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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과 Aug 21. 2022

이미지를 문자로 설명하는 일

한성필 <표면의 이면>, 임준영 <그 너머에, 늘> - 금호미술관



나는 미술과 낯을 가린다. 예술 전반에 지대한 관심이 있음에도 이상하게 미술 분야는 생소하게 느껴진다. 나와 미술 사이의 어색함은 학창 시절에 만들어졌다. 미술 학원을 꽤 오래 다니면서도 내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학교 미술 수업에서도 간신히 괜찮은 점수를 받는 수준이었다.


미술 시간 대부분은 그림 감상보다는 그림 그리기에 편중되어 있었다. 붓을 움직이는 데에 재능이 없었던 나는 미술에 점차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스스로 시각적 능력이 없다고 여기며 자랐지만, 다 자라고 보니 난 제법 ‘보는 눈’이 있는 편이었다. 색채와 구도에 민감해서 사진을 곧잘 찍고 옷도 나쁘지 않게 입는다. 그러니까 미술과 나 사이에 장벽을 만든 건 순전히 미술 수업이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만 미술을 잘 경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모두 나름의 능력을 활용해 미술과 가까워질 수 있다. 나에게는 사진을 찍는 능력이나 글을 잘 쓰는 능력이 있다. 이런 능력들이 미술 작품과 소통하는 매개가 될 수 있다는 걸 늦게 알았다.


금호미술관의 <표면의 이면> 그리고 <그 너머에, 늘> 전시에는 각각 한 장의 팜플렛이 제공된다. A4 용지 한 장에는 작품 해설이 한국어와 영어로 빼곡하게 적혀있다. 그러나 글씨를 아무리 가득 적어도 사진 수십 개의 설명을 전부 담기란 불가능하다. 해설을 적은 큐레이터는 모든 단어를 아주 신중하게 선택했다. 작품을 최소한의 단어로 가장 풍성하게 설명하기 위해.


아래는 팜플렛에 담긴 전시 해설의 일부이다.



임준영 초대전 <그 너머에, 늘>


도시 풍경과 현대 건축물을 주 작업 소재로 삼는 그는 이번 전시에서 도시 속 사람의 모습에 집중한다. <Like Water> 연작은 거대 도시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한 작가의 사유로서 도시인의 활동력을 역동적인 물줄기로 표현하였다. <Museum Project> 연작은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서 정교하게 분류되고 연출된 자연 생태계와 동식물 표본, 그리고 이를 감상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촬영한 작업으로, 사진 속 사람들이 유리창 너머 대상화된 자연을 바라보는 주체에서 관람객에 의해 감상의 대상으로 전이되는 묘한 상황을 만든다.


1F Like Water


뉴욕에 거주하던 작가는 어느 날 퇴근 시간에 사람들이 일제히 거리로 나오는 모습이 마치 파이프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이 대기와 부딪히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중략) 이 작업은 거대 도시를 끊임없이 작동하도록 하는 인간의 활동력과 생명력을 역동적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기하학적인 건물과 유기체적인 물과의 조화를 강조하여 도시와 인간이 함께 호흡하는 현대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B1 Museum Project


작가는 유리창 너머 대상화된 연극적 자연을 응시하는 사람들을 또 다시 화면 안에 담아 이들을 또 다른 응시와 감상의 대상으로 만든다. 실제 자연의 모습보다 더욱 “실제처럼” 만들어진 표본이지만, 얼룩진 유리창으로 인해 눈이 뿌옇게 흐려진 사슴의 표본과 지나치게 정돈된 어색한 풍경들을 눈앞의 장면이 픽션임을 위트있게 일깨운다.



한성필 초대전 <표면의 이면>


2F Façade


건물 외벽을 일컫는 ‘파사드’는 유럽에서 역사적인 건축물이나 문화재 복원을 위한 공사현장의 차단막을 가리키기도 한다. 낮과 밤, 현실과 판타지, 사진과 회화 등 상반되는 두 요소가 한 화면에 혼재해 나타나면서 개념과 개념 사이의 경계를 묘하게 흐리고,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하도록 한다.


3F Ground Cloud


목가적인 대지의 모습과 발전소에서 내뿜는 수증기가 만들어 낸 생경한 풍경은 대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환경 문제에 대한 고찰을 동시에 이끌어낸다. 작가는 에너지 개발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나 찬반 논쟁을 벗어나 대립되는 것들의 낯선 공존을 차분히 드러내면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문명과 자연의 상태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3F Polar Heir


작가는 대자연의 숭고함과 그 이면에 존재하는 환경 문제의 현실을 한 장면에 포착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심을 느끼는 한편 인류가 지구 환경에 미친 영향을 사유하도록 한다.



한 장의 팜플렛에 적힌 단어들은 작품과 나를 자연스레 매개했다. 이 단어들이 작가의 사진 세계를 처음 마주하는 이가 지닐 수 있는 최고의 설명서라고 생각했다. 큐레이터의 해설은 이렇게 작품과 관객을 연결한다. 신중하게 적힌 단어들이 관객의 감상을 기꺼이 부추겨 그들이 작품과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미술관에 전시된 예술은 비단 작품만이 아니다. 모두의 손에 쥐어지는 글씨 속에도 어떤 예술이 담겨있다. 이 팜플렛에는 작품을 바라보는 통찰력과 작품의 작가와 소통하는 능력, 문장을 유려하게 적어내는 신중함까지 담겨있었다.


이제껏 미술과 가까워지는 길은 직접적인 창작이 유일하다고 생각했다. 금호미술관의 두 전시에서 작품과 해설을 번갈아 경험하며 다른 길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거나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더라도 예술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예술을 가르치는 시간에는 더 풍성한 ‘감상’이 필요하다. 예술에는 훌륭한 해설자도 필요하다는 걸 이르게 알았더라면, 오늘 난 이 팜플렛에 들어갈 문장을 고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해당 전시는 금호미술관에서 10월까지 진행된다.


2022.08.05. ~ 10.23.

금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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