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여름, 유럽을 강타한 이슈는 바로 이례적인 폭염입니다. 근 몇 년 동안 국내에서 지속된 더위를 피해 유럽으로 왔건만, 막상 한국은 시원한 여름을 보내는 반면 유럽이 끔찍하게 더운 실정입니다.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빗나간 모양새입니다.
더위를 피할 방법은 해가 뜨기 전부터 움직이는 겁니다. 오늘의 목적지는 버킹엄 궁전으로 숙소에서부터 걸어가면 한 시간 거리입니다. 런던의 명물인 언더그라운드는 여러 이유로 타고 싶지 않고, 폭염도 피할 겸 아침 산책을 하면 그만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아침 7시 알람을 맞추어 놓습니다만 잠자리에서 정신을 차린 시간은 벌써 오전 10시입니다. 버킹엄 궁전에 가는 이유가 오전 11시에 거행되는 왕실 근위병 교대식을 보는 것이므로 씻는 것도 미루고 서둘러 출발하기로 합니다.
이례적인 폭염이라던 뉴스와는 달리, 해가 뜬 지 제법 시간이 지난 런던의 아침은 습기를 머금은 바람에 조금 춥기까지 합니다. 분명히 해는 떠 있는 데 바람에 실려 가랑비가 살짝살짝 흩뿌리는 것이 가볍기 달리기에 좋은 날씨입니다. 시내를 따라 달리다 보니 LGBTQ를 환영하는 화려한 현수막이 연다라 보입니다. 런던을 대표하는 트라팔가 광장을 지나 뮤지컬 전용 소극장들을 지나갑니다. 극장 앞으로 넓은 도로를 따라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과 구경꾼들이 이어집니다. 가볍게 시작한 아침의 조깅이 뜻밖의 구경거리로 흥에 달아오릅니다.
트라팔가 광장에서 버킹엄 궁전으로 향하는 길은 붉은 차도 사이로 넓은 가로수길이 펼쳐집니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이 되어 초조하게 걷고 있는데 경찰이 교통 통제를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형광 조끼를 입은 기마경찰의 호위 아래 붉은 갑옷과 투구를 쓴 기마 행렬이 궁전을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혹시나 근위병 교대식이 벌써 시작했나 싶어서 전력으로 궁전을 향해 달려갑니다.
버킹엄 궁전에 도착하니 사람이 빡빡하게 가득 차 있습니다. 구경꾼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궁전의 철장 너머로 근위병들이 나오고 있는지조차 알 방법이 없습니다. 방법을 찾아보다가 중앙에 기념물에 올라타서 궁전을 내다보는 사람들까지 눈에 띕니다. 방법을 찾아보다가 결국 가까이서 보는 건 포기하고 분위기라도 느끼고 싶어 군중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지기로 합니다. 그렇게 벤치에 앉아서 10분, 20분을 기다리는 데 아무 이벤트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을 직감하고 정보를 확인해보니, 8월부터는 근위병 교대식을 격일로 진행하는데 오늘은 마침 쉬는 날이라는 것을 알아냅니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며 모여있기에 당연히 교대식을 기다리겠거니 싶었는데 도대체 이 사람들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요? 아무리 봐도 별 행사는 없는 것 같아서 저는 발길을 돌립니다.
버킹엄 궁전 앞으로 세인트 제임스 공원이 이어집니다. 호수에 비둘기, 오리, 백조부터 이름을 알 수 없는 새까지 다양한 새들로 가득합니다. 오리는 크기가 너무 커서 이게 정말 오리가 맞는 건지 두려울 정돕니다. 사람들을 겁내지 않는지 물가 가까이까지 다가오는데, 수면 아래서 발로 딛고 서있는 모습까지 선명하게 보일 정돕니다. 그 모습을 보자 문득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오리는 수면 아래서 볼품없이 발을 젓는 것으로 수면 위의 고상한 모습만 보여준다는 데, 참 재미없는 비유라는 생각을 합니다. 오리가 헤엄치기 위해 힘차게 발을 젓는 모습에서 저는 웅장한 생동감을 느끼기 때문일 겁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공원을 거닐다 보니 사람들의 대기행렬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무슨 줄인가 봤더니 처칠 전쟁 박물관의 대기줄입니다. 처칠 박물관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처칠의 지하정부 War Cabinet을 그대로 재현한 공간이라고 합니다. 좁은 복도를 따라 이어지는 지하 벙커의 좁고 불편한 방들에서 중요한 장교들마저 불편을 감수했어야 할 전쟁 당시의 긴박감이 느껴집니다. 그렇게 기본적인 편의 시설조차 없는 와중에 방송과 언론에 관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모습에서 처칠이 미디어 활용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보안이 가장 엄중했던 Map Room은 처칠 지도부가 지도를 펼쳐놓고 주요 전략적 요충지를 가리키며 전술을 논의하던 모습을 상상하게 합니다. 이차 세계대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방에서 눈물을 흘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박물관입니다.
처칠 전쟁 박물관을 나서서는 웨스트민스터 구역의 템즈 강을 따라 걸어가 봅니다. 큰 장식 없이 어두운 실내 장식으로 이루어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공사 중인 대한민국 대사관,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웨스트민스터 궁을 차례로 구경합니다. 도착한 시간이 조금 늦어서 사원과 궁에 들어가 보지는 못합니다만 겉으로 봐도 상당한 위용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궁의 외곽을 따라서 영국 국회의사당으로 돌며 가장 기대했던 빅 벤을 올려보는 순간, 실망을 금치 못합니다. 시계탑은 어디 가고 웬 공사 중인 철제 구조물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빅 벤은 2017년부터 2021년에 재개봉을 목표로 보수공사 중이라는 안내문입니다. 아쉬운 감을 감추지 못하고 그대로 웨스트민스터 교를 건너며 템즈 강의 풍경을 바라봅니다. 아쉬운 대로 런던의 또 다른 대표 기념물인 대관람차 런던 아이를 배경으로 사진이나 찍어봅니다.
웨스트민스터 교 역시 사람이 많은데, 눈에 띄는 점은 야바위꾼들이 다리 시작부터 끝까지 줄지어 있다는 점입니다. 컵 세 개로 물건을 숨겨 찾는 야바위는 눈에 훤하게 다 보여서 틀리고 싶어도 틀리기 어려운 수준인데 돈을 걸고 번번이 틀리는 사람이 나오는 것이 영 수상쩍기만 합니다. 이런 건 물어보나 마나 사기인 것이 뻔합니다만 야바위꾼들이 한 둘도 아니고 사람들이 줄지어서 야바위를 하는 것을 보면 나도 몇십 파운드는 쉽게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혹합니다. 그런 생각에 야바위를 곰곰이 살펴보자 바람잡이로 보이는 사람이 돈을 걸어보지 않겠냐고 부축입니다. 순간 정신이 확 들어서 괜히 삽질하지 않도록 서둘러 자리를 뜹니다.
돌아오는 길은 아침에 달렸던 길을 그대로 따라서 돌아갑니다. 다시 만난 트라팔가 광장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버스킹을 즐기고 있습니다. 저녁 공기는 선선하고 런던의 풍경이 좋아서 여유를 즐기는 신선이 된 기분입니다. 매일같이 돌아다니고 글을 쓰는 것이 요즘의 일상이니 신선을 자처해도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좋을 것만 같은 런던의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