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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과 Jul 09. 2022

난 당신의 캐치프레이즈가 궁금하지 않다

이따금 젊은 강연자를 만난다.



이따금 젊은 강연자를 만난다. 이건 그 젊은 강연자들을 떠올리는 글이다. 나의 표본은 다섯 정도이다. 수가 많지 않으니 나의 시선이 단편적이라고 해도 좋다. 다만 지금부터 옮기는 나의 경험에 거짓은 없다. 

어떤 배움을 얻으려고 그들을 만난 건 아니었다. 그저 개인적인 약속을 잡았는데 그가 우연히 강연자였을 뿐이다. 그는 이따금 강연을 나간다고 말한다. 나는 ‘그렇군요’라고 한다. 우리의 대화 주제에서 그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더 대꾸할 필요가 없다. 난 만남의 목적에 따라 말한다. 사적인 만남이라면 요즘의 근황을, 공적인 만남이라면 그 조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논한다.


강연자는 청산유수로 말한다. 자신의 전문 분야에 관한 대화가 아니더라도 문장을 곧잘 이어간다. 이런저런 자리에서 말을 여러 번 해본 사람답다. 그들은 홀로 쉼 없이 말을 이어가다가도 맞은 편에 앉은 나에게 흥미를 보인다. 눈을 반짝이고 적극적으로 질문하며 나를 알아가려 한다. 아주 사적인 부분까지 파고드는 질문도 많아 당황하지만, 우선 전부 대답하려고 노력한다. 그의 태도가 싫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화 상대가 나에게 관심과 호기심을 보이는 건 퍽 즐거운 일이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그는 불과 30분이 지나지 않아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미소를 띠고 의자에 몸을 푹 눌러 기댄다. 이 자리가 편해졌나 보군. 나는 밥 혹은 커피를 한 입 삼키며 생각한다.


“이런 문제가 왜 발생한다고 생각해요?”


아차, 말려들었구나. 뒤늦게 난 그렇게 생각을 한다. 대화 초반에 그가 보인 적극적인 질문 공세에 홀랑 넘어가 질문의 의도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나의 대답들을 조합해 ‘대단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결과를 도출해낸다. 즉, 자신이 내게서 배워갈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나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우매한 이를 지식과 기회의 세계로 인도하겠다’라는 태도가 선명하다.


그는 몸을 일으켜 자세를 다시 바르게 고친다. 대뜸 자신의 분야로 대화 주제를 돌리며 이어가는 질문의 분위기가 이전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는 답을 정해둔 질문을 던져두고 나를 시험이라도 하듯 은은하게 웃는다. 나를 파악하기 무섭게 나를 그의 ‘학생’으로 강등시킨 것이다. 불편함이 스멀스멀 자라난다. 강연 현장에서와 다를 바가 없는 그의 태도에 나는 대답을 망설인다. 이곳은 그의 강연장이 아니고, 나는 그의 학생이 아님을 상기한다.  



그는 내가 하는 일의 값어치를 묻기도 한다. 투입 자원 대비 산출물. 경영대학 수업 시간에 수없이 들었던 그 말을 모양만 바꾸어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그건 영 시간이 아까운 것 같아요. 차라리 이런 사람들을 만나보거나 이런 플랫폼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보는 건 어때요.’ 정말 안타깝다는 듯이 나에게 조언한다.


그의 안타까운 심정은 이따금 진심 어린 걱정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껍질뿐인 자기 과시이다. 그는 묻지도 않은 바를 줄줄이 늘여놓는다. 그가 어떻게 도전했는지, 누굴 만나 어떤 기회를 쟁취했는지, 어떤 단계를 거쳐 지금의 성과를 이루었는지, 그리고 지금은 뭘 하고 있으며 자신의 삶이 얼마나 흥미롭고 여유로운지. 나를 걱정하는 말에 그 모든 자랑을 잘 버무린다. 가히 대단한 솜씨다.


앞서 그랬듯이 ‘그랬군요’하고 넘기고 싶지만, 이즈음부터 기분이 상한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동등한 대화 상대로 만난 이가 나를 가르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같은 시간에 그는 큰 기회를 얻어 사회적으로 ‘성공’이라 지칭할만한 성과를 이루었고, 나는 보잘것없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더 대단한 일로 손을 뻗어보는 게 어떻겠냐는 조언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부분이 있다. 그는 그 모든 질문 가운데 그런 ‘보잘것없는’ 삶을 사는 나의 감정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각 젊은 강연자들을 만나던 여러 시기에 나는 제법 즐거운 상태였다. 당장 대단한 숫자로 드러나는 결과는 없어도 소소하게 사람을 만나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노래를 부르는 행위가 좋았다. 아주 일반적인 삶을 살며 큰 꿈을 꾸는 삶이 행복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대화를 이어갈수록 나의 행복에 대한 확신을 잃는다. 나의 현재는 최선인가. 너무 많은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정말 이 모든 시간이 쓸모없이 허비되고 있는 걸까. 삶의 행복은 불안이 되고, 앞에 앉은 이의 성공과 나의 그것을 비교한다. 동등함은 개뿔, 나는 확신이라는 방어막을 잃고 그의 가르침이라는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속으로 한껏 풀이 죽는다. 그가 대화의 키를 잡은 순간 이미 대화 주제는 만남의 목적을 벗어났다. 만남의 자리는 그의 강연을 위한 독무대가 된다. 그는 강연에서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한 말을 내 앞에서 한 차례 더 반복한다. 나는 ‘그렇군요’라고 말하며 힘없는 손뼉을 친다.


반쯤 죽은 눈을 하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힘을 빼고 듣다 보니 그가 거듭 반복 강조하는 한 문장이 귀에 꽂힌다.


모든 강연자는 일명 ‘캐치프레이즈’를 만든다. ‘캐치프레이즈’는 강연에서 청중에게 강조할 단 하나의 문장이다. 강연자는 정성스레 만든 그 문장을 모든 강연에서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반복할수록 자신을 향한 확신은 커져만 간다. 청중을 설득하려던 그는 결국 자신을 설득하게 된다. 자신이 만든 문장을 ‘진리’로 여기고 모든 삶의 행태를 그 문장에 끼워 맞춘다. 그의 태도가 딱 그런 식이었다. 나를 가르치려다가 자신에게 세뇌를 반복하는 우스운 모습이었다.


젊은 강연자의 시선에서 나의 삶은 아마 그 ‘캐치프레이즈’에 걸맞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나의 테두리를 재단하여 그 틀에 맞춰 넣으려고 안달이었던 거다.


그와 대화를 마친 나는 묘한 기분으로 건물을 나선다. 시원한 바람에 머리가 식는다. 전부 우습다. 그 짧은 시간에 나를 감히 파악하고 평가한 그도, 나를 멋진 사람으로 한껏 포장하려던 나 자신도 우습다. 큰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다 보면 뻔한 깨달음이 찾아온다. 그들의 지름길을 동경할 필요도, 작아질 필요도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젊은 강연자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젊은 나이의 성공은 그때까지 성공하지 못한 이를 가르칠 수 있다는 허가증이 아니다. 성공에 심취해 남을 가르치는 오만한 태도를 버리라고 말하고 싶다. 두어 시간 내내 나를 가르치던 그에게 하고 싶은 유일한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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