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하루를 보내는 도시, 런던입니다
전날 휴식을 취하겠다는 선언이 무색하게도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느라 깊은 잠에 빠져들었나 봅니다. 제법 늦은 시간까지 아무런 방해도 없이 푹 잠에 듭니다. 눈을 뜨고 처음 본 풍경은 F워드의 양아치들이 가오를 잡는다고 저마다 이상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제가 할 일이나 하기로 합니다.
빠르게 정리하고 리셉션으로 내려가니 때마침 아침 식사가 끝나기 직전이었나 봅니다. 양아치들 덕에 골치를 꽤 썩이면서도 이 호스텔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훌륭한 아침 식사 때문입니다. 알맞게 구워지는 식빵과 곁들여 먹을 수 있는 다양한 잼, 야채와 과일, 커피까지, 단 4파운드에 이런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가방을 챙겨 향한 곳은 세인트 폴 대성당입니다. 소개에 따르면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성당이라는데 외관만 봐서는 성당이라기 보단 시청 건물에 가까워 보입니다. 대성당이라기엔 다소 소박한 모습이 영국 성공회 특유의 스타일이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세인트 폴 대성당은 지금까지 본 대성당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파격적인 소박함과 실용적인 용도가 돋보입니다. 돔의 천장화는 무려 흑백으로 그려져 있고, 건물 내부엔 무려 현대 미디어 예술작품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지하에는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인인 넬슨 제독의 석관이 안치된 모습은 성공회의 영국 국교로서의 지위를 가늠케 하는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 시간 가까이 돌아봐도 부족할 만큼 큰 대성당인 만큼 큰맘 먹고 돔까지 올라가 볼 생각이었으나, 대성당에 막 입장했을 때쯤 치명적인 실수를 깨달아 버립니다. 가방이 가볍다 싶더니 태블릿 PC를 호스텔 침대 위에 그대로 두고 나온 것을 깨닫습니다. 가뜩이나 양아치들 때문에 불안해서 짐들을 챙겨 다녔던 건데 여행에 가장 중요한 물품을 그대로 두고 온 걸 생각하니 온 몸에 소름이 끼칩니다. 기왕 온 성당이니 일단 서둘러 둘러보기는 합니다만, 초조함에 무엇을 보는지도 모르고 거의 뛰어다니다시피하며 한 바퀴 돌고 그대로 숙소로 달려갑니다.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도착한 숙소 침대에는, 다행히도 태블릿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합니다. 태블릿 PC를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동안 여행을 다니며 쓴 일지가 태블릿에 남아있기에, 만약 잃어버렸다면 정말 정신이 아찔해졌을 겁니다. 이번 여행에 살아있는 생생한 증거품이고 동반자이기에, 무사히 찾을 수 있음에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오후에는 런던의 카페에서 한적한 시간을 보내며 이 소중한 보물에 빠진 부분을 채우기로 합니다. 보통 그날의 일기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숙소에 앉아 하루를 돌아보며 작성하는데, 런던에서 매일매일을 정신없이 보내기도 했고, 무엇보다 호스텔이나 펍에 개인적으로 사용할 공간이 없어서 도무지 일기를 쓸 환경이 나오지 않아 며칠 째 일기에 손도 못 대던 참입니다.
적당히 작업할만한 카페를 찾다가 숙소 주변에 COSTA에 자리를 차지하고 작업을 시작합니다. 음료 한 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두들기는데, 한국의 카페에서 일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도 종종 카페에서 이렇게 일을 했기에 백수가 된 지 오랜만에 일을 하는 기분입니다. 한국의 카페와 다른 점은 폐점이 6시 반으로 빠른 편이고, 와이파이가 없다는 정도일까요? 다행히 COSTA의 솔티드 캐러멜 아이스 라테는 나쁘지 않습니다.
키보드를 두들기다 보니 어느새 폐점 시간이 다가옵니다. TESCO EXPRESS에서 간단하게 저녁거리를 사들고, 공원 벤치에 앉아 저녁을 먹습니다. 그리고 못다 한 일기를 계속 써 내려갑니다. 오래간만에 한적함 속에서 시간을 흘려보내는 런던의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