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고다 아야, 나무와 돌과 어떤 것, 이갑수를 읽고
내가 가진 특기 중 하나는 남들보다 냄새를 잘 맡는다는 것이다.
이 재능이 돋보였던 몇몇 일화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이것이다.
전통시장 청년상인 지원사업에 추가 모집으로 합격해 낡은 시장점포 자리 하나를 얻게 되었을 때였다. 1,2층 합쳐 8평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가게였다. 1층은 벽에 바른 페인트가 부풀어 올라 종이장처럼 너덜거렸고 2층엔 연탄가루 같이 시커먼 곰팡이 자국들이 잔뜩 덮여있었다. 우리가 추가합격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공간을 배정받은 사람이 계약을 중도 포기했기 때문이다.
처음 공간을 배정받은 날, 문을 열고 들어가니 퀴퀴한 냄새 너머 무언가 고소한 내음이 느껴졌다. 기름 냄새 같다고 남편에게 슬쩍 말했지만 곰팡이 냄새라며 단칼에 무시당했다. 잠시 뒤 사업단 단장님이 오셔서 하시는 말씀.
“여긴 원래 기름을 팔던 가게였어요.”
네이버 지도에 남아있던 그 가게 이름은 울산 기름집이었다. 뻘쭘해하는 남편을 보며 의기양양한 미소로 답했다. 갓 짜낸 참기름 냄새만큼이나 꼬수웠다.
우리는 울산 기름집에서 기름 대신 여행 기념품을 만들었다.
엽서를 만들고 자석도 만들었다. 꽤 자리를 잡아갈 무렵 냄새를 잘 맡는 재능을 살려 춘천에서 좋아하는 장소들을 닮은 향을 만들었다. 우리 가게가 있던 시장 골목길, 우든 카누를 탈 수 있는 호수 위 물레길, 그리고 청평사 가는 길.
절에서 피우는 향내음에 우디한 숲향이 어우러진 “청평사 숲길을 걷다”는 그때도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향이다. 아름다운 물길과 고요한 숲길이 이어진 청평사 가는 길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 가도 좋은 곳이지만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가는 이 시기야 말로 청평사를 가기 가장 좋은 때이다.
소양강댐 정상에 도착해 호수 쪽으로 내려가면 선착장이 보인다.
청평사로 가는 유람선을 탈 수 있는 곳이다. 유람선이라고는 하지만 한강의 그것을 떠올려선 안 된다. 이 배가 아직도 다니는 게 맞나 싶은 낡은 선박에는 폰트가 아닌 손글씨로 배의 이름이 쓰여있다. 작고 하얀 배에 빨간 줄 하나, 파란 줄 하나, 창문 아래 또다시 빨간 줄 하나 파란 줄 하나 자로 댄 듯 반듯하게 그어져 있다. 멋을 내어 꾸민 거라곤 그게 전부다.
배를 타고 한 10여분 호수 위를 달리면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선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른 하늘 아래 알록달록 가을로 물든 산이 나지막한 곡선으로 이어진다. 빠르게 달리는 배의 움직임에 따라 쉴 새 없이 일렁이는 물결들 그 위로 윤슬이 반짝인다. 아름답다 네 글자로는 도무지 다 담을 수 없는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는 그런 풍경을 보다 보면 어느새 호수 건너편에 닿아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숲길이 시작된다. 초록 이끼가 낀 돌계단을 건너 졸졸 흐르는 개울을 옆에 두고 숲내음을 들이마시며 천천히 한 걸음씩 걷는다. 고요하다. 물 흐르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붕 뜬 마음이 어느새 차분해진다.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나를 괴롭히는 온갖 생각들,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계속 내게 말을 거는 목소리들을 개울물과 함께 졸졸 흘려보낸다. 아주 조금은 가벼워진 것도 같다. 발걸음도 조금 더 가벼워졌다.
공주상과 구성 폭포를 지나 좀 더 걸으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돌다리 너머 야트막한 산아래 둘러싸인 청평사의 모습이 한 프레임에 들어온다. 여기에 지금 이 지어진지 천년도 넘는 절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하늘 위로 핵폭탄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전쟁이 나도 아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천년 뒤에도 여기 이 절이 남아있겠지?
고개를 들어 하늘 위를 바라보면 노랑과 빨강 그 어디 즈음에 있는 예쁜 단풍들이 바람결에 살랑인다. 바닥에 떨어진 잎사귀들을 살펴보다 그중 제일 예쁘게 물든 단풍잎 하나를 집어든다. 가방 속에 마침 책이 한 권 있어 그 사이에 조심스레 끼워 넣었다. 춘천의 가을을 간직하는 나만의 방법이다.
가끔 게스트하우스 손님들이 추천 일정을 물어볼 때면 녹음기를 튼 것처럼 청평사 얘기를 들려준다. 종종 우리가 만든 향의 시향을 하기도 한다. 가만히 향을 맡으면 어느새 고요한 청평사의 정취가 떠오른다.
올해는 아직 청평사에 한 번도 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