가는 두 사람이 망가의 문화적 영향력에 대해서 토론하는데, 실제로 망가가 세계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끼쳤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유럽에서 본 많은 서점에서 manga 코너가 따로 자리 잡았던 걸 보면, 어느 정도 스테디셀러 문화로서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언젠가 웹툰도 이런 날이 찾아올까요?

전시의 시작은 일본 망가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데즈카 오사무와 일본 만화의 표현 방식, 그리고 코미케
유리 가면과 드래곤볼
편하게 읽어보라고 꾸며진 만화방에서 찾은 최애작품 '4월은 너의 거짓말'
코너를 돌자 갑자기 튀어나오는 거인...
나루토와 원피스의 그 유명한 순간들
골든 카무이는 꼭 보시라고 추천하는 작품입니다

관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소나기가 우수수하고 쏟아집니다. 혹시나 싶어서 우산을 들고 오길 정말 잘한 것 같습니다. 한 10분을 몰아치고 금방 그치더니 도시 한가운데 뜬 무지개가 보입니다. 항상 비가 와서 우중충하고 변화무쌍하다는 런던의 날씨에 이런 소나기도 일상의 모습일까요? 비가 왔던 것은 개의치도 않고, 길거리의 펍에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삼삼오오 모여 맥주를 마십니다. 낯선 풍경에 이방인임을 자각하는 런던의 하루입니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는 런던 거리
소나기가 그치자 거리에 뜬 무지개
비가 언제 왔냐는 듯이, 퇴근 후 맥주를 즐기는 길거리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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