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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할미 Apr 29. 2022

갱년기라는 이름의 질풍노도 전환기

띠 동갑으로 열두 살 아래 50대 여성의 전화를 받았다. 3년 전 유방암 친구의 병문안을 갔을 때 바로 옆 베드에서 항암제를 맞던 환자. 몸집이 커서 항암제를 더 잘 견뎌내고 있다고, 빼빼 마른 내 친구는 그녀를 부러워했다. 동병상련으로 의기투합한 그녀들, 퇴원 후에도 왕래하는 사이가 됐다. 덩달아 나까지 점심 수다판에 서너 번 합류했었다.


 “힘든 병에 겁먹고 갱년기가 도망갔다고 좋아했었거든요. 직장으로 복귀한 뒤 한동안 잠잠하던 우울증이 다시 돌아왔어요. 행여 암이 재발할까 스트레스 때문에 생긴 조울증인 거 같은데 요즘 양상이 좀 달라요.”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하소연. 나는 잠자코 듣는다. “제가 아파서 남편이 제 뒤치다꺼리 하느라 많이 애썼거든요. 진짜 고맙죠. 근데 요즘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이 눈에 거슬려요. 빨래 걷어 개키는 걸 보면 너무 건성건성 하는 거 있죠. 청소도 대충, 설거지도 대충, 그냥 시늉만 해요. 그릇을 뽀드득 소리 나게 잘 씻으라고 한마디 했거든요. 그랬더니 아무 말 없이 설거지를 내팽개치고 방으로 탁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이런 사소한 것들 때문에 자꾸 짜증이 나요. 남편이 미워지니까 제가 병원생활 할 때 시댁 식구들이 저보다 제 남편 걱정을 더 많이 했던 것도 새삼 원망스럽고요. 제가 왜 이렇게 쪼잔해졌는지 창피해요.”


 그녀가 30대 중반 무렵, 아들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 둘지 고민할 때 나 몰라라 했던 시어머니에 대한 야속함까지 폭발한다. 만성 허리 통증에도 불구하고 딸이 경단녀가 될까 걱정돼 외손주 육아를 도맡은 친정엄마에 대한 미안함의 반동일까.


 “사람들은 제게 ‘투덜대지 말고 감사하면서 살아라’고 하더라고요. 항암치료랑 방사선 치료 경과가 좋은데 뭐가 그리 억울하고 분하냐고 저를 은근히 야단치는 선배도 있어요. 반박하진 못하지만 그런 이야기 들으면 제가 나쁜 여자인 것 같아서 더 우울해요.”


 듣는 내내 마음이 아프다. 아무리 이런 저런 여건이 좋아도, 재발 걱정이나 약물 후유증, 휴직 후 복귀한 직장 내 입지에 대한 불안감 등 멘탈 관리까지, 쉽지 않은 상황이 짐작된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장을 거들어본다.


 “우리가 기댈 사람은 바로 옆에 있는 남편인데, 일일이 말을 안 하면 내 맘을 몰라주죠. 이 나라 남자들은 집안일을 도와준다고 생각하지 내 일이라는 생각을 별로 안하더라니까요. 왕자로 키워져서 그런가 봐요.” 잠시 침묵하던 그녀, 의외의 대답을 한다.


 “알고 보면 남편도 가엾어요. K-장남이잖아요. 신씨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외아들인데요. 그 기대에 부응하느라 허덕거리는 게 안쓰러워요. 시댁 식구들이 번갈아 사고를 치는데 그 때마다 제 남편이 나서서 돈을 내야 해결이 되더라고요. 대한민국 장남으로 태어난 남자들, 극소수 초능력자 빼곤 너나없이 힘들 거예요. 오죽하면 조르바처럼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겠어요? 우리나라 자연인들은 가족 건사하느라 뼈 빠지게 일하다가 자기 인생 찾아 가출한 그런 남자들 아닌가요?”


 갱년기 우울증을 호소하다 느닷없이 남편 옹호 발언을 하는 그녀. 웃프다. 자신의 갱년기를 들여다보던 중 남편의 갱년기가 보였던 건가. 큰 병을 앓은 사람의 눈으로 남편의 아픈 마음도 읽어낸 것 같다.


 “소파에 누워 말없이 천정만 쳐다보다가 담배 피러 나가는 남편의 뒤통수를 보면 가슴이 철렁해요. 그 사람도 나만큼 외로워 보이거든요. 그래서 울었어요.”


전화기 너머로 콧물을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말은 안 하는 데 아마 회사 내에서 명퇴 압력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 이미 50대 중반이니까요. 제가 충격 받을까봐 말을 안 하는 거 같고요.”


 “명퇴를 하게 된다면 받아들이라고 말할 생각이에요. 하늘이 무너지는 건 아니잖아요. 아들이 이제 대학을 졸업하니까, 남편이 좀 쉬어도 될 것 같아요. 남편한테 병간호 신세진 제가 이번에 갚을 차례예요.”


 아니, 방금 남편이 미워 죽겠다고 폭풍 하소연을 하던 그녀가 맞나? 어리둥절하면서도 그녀의 모드 전환이 감동이다.


 “남편이 유튜브로 맨날 6평 농막 짓기 동영상을 봐요. 친구한테 떠밀려 예산에 사둔 작은 땅이 있어요. 거기다 농막을 짓고 싶은 것 같은데 말을 못해요. 자기가 번 돈을 지금까지 자기 맘대로 한 번도 써보지 못한 사람이거든요. 찌질하기도 하고 가엾기도 해요.”


 얼마 전까지는 남편의 농막 로망이 왠지 아픈 아내를 떠나려는 배신처럼 느껴졌다는 그녀. 지금 생각이 확 바뀌고 있단다.


 “농막 짓고 그곳에 남편이 자주 있게 되면 일종의 결혼 안식년이 되지 않을까 생각되는 거 있죠. 25년의 결혼을 중간 점검한다고 할까, 서로의 갱년기에 인생 중간 평가를 해볼 기회를 갖는 거, 괜찮은 일 같아요.”


 “어릴 때 식구가 많아서 한 번도 제 방을 갖지 못했어요. 그래서 ‘자기만의 방’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죠. 남편에게 자기만의 방을 선물하면 제게도 그런 공간이 생길 것 같아요. 꼭 물리적인 공간인 건 아니고 정신적으로 독자적인 공간 같은 거요.”


 “아파서 병원에 있을 때, 퇴원하면 좀 멋지게 살아야겠다고 엄청 각오했어요. 근데 막상 집에 오고 출근하니까 잘 안 되더라고요. 아들이 컸으니까 이제 우리 부부도 지금까지보다 가족 관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각자 스스로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아내야죠. 그게 뭔지 한참 헤맬 것 같지만요. 어쨌든 지금까지와는 좀 다르게 살아보려고요. 하하.”


 좋은 생각이다. 헤매는 자가 다 길을 잃은 것은 분명 아닐 테니까. 갑자기 그녀가 우러러 보인다. 큰 병을 앓고 난 사람의 지혜가 새록새록 돋아나는 게 분명하다. 이 순간 띠동갑 후배가 띠동갑 선배처럼 느껴진다. 그녀의 오늘과 내일을 격하게 응원한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창조력은 갱년기 여성의 열정으로부터 나온다. 여성은 30세에 형성되고 40 세에 변화하며 50세에 완성된다.” 마거릿 미드, 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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