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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과 Jan 22. 2024

나그네의 삶이 흐르듯 흘러가길

뮤지컬 <겨울나그네> 관람평

작품의 제목은 극의 마무리와 함께 완성된다.


민우는 겨울을 나는 나그네처럼 시린 삶의 끝을 바라보며 비틀거리다 결국 봄을 되찾지 못하고 스러진다. 다혜는 민우가 언뜻 겪은 봄처럼 겨울 밖에서 그를 기다릴 뿐이다. 두 계절이 만나는 시간은 짧고, 닿을 듯 달콤하지만 하나가 될 수는 없다. 작품 내내 이어지는 찰나의 만남들 탓에 두 사람의 애틋한 마음은 배가 된다.



<겨울나그네>는 故최인호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시대의 정서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문학을 써온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 최고의 대중소설 작가로 꼽힌다. 작가의 10주기를 맞아 극장으로 돌아온 <겨울나그네>는 당시의 대중 정서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작가를 비롯한 1970년대 청년들이 누비던 도시의 거리는 급격한 산업화의 여파로 유독 번쩍였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즐비한 거리의 풍경은 청년들을 흥분하게 만들기 충분했지만, 이 새로운 생동감은 억압과 통제의 사회 분위기와 혼재되어 청년들의 혼란을 야기했다. 


빠른 성장의 역풍은 도시의 뒷거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음지로 흘러들어온 신자본을 맛본 이들은 이후로도 비윤리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이득을 취한다. 정부의 손이 닿지 않은 그곳에서, 청년이 자란다. 


미군을 주고객으로 한 술집이 민우의 종착지로 선정된 이유이다. 대학가의 열정이 절정이던 시기, 민우는 그 뜨거운 양지에서 쫓겨나 차가운 음지로 향한다. 자발적인 걸음이었으나 개인의 모든 움직임은 사회의 영향임을 무시할 수 없다. 


빠르게 쌓인 만큼 우후죽순 빠르게 몰락하는 회사들, 이를 방지하지 못한 사회 시스템 탓에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들이 있다. 낭떠러지를 뒤에 둔 이들은 가장 어두운 선택지를 더 쉽게 발견하기도 한다.



민우는 의과대학 본과 2학년에 재학하던 밝고 맑은 청년이었다. 어머니의 얼굴은 몰랐지만, 아버지의 부족함 없는 사랑 속에서 애교스러운 아들로 자라왔다. 어느날 돌연 찾아온 형은 어머니의 출신을 밝히며 민우를 혼란스럽게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경찰에 쫓기게 된 민우는 자신의 상황에 절망하며 어머니의 삶이 있던 곳으로 흘러간다. 유독 핏줄을 강조하며 특히 여성의 정조에 집착하는 한국 사회의 정서는 문학에 그대로 녹아든다. 당대의 여타 작품처럼 <겨울나그네> 역시 '술집 여자'라는 대명사에 매달린다. 부정한 시스템보다는 어리석은 개인을 손가락질하는 썩은 사회의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2020년대를 살아가는 청년으로서 작품 속 청년들의 삶을 무력하게 관망한다. 작품 속 그들에게 별달리 어떤 선택지가 있을까. 그들은 무력한 상황에 운명을 탓하면서도 되레 영원한 낭만을 노래한다.



<겨울나그네>는 이문세와 임재범, 인순이, 김광석, 신승훈, 성시경, 엄정화 등 가수들의 명곡을 만든 김형석 작곡가와 'I believe(신승훈)', '내게 오는 길, 희재(성시경)' 등으로 대중의 마음을 녹인 양재선 작사가의 음악과 함께 한다. 작품 속 시대 배경과 넘버의 제작 시기, 작품 밖 관객의 시간까지 훌쩍 떨어진 세 개의 시간은 강한 매개인 음악으로 연결된다. 


인성 배우가 전개한 민우는 순진무구한 대학생 시절과 혼란한 심리적 파괴 장면을 통해 관객에 성큼 다가온다. 다분히 뮤지컬적인 연출 속에서 배우는 흔들리지 않고 내면의 파괴성을 연기한다. 안정적인 가창과 전달력으로 캐릭터의 설득력을 더하는 건 물론이다. 


앙상블의 든든한 발성도 돋보인다. 한전아트센터의 음향과 만나 더욱 시너지 효과를 내며 유독 귀에 감기는 앙상블이었다는 감상이다.



성실한 국내 콘텐츠의 소비자라면 다음 장면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전개가 익숙하다. 이러한 전개 방식은 누군가의 향수가 될 테다. 활기찬 대학가의 풍경은 당대를 살지 않은 이의 마음까지 설레게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같은 맥락에서 전개의 새로움을 선호하는 이들의 실망을 예측할 수 있기도 하다. 이런 양면성을 가진 <겨울나그네>가 앞으로 극장에서 어떻게 명을 이어갈지는 앞으로 주목해볼만한 지점이다. 


더이상 '젊은 날의 순수'로 독자를 이끌던 당대 작품들의 설득 방식이 현 시대의 청년들에게 유효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제한된 시간에 한 인물의 삶과 죽음을 쫓는 전개가 유독 숨가쁘게 느껴진다. 순수를 필두로 한 인물의 행동은 이따금 관객을 당혹스럽게 하고, 인물 간의 관계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 작품의 완전한 경험을 위해 뮤지컬 관람 전후에 원작 소설도 감상하길 제안하고 싶다.


쓸쓸한 겨울이 가려면 아직 한참이다. 이 계절을 맞아 1970년대와 1980년대 특유의 시대 감성을 느껴보고자 한다면 <겨울나그네>를 권한다. 겨울의 냉기에도 지지 않는 배우들의 열정은 올해 2월까지 우리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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