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끌벅적한 대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납니다. 얇게 눈을 떠보니 불량해 보이는 외모의 영국 청년 넷이 마치 자기들 세상이라는 마냥, 격정적인 어조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전날 저녁부터 F워드를 남발하던 친구들인데, 아무래도 동네 양아치들인 모양입니다. 물건도 험하게 다루고 행동거지가 거칠어서 정말 웬만하면 가까이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 양아치들을 무시하고 재빨리 씻은 다음, 도미토리 룸에서 도망쳐 나옵니다. 파리에서 그렇게 고생하고서는 싼 가격에 혹해서 다시 호스텔에 묵은 스스로가 원망스러워지는 아침입니다. 아무리 시설이 좋고 침대가 편해도 같이 묵는 사람에 따라서 지옥도가 펼쳐지는 것이 도미토리 룸의 현실입니다.
오늘은 당일치기로 옥스퍼드에 다녀올 예정입니다. 런던에서 체류하는 기간이 길다 보니 매일 런던만 구경하는 것도 지루해서, 전날 저녁에 찾아본 여행지입니다. 옥스퍼드라는 이름이 낯익기도 하고, 학부생일 때 많이 들어본 이름이기에 런던에서 가깝게 있는 것을 보고 즉석으로 행선지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동안 다른 도시에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도시 간 이동은 도시 중심지에 위치한 중앙역에서 국철(National Train)을 이용합니다. 신기하게도 런던은 중앙역이 없고 큰 규모의 역 여러 개가 도시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옥스퍼드행 기차는 메릴본 스테이션에서 출발하는데, 숙소가 있는 리버풀 스트리에서 거리가 5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아무래도 거리가 멀어 그 유명한 런던 지하철을 타볼까도 생각해봅니다만, 아침에 너무 서둘러서 나온 건지 시간이 많이 남아돌아 그냥 걸어서 가보기로 합니다. 다행히 날이 선선하여 걷기엔 정말 좋은 하루입니다.
메릴본을 향해 걷다 보니 익숙한 형태의 동상 하나를 발견합니다. 코트 어깨를 덮은 가디건, 담뱃대와 빵모자, 동상에 새겨진 The Great Detective 글귀를 보고 단박에 정체를 알아챕니다. '그렇다면 여기는...'이란 생각에 지도를 열어보니 혹시나 싶어서 지도를 열어보니 제가 서 있는 곳이 바로 그 베이커가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셜록 홈즈의 배경이 되었던 베이커가가 바로 런던에 있었단 사실을 실감하며 전율을 느낍니다. 홈즈 전집을 읽으며 셜록 홈즈의 추리 쇼에 빠져들었던 학창 시절의 추억에 새삼스런 감회에 젖어듭니다. 이제는 셜록 홈즈를 좋아했다고 이야기하기에도 민망한 오래된 추억입니다만, 반가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베이커가 탐방에 나섭니다.
구글맵의 주소지를 따라가며 도착한 베이커가 221B에선 놀랍게도 셜록 홈즈의 생가와 조우하게 됩니다. 물론 홈즈가 소설 속 인물이므로 '셜록 홈즈 박물관'이란 이름으로 생가처럼 꾸며놓은 테마파크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너무나도 현실감 있게 홈즈 시대를 재현하여 홈즈 생가에 방문한 착각이 들 정도로 실감이 납니다.
때마침 도착한 시간이 한 아홉 시 반쯤으로 박물관이 막 문을 여는 시간입니다. 박물관 입구에서 무려 메이드가 팻말을 들고 대기줄 안내를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만약 지하철을 타고 지나쳤다면 이런 볼거리를 놓쳤을 터이니 도시를 걷기로 한 아침의 선택에 스스로 대견해해 봅니다. 길지 않은 줄을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기를, 옛 경찰 복장을 한 안내원이 좁은 삼층집으로 안내를 해줍니다. 생각보다 협소한 건물을 층별로 올라가며 홈즈의 방과 왓슨의 방을 구경하는데, 안내원이 각 방마다 홈즈와 왓슨의 생애를 소개하며 각 유물(?)들에 얽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조금 우습기도 합니다. 홈즈가 생애 즐겨 입었던 옷들, 탐정 도구들, 왓슨의 의료기구들이 널브러진 책상까지... 마치 역사적 유물인양 사람들이 만지지 못하게 경고문을 달아놓은 것이 특히 재밌습니다.
다만 옛날의 홈즈 팬으로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은 홈즈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아이린 애들러의 액자입니다. 홈즈 전집을 읽어보면 여성을 얕보던 홈즈를 엿 먹인 유일한 여성으로 홈즈가 아이린 애들러에 대해 신경을 쓴다는 언급은 있습니다. 소설에서 홈즈 책상에 아이린의 사진이 있었는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다만 홈즈 성격상 아이린 애들러의 액자를 책상에 올려둘 것 같지 않아 그 점이 자꾸만 신경이 쓰입니다.
홈즈의 방을 나와 옆방에는 역대 범인들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방이 보입니다. 위층에는 셜록 홈즈의 중요 에피소드들을 재연한 디오라마가 보입니다. 여기서부턴 현실감 있는 재현보다는 말 그대로 홈즈 종합세트 전시관으로 돌변합니다. 이런 것도 나쁘진 않지만 날카로운 관찰력과 추리를 좋아하는 셜로키언들에겐 조금 아쉬운 구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셜록 박물관에서 구경을 마치니 오전 시간이 다 지나가 있습니다. 홈즈에 팔렸던 정신을 차리고 옥스퍼드행 기차를 타기 위해 메릴본 역으로 서둘러 달려가 봅니다. 영국의 기차역은 다른 나라의 기차역과 달리 전자 게이트가 설치되어 있는데, 종이 쪼가리인 유레일 패스로 전자 게이트를 어떻게 통과해야 할지 몰라 버벅거리고 헤맵니다. 역 내 인포메이션 센터에서는 티켓을 사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티켓 오피스에서는 티켓을 살 필요가 없다고 하니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게이트 앞의 안내 직원에게 물어보자 다른 직원들까지 불러와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하는데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다는 눈치입니다. 영국에서 겨우 올해 들어서야 유레일패스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런 이유에선지 직원들도 정확하게 정책을 모르는 눈치입니다. 안내 직원에게 스마트폰으로 유레일 패스 관련 정책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하니 대충 알았다고 이야기를 하며 플랫폼으로 들여보내 줍니다. 안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하거나 화를 내면 어쩌지 걱정하고 있었는데 기차를 탈 수 있어 겨우 안심을 합니다.
옥스퍼드 역에 도착하자 예스러운 도시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어디를 가든 빌딩과 커다란 건물이 줄지어있던 런던과는 달리, 옥스퍼드는 예스러운 느낌의 낡은 건물들이 많이 보입니다. 크기가 제각각인 벽돌로 지은 건물들에선 중세풍 건축 양식이 물씬 풍깁니다. 그렇게 오래된 대학 캠퍼스들이 도시 전체에 펼쳐져 있는 옥스퍼드는 도시 전체가 학원인 말 그대로 '학원도시'라고 합니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서인지, 많은 college들이 관광객들에게 열려있어 실제로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대학 건물들에 들어가 볼 수 있습니다. 옥스퍼드 역 앞에 있는 추천 코스를 따라 천천히 걸어서 구경해보기로 합니다.
먼저 향한 행선지는 크라이스트처치 단과 대학입니다. 이 대학 출신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 바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저자 루이스 캐럴입니다. 루이스 캐럴은 여기서 수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교편을 잡아 교수로 재직했다고 합니다. 캠퍼스 입구에 위치한 작은 가게인 앨리스 샵에서 앨리스 관련 상품들을 천천히 구경해봅니다. 이번 여정을 곰곰이 되돌아보면 앨리스를 여러 곳에서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여행을 떠나는 비행기에서 읽던 책, 베를린 필 하모닉에서 본 공연, 파리 디즈니랜드에서 만난 캐릭터, 런던 영국박물관에서 만난 앨리스 서브컬처, 그리고 이렇게 앨리스의 탄생지에 도달하니 그 감회가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비좁은 골목가게에서 액세서리 하나, 기념품 하나 바라보며 그렇게 여행을 되짚어 봅니다. 욕심 같아선 기념품들을 잔뜩 사고 싶지만 제 형편과 들고 갈 짐들을 생각하여 앨리스의 삽화가 그려진 플레잉 카드를 하나를 사기로 합니다.
앨리스 샵을 나서서는 크라이스트처치 내부를 구경해보기로 합니다. 크라이스트처치의 입구에서부터 늘어선 줄을 따라 조금씩 조금씩 걸어가 봅니다만 도무지 줄의 끝이 보이질 않습니다. 잠시 줄을 살펴보니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일본과 중국에서 온 학생들인 모양입니다. 학원도시라고 학생들이 수학여행으로 많이 왔구나 수긍하다가, 여기가 문득 영국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중고등학생이 수학여행으로 오기엔 만만치 않은 곳인데... 이런 생각에 잠기며 지루한 대기 시간을 달래 봅니다.
한 시간을 조금 넘겨 겨우 크라이스트처치 구경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왜 여기에 이렇게 관광객들이 몰려있는지 그 이유를 뒤늦게 깨닫습니다. 다름 아니라 여기가 바로 해리포터의 주요 촬영지였던 겁니다. 옥스퍼드 여러 장소들이 해리포터 촬영지로 쓰였는데, 크라이스트처치에는 해리포터의 그 유명한 식당 홀 촬영지가 있습니다. 실제 홀은 영화에서 보던 것에 비해서 작고 아담한데, 영화의 장면은 CG를 활용해서 크기를 늘린 거라고 합니다. 그래도 분류 모자가 기숙사를 나누어줄 것 같은 분위기가 제대로 살아있습니다. 특히 크라이스트처치에 재학 중인 학생들을 위한 식당으로 평범하게 사용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층을 오르내리는 계단, 복도, 퀴디치 경기 장면에 사용되었다는 정원의 모습에 해리포터 영화의 분위기가 그대로 묻어 있습니다. 투어 코스 중간중간마다 학생들 공간이라서 출입을 금지한다거나 시험기간이라서 정숙을 부탁한다는 표지가 보이는 데, 실제로 학생들이 공부하고 생활하는 공간을 구경한다는 느낌이 기묘하기만 합니다.
이런 분위기는 크라이스트처치뿐만이 아닙니다. 도시 곳곳에 있는 대학들에는 학생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각종 기숙사, 백팩을 메고 다니는 학생들, 학과의 슬로건이 담긴 현수막, 학생들의 공연을 알리는 전단지, 세미나 알림판까지. 학생들에게 할인해준다는 문구가 적힌 가게들도 종종 보입니다. 이렇게 넓은 도시가 학생들을 중심으로 생활권을 형성하고, 또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온다니 세계적으로 봐도 드문 곳일 겁니다. 관람객들이 많은 지역부터 학생들만 다니는 한가한 곳까지 옥스퍼드 온 동네를 쑤시고 돌아다니면서, 마치 학부생으로 돌아간 것 같은 한 때의 즐거운 감상에 젖어드는 아득한 옥스퍼드의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