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사운드 ‘잔나비’와 사랑하는 우리 엄마
난 의외로 학창시절부터 덕질을 쉰 적이 없는 성실한 케이팝 팬이다. 그때는 아이돌 얘기를 빼면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시간이 흘러 그 외에도 여러 관심사가 생겼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굳이 좋아하는 가수 얘기를 먼저 꺼내지 않게 되었다.
밖에서는 아이돌에 큰 관심이 없는 척 해도 집에서만큼은 마음이 가는 대로 군다. 핸드폰을 보다가 문득 흐뭇한 미소를 짓고, 뜬금없이 입을 틀어막는다. 그럴 때마다 동생은 이유를 짐작하고 웃는다. 또 세븐틴 봐? 난 어깨만 한 번 으쓱거리고, 엄마는 놀랍지도 않다는 반응을 보인다.
대략 10년 전부터 연말마다 거실 텔레비전은 내 차지였다. 가요대전부터 가요대제전, 가요대축제까지 놓치지 않기 위해 리모컨을 꼭 쥐고 있었다. 엄마는 그런 딸의 연례행사를 늘 웃으며 구경해주었다.
언젠가 혼자 유난을 떠는 것 같아 민망한 기분에 엄마는 좋아하는 가수가 없었냐고 물어보았다. 엄마는 곰곰이 생각한 후 산울림과 이문세의 노래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너처럼 좋아한 건 아니었어. 농담처럼 덧붙이면서 말이다.
딸과 달리 뜨뜻미지근한 덕질만 하던 엄마가 올해 부쩍 한 그룹의 노래를 즐겨들었다. 바로 그룹사운드 ‘잔나비’의 노래들이다. 엄마는 집에서도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종일 잔나비 노래를 들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응원의 의미도 있지만, 그에 앞서 사랑을 주는 당사자를 행복하게 만든다. 내가 꾸준히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던 이유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어쩌면 처음으로 엄마도 그런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듯해 흐뭇했다.
잔나비의 멤버들은 모두 92년생이다. 그런데 그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잔나비의 음악에는 기묘한 옛 감성이 있다. 그에 어울리게 부드러우면서도 조금 촌스러운 최정훈의 보컬은 듣는 이에게 특별한 위로를 건넨다.
내가 잔나비를 잘 모르던 때 학교 축제에 잔나비가 왔었다. 숱한 학교 축제와 페스티벌 경험이 있는 밴드답게 여유롭게 참여를 유도했다. 그들의 음악을 거의 처음 듣는데도 지루하지 않게 공연을 즐겼다.
“잔나비 콘서트 가고 싶다.”
내가 주어만 바꾸어 말하며 항상 입에 달고 살던 말을 엄마가 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시기가 좋지 못했다. 큰 공연을 마치고 멤버 대부분이 군대에 있었으며, 시국 문제로 오프라인 공연이 어려웠다. 늦게나마 잔나비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하고 알람을 켜두었다.
자잘하게 아쉬운 활동들이 이어지던 시기, 잔나비가 CGV에서 ‘판타스틱 올드패션드 리턴즈! x 넌센스 ll’ 콘서트를 상영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난 곧장 무대 인사까지 진행하는 회차를 두 자리 예매했다.
생각해보니 엄마와 영화 외의 문화생활을 즐기는 게 오랜만이었다. (이것도 일종의 영화였지만, 어쨌든 음악 공연이라고 치자.) 우리는 기대되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매 날을 기다렸다. 아침부터 맑은 하늘을 구경하며 영화관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내 잔나비의 노래를 틀어두고 예습을 하듯 노래를 따라불렀다. 몇 번이나 박자를 틀려서 한참 웃기도 했다.
무대 인사에서 최정훈 노래를 처음 들은 엄마는 역시 좋다며 기뻐했다.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영화를 봤다. 노래가 끝날 때마다 각자 작은 박수를 치느라 금방 손을 놓긴 했지만, 옆자리에 앉아 같이 공연을 즐긴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했다.
공연은 정말 재미있었다. 엄마는 나보다 훨씬 즐거운 시간을 보낸 듯했다. 우리는 오는 길에도 목소리를 높여 잔나비 노래를 불렀다.
잔나비 박사가 된 우리 엄마가 이 글을 위해 지금의 추운 계절에 듣기 좋은 노래 세 곡을 추천해주었다.
01 누구나 겨울이 오면 (with. 이기림) [See Your Eyes]
누구나 겨울이 오면
가슴 한 켠에 숨어 있던
따스한 기억을 품고
얼어붙은 맘을 녹이곤 하죠
겨울이 오면
나에게 지난 겨울은
봄이 오기만을 기다린 시간
이젠 그 누구나처럼 얼어붙은 맘을 녹일 수 있게
2014년 12월 발매한 ‘See Your Eyes’ 앨범의 수록곡이다. 시간이 오래 지난 만큼, 지금과는 조금 다른 최정훈의 보컬이 귀에 꽂힌다. 다소 거칠고, 깎이지 않는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그가 음악으로 전하는 위로의 메시지는 매끄러움과 상관없이 투박하게 잘 전해진다.
잔나비의 커리어에서 여성 보컬과의 듀엣은 잦은 일이 아니다. 그 사실이 의아스러울 정도로 두 사람의 보컬 조합은 듣기 편안하다. 억지스럽게 높지 않고, 포근한 결의 두 목소리가 잘 어울린다.
나에게 겨울은 미리 품어둔 따스한 기억이 반드시 필요한 계절이다. 남은 두 달의 겨울도 누구에게나 겨울이 온다는 메시지와 함께 잘 견뎌내보아야겠다.
02 Wish [MONKEY HOTEL]
샛노란 광선을 쏘면은
음 내 생각엔
까맣게 덮인 저 먹구름
보기 좋게 걷힐 거에요
make a wish!
2016년 8월 발매한 ‘MONKEY HOTEL’ 앨범의 수록곡이다. 많지 않은 가사가 반복되는 멜로디에 담겨있다. 그러나 지루한 곡은 아니다. 차츰 볼륨을 더해가는 악기들의 합주에 집중을 하며 들으면 좋다.
단번에 이해하기에는 가사가 다소 아리송하다. 샛노란 광선과 까맣게 덮인 먹구름, 그리고 파란 하늘과 흰 구름, 마지막으로 보랏빛까지 풍부한 색채가 사용된다. 노래와 가사에 온전히 집중하면 여러 빛깔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색이 피어오르고, 또 어떤 색은 아스라진다. 그 이미지에서 이 노래의 의미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03 꿈과 책과 힘과 벽 [전설]
텅 빈 마음 노랠 불러봤자
누군가에겐 소음일 테니
(중략)
우리는 우리는
어째서 어른이 된 걸까
하루하루가
참 무거운 짐이야
더는 못 갈 거야
꿈과 책과 힘과 벽 사이를
눈치 보기에 바쁜 나날들
(중략)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하루는 더 어른이 될 테니
무덤덤한 그 눈빛을 기억해
어릴 적 본 그들의 눈을
우린 조금씩 닮아야 할 거야
엄마와 내가 함께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2019년 3월에 발매한 앨범 ‘전설’의 수록곡이다. 타이틀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가 크게 주목을 받고 흥행했던 그 앨범이다. 잔나비가 전하는 연인 간의 사랑 이야기는 많은 이의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잔나비가 청춘에게 건네는 씁쓸하고 담담한 이야기는 더욱 독보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노래를 더욱 추천한다.
꿈과 책과 힘과 벽. 한 글자 단어들 가운데 가장 메시지가 강한 단어들만 꼽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목부터 눈을 사로잡는 이 곡의 모든 가사는 조금 커버린 소년이 어깨가 축 처진 채로 뱉어내는 말 같다.
마지막으로 드럼 비트가 나오고 어린 목소리의 합창이 이어지며 곡이 끝난다. 어른이 된 최정훈이 노래를 부르지만, 이런 엔딩에서 마음 어딘가에 남아있는 작고 어린아이가 느껴졌다.
가끔, 아주 문득 부모님의 심정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더 큰 삶의 무게가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선에서는 충격적일 만큼 묵직한 현실과 감정이 밀려올 때 내 앞길이 두려워지는 동시에 당장 그들을 안아주고 싶은 충동도 차오른다.
이 곡은 그런 마음과 꼭 닮았다.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크게만 보이던 꿈은 그저 작아지고, 책을 밟아가며, 애를 써서 벽을 부숴나간다. 그렇게 내가 보고 자란 무덤덤한 그 눈빛을 닮아간다.
쉽지만은 않았던 시간을 지나, 엄마와 나는 같은 반짝이는 눈빛을 가지고 함께 잔나비의 음악을 즐기고 있다. 텅 빈 마음 노랠 불러봤자 누군가에게는 소음이겠지만, 엄마와 나는 지금처럼 서로의 노랫소리가 되며 오래 꿈을 나누며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