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 러브 앤 썬더>
히어로 영화는 아이들을 위한 장르이다. 우리는 그 당연한 사실을 한동안 잊고 지냈다. 첫 아이언맨 영화가 개봉했던 2008년으로부터 벌써 15년이 흘렀다. 그 무렵 청소년기를 보내던 관객은 이제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의 나이가 되었다. 그들이 즐기던 히어로 영화는 아동이나 청소년이 즐길만한 수준이었다. 그리 잔혹하지도, 서사가 복잡하지도 않았다.
마블 시리즈가 쌓여갈수록 세계관은 복잡해져만 갔다. 서사의 복잡성은 각 인물의 깊이를 더하는 재미 요소이지만, 어떤 관객들에게는 큰 장벽이 된다. 특히 아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짙은 감정선이 이어지며 오직 마니아층의 어른들만을 위한 시리즈가 되어가고 있는 듯했다.
지난 5월 개봉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가 그 정점이었다. 소중한 이들을 차례로 모두 잃은 완다는 자신의 능력으로 얻어낸 아이들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잔인한 살인을 서슴지 않고, 닥터 스트레인지 역시 그를 막기 위해 괴이한 모습으로 변한다. 특이한 취향을 가진 20대 중반의 관객으로서는 너무도 만족스러운 영화였지만, 영화가 끝난 후에는 연령 제한이 궁금해졌다. 아이들이 보기에는 그만큼 과하게 잔인하고 진지한 작품이었다.
<토르: 러브앤썬더>를 기획하던 제작진 역시 이런 장벽을 인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새 토르 시리즈는 닥터 스트레인지 시리즈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달랐다. 오랜만에 본 토르는 수년 전처럼 밝고 호탕한 모습이었다. 토르, 제인, 발키리, 그리고 코르그까지 이미 단단한 감정적 유대를 가진 팀원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는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팝콘을 먹으며 볼만 했다.
*하단 내용부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분위기의 전환과 더불어 감동받은 부분은 따로 있었다. '신 도살자' 고르는 뉴 아스가르드의 아이들을 인질 삼아 토르를 유인한다. 토르와 고르가 마주한 마지막 장면에서 토르는 아이들에게 무기를 하나씩 챙겨오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당연히 '우리는 싸울 줄 몰라요' 혹은 '우리는 힘이 약해요'라고 외친다. 토르는 그들을 격려하며 그들이 챙겨온 무기에 자신의 힘을 조금씩 나누어준다. 아이들은 눈에서 황금색 섬광을 내뿜고 마음껏 날아다니며 어둠의 괴물들에 맞선다.
이 장면에서 내가 있던 극장의 누군가는 코웃음을 쳤다. 그만큼 유치하고 황당하다고 여겨질 만한 장면이었지만, 그 장면은 어른 관객을 위한 게 아니다. 관객은 자신과 가장 비슷한 캐릭터에 몰입한다. 우리 주변의 아이들은 분명 전투를 치르는 뉴 아스가르드의 아이들에게 이입했을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들떴을지를 생각하면 절로 미소가 난다. 아이들은 자신을 작고 연약하다고 여기기보다는 용기 내어 더 큰 꿈을 꿀 필요가 있다. 마블은 영화를 통해 그 꿈을 적극적으로 응원했다.
어릴 적 경험한 콘텐츠가 삶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거다. 열 살 무렵에 자신이 가장 많이 본 영화 혹은 드라마, 책을 떠올리고 그걸 현재 자신의 삶을 비교해보자. 그 시절 꾸던 꿈과 비슷한 면이 무엇이든 있을 테다. 어릴 적의 꿈은 단순히 직업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상에도 영향을 미친다. 종일 유튜브를 보며 혐오 표현을 배운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그런 말을 뱉고 성인이 되어서도 남을 해친다. 학교와 집에서 아무리 거듭 교육해도 그 습관을 고치기는 어렵다. 아이들의 일과에서 매체와 함께 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길기 때문이다. 매체는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간접 교육하는 수단이 된다. 그 내용과 질이 중요한 이유이다.
마블은 이 작품으로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편견에 맞섰다. 우선 제인이 '마이티 토르'가 되어 새로운 여성 히어로 캐릭터로 등장한다. <토르: 다크 월드>에서는 두려운 얼굴로 토르의 품에 안겨있던 그가 이번 작품의 포스터에서는 무장한 채 올곧은 눈빛으로 관객을 바라본다. 뉴 아스가르드의 왕 발키리는 거의 무너져내리던 나라를 훌륭한 관광지로 바꾸어 시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신의 최고 권력자인 제우스의 번개를 들고 전장을 누비기도 한다.
성애적 측면에서도 꾸준히 새로운 메시지를 던졌다. 토르의 친구 코르그는 자신의 종족이 번식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그의 종족에는 오로지 '아빠'만이 존재한다. 종족 특성상 자손을 만드는 과정으로 손을 잡고 뜨거운 용암에 들어간다는 표현으로 분위기를 중화하며 관객에게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심어준다. 발키리 역시 동성을 사랑한다. 자매들을 잃은 전투에서 사랑하던 이를 잃었던 그의 과거는 이번 영화에서 고르의 입으로 다시 전해진다. 고르는 '너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보지 않았냐'며 딸을 잃은 자신의 마음을 발키리의 상실감과 같은 무게로 여긴다.
누군가는 눈을 찌푸리며 마블의 '지나친 PC함'을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비난을 하지 않는 다음 세대를 만들고자 했다. 여성과 아이를 무력하게 만드는 영화는 이미 지나치게 많고, 이성애를 노래하는 영화 역시 수두룩하다. 히어로가 어떤 모습이든 또 누굴 사랑하든 전혀 상관없는 세상에서 아이들은 더 자유로이 꿈꿀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의 부제가 '러브 앤 썬더'인 이유가 밝혀진다. 바로 토르에게 새로운 '러브'가 생기기 때문이다. ‘러브’는 몸집이 토르의 절반도 안 되게 작고, 고집불통이다. 토르는 그런 그와 함께 살아간다. 기꺼이 그에게 큰 무기를 내어주고, 자신은 작은 망치를 들고 전장에 나서기도 한다.
망치를 나누어 들고 나서는 그 장면에서 마블이 영화 내내 말하려던 바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시소의 균형을 맞추려면 작은 사람이 큰 무기를, 큰 사람이 작은 무기를 들면 된다는 것. 그리고 이를 당연하게 여기려면 사랑의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 그런 정직함을 추구하는 주류 영화의 복귀가 감사해지는 작품이었다.
마블의 향후 행보도 이와 같다면, 이 시리즈를 보고 자라는 아이들은 부디 미움보다는 사랑의 가치를 크게 여기길. 그리고 자신의 안락만을 위해 사랑을 행하지는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