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과 Mar 28. 2023

땅을 황폐화한 인간은 바다로 눈을 돌린다

나탈리 카르푸셴코 사진전 x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1)


육지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땅을 황폐화한 인간은 바다로 눈을 돌린다. 지금 눈이 마주친 우리도 다음 세대를 위해 사랑하지 않는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인간을 비롯한 육지 동물에게 남은 건 멸종 뿐이다.


인간은 바다의 생명력을 확신한다. 무차별적인 포획과 오염으로 바다의 영속성도 흔들리고 있지만, 여전히 육지의 수명보다는 길 테다. 그래서 인간은 아직 개척하지 않은 그 미지의 공간에서 해답을 찾고자 한다. 

무엇을 살리고자 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저 바다가 소생의 답을 가지고 있길 기도하는 것이다.



그 바람은 예술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탈리 카르푸셴코 사진전>은 메인에 고래 사진을 내건다. 'Ocean Breath'이라는 제목의 첫 번째 관에는 짙고 파란 바다를 유영하는 고래 사진이 가득하다.


그 곁에는 인간이 있다. 고래와 수영하는 이들은 아무 것도 걸치고 있지 않다. 그래서인지 매우 작고 갸냘프게 보이기도 한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지, 사진을 감상하며 생각한다.


고래는 단연 바다의 신비로움을 대표한다. 인간은 바다를 상상할 때 고래를 쉽게 떠올리고 자주 경외한다. 고래는 지능이 높은 포유류이며, 폐호흡을 위해 때때로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한다. 엄연한 해양 생물이지만, 육지 생명들과 맞닿은 고래의 특징들은 그 존재를 신비하게 만든다. 


사진에는 두 팔을 벌린 인간이 있다. 그 인간은 고래의 곁에서 그의 꼬리 모양을 따라하는 듯하다. 공존을 위해 바다에서 만난 존재를 모방하는 행위. 나탈리는 바다와 인간의 공존을 그렇게 표현했다.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에서도 인간은 바다를 욕망한다. 와칸다에서 비브라늄을 빼앗기를 실패한 국가들은 바다에서 그것을 감지하고 공격의 방향을 바꾼다. 비브라늄을 주요 동력으로 비밀스레 살아가던 바닷속 종족 탈로칸은 매우 방어적이다. 탈로칸은 침탈을 당한 경험이 있는 소수 민족으로, 존재가 드러나면 역사가 반복될 것임을 예견하기 때문이다.


가능성을 본 인간은 욕심을 낸다. 공존을 요구하며 손을 내밀지만, 거부를 대답으로 받을 생각은 없다. 공존을 빙자한 침략은 대개 폭력적인 탈취로 이어진다. 탈로칸의 선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화에서 마블은 탈로칸에게 바다라는 공간을 부여해 이 소수 민족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바다와 소수 민족을 동일시하여 그들이 개척의 대상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강화한다. 발전을 내세우며 지배를 정당화하는 서구권 문화를 향한 저항이기도 하다.



<나탈리 카르푸셴코 사진전>와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가 고래를 표현하는 방식은 유사하다. 탈로칸은 바다 내 이동수단으로 고래를 이용하지만, 그들을 도구로만 여기지 않는다. 고삐 등의 인위적 장치 없이 고래와 하나의 무리처럼 헤엄치며 전투에 임한다.


소수 민족이 서구권 국가들의 지배 대상이 아닌 것처럼, 고래를 비롯한 바다 생물들 역시 인간의 지배 대상이 아니다. 두 작품은 인간과 고래, 바다를 우위 없는 피사체로 그려냄으로써 공존의 의미를 보여준 것이다.


인간은 머문 자리를 쉽게 망가뜨리고 다음 개척지를 모색한다. 비밀이 많을수록 더 큰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기에 바다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바다는 끝까지 비밀스러워야 한다.


나탈리의 사진 속 인간들은 무방비 상태를 각오하고 바다를 만났다. 마블 세계관의 국가들은 탈로칸과 와칸다의 힘을 보고서야 꼬리를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바다를 개척할 것이다. 다만 무엇을 쥔 손을 내밀 것인지는 이제 우리의 선택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